[인터뷰] 프랙탈·위상수학·복잡성까지···현대과학을 조각하는 예술가 김주현
자연의 숨겨진 패턴과 수(數)에 대한 교양서적이 영감 줘

서울의 옛 모습을 간직한 성북동. 도심과는 다른 그야 말로 달동네라 불리는 곳이지만, 어느 예술가에게는 숨통을 트여주는 곳이다. 좁은 비탈길 골목, 옹기종기 붙은 집들 사이에 있는 조각가 김주현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은 한옥인 작업실은 오로지 작가의 드로잉을 위한 공간이다. "네모반듯한 사각형은 참을 수 없다"는 작가의 성향처럼 이곳에 있는 그의 작품들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게 꼭 한옥을 닮았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작품 안에도 나름의 원리와 규칙이 숨겨져 있었다.

작업실 벽면을 가득 메운 <뒤틀림-그물망>. 김 작가는 흰 종이에 오직 연필과 컴퍼스만 이용해 벌집 모양의 구조를 그려간다. 1.2cm의 정사각형에서 시작해 그 옆에 또 다른 사각형 또는 삼각형을 이어가는 규칙이다. 이 원칙만 지키면 끝도 없이 그릴 수 있다. 이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컴퍼스가 가는대로 원칙에 맞게 계속 그리다가 적당히 제 맘대로 끝내는 그런 그림"이라고 답한다.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진=한효정 기자>
작업실 벽면을 가득 메운 <뒤틀림-그물망>. 김 작가는 흰 종이에 오직 연필과 컴퍼스만 이용해 벌집 모양의 구조를 그려간다. 1.2cm의 정사각형에서 시작해 그 옆에 또 다른 사각형 또는 삼각형을 이어가는 규칙이다. 이 원칙만 지키면 끝도 없이 그릴 수 있다. 이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컴퍼스가 가는대로 원칙에 맞게 계속 그리다가 적당히 제 맘대로 끝내는 그런 그림"이라고 답한다.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진=한효정 기자>
◆ 자연의 숨겨진 패턴과 수(數)에 대한 궁금증

김주현 작가는 2004년 전국 대학의 과학, 수학과 학과사무실에 그의 작품 <복잡성 연구>의 도록, 포스터, 모형을 만들어 보냈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아 실망했지만 계속 문을 두드렸고, 2005년 아이슈타인 탄생 100주년 심포지엄에 참석하면서 복잡계 연구의 대가와도 알게 됐다. <사진=한효정 기자>
김주현 작가는 2004년 전국 대학의 과학, 수학과 학과사무실에 그의 작품 <복잡성 연구>의 도록, 포스터, 모형을 만들어 보냈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아 실망했지만 계속 문을 두드렸고, 2005년 아이슈타인 탄생 100주년 심포지엄에 참석하면서 복잡계 연구의 대가와도 알게 됐다. <사진=한효정 기자>
김주현 작가는 프랙탈, 카오스, 복잡성 등 현대과학을 조각으로 표현한 다수의 작품을 선보인 과학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일정한 단위들이 단순한 규칙에 따라 연결되어 매우 복잡한 형태가 된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그의 작품에 과학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쌓기' 작업부터다. 이후 잇기, 엮기, 뒤틀기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2010년 발표한 '뒤틀림' 연작에는 대학 수학에서나 다루는 '위상수학'과 '토러스'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그리고 최근까지 작품에 녹아든 과학의 범위는 커져갔다.

그렇다면 그는 왜 결코 쉽지만은 않은 수학의 개념을 작품에 응용하게 되었을까. 

"제 작품은 자연의 법칙을 대변할 뿐 정확한 과학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기본을 배울 수 있던 것은 자연의 숨겨진 패턴과 수(數)에 대한 교양서적이 시작이었죠. 책을 읽으면서 제 작품이 수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자연을 좋아하는 김 작가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학자들이 자연의 비밀이 궁금해서 연구하듯이 예술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책은 그의 작업에 영감을 주고 자신의 성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 길이 하나만 바꿨더니? 새로운 구조 탄생

위 작품이 초기에 만든 <경첩>. 이 작품을 조금씩 뜯어서 다시 조립하자 아래와 같이 확 변한 구조가 나타났다. 작품명은 <22000개의 함석판으로 된 경첩>. 작가는 "카오스에 대한 책 한 권을 읽고 그 내용을 이렇게 금방 적용할 수 있을지 몰랐다"고 말했다. 작가는 책 한권이라고 표현했지만, 수학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다. <사진=김주현 제공>
위 작품이 초기에 만든 <경첩>. 이 작품을 조금씩 뜯어서 다시 조립하자 아래와 같이 확 변한 구조가 나타났다. 작품명은 <22000개의 함석판으로 된 경첩>. 작가는 "카오스에 대한 책 한 권을 읽고 그 내용을 이렇게 금방 적용할 수 있을지 몰랐다"고 말했다. 작가는 책 한권이라고 표현했지만, 수학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다. <사진=김주현 제공>

1989년부터 석고를 휙 부어 한 번에 만드는 원터치 조각을 해오던 김주현 작가는 1996년 '경첩' 작품을 통해 작업에 변화를 보여줬다. 함석판을 경첩 형태로 연결하거나 종이를 겹쳐서 쌓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개체를 서로 결합하기 위한 작가만의 원칙(패턴)이 필요했다. 그 원칙을 고안해내는 작업들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 

그는 "패턴에 대한 기초 개념을 이해하니까 작업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며 "외모를 꾸미는 게 아니라 원리에 충실했고 그 원리에 조금씩 변형을 줘서 창작할 공간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작품 원리를 설명하면서 "재밌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작가는 호기심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과학을 자신이 해석한대로 작품에 쓴다며 스스로를 '사이비'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태도까지도 가볍게 볼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2008년 우연히 위상수학을 알게 되면서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맞이했다. 위상수학은 위치와 형상,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위상수학에서는 도넛과 손잡이가 있는 머그컵처럼 공통된 성질을 가진 물체들을 늘이고 구부리고 줄이는 등 변형을 통해 같은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작가는 "직선 길이에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도형이 튀어나왔다"고 말했다.

"피보나치수열을 적용해 격자의 길이를 점점 늘이다 보면 항상 예쁜 모양이 나오죠. 제 의도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입니다. 저는 퍼져나가는 이 격자를 어떻게 메울 것인지만 생각한답니다."

오른쪽 작품은 <여분의 차원>. 토러스 구조인 나선형의 조형물이다. 약 9천 개의 LED 전구를 사용했다. <사진=김주현 제공>
오른쪽 작품은 <여분의 차원>. 토러스 구조인 나선형의 조형물이다. 약 9천 개의 LED 전구를 사용했다. <사진=김주현 제공>

<뒤틀림-그물망> 1안 제작도면. <출처=김주현 작가의 노트>
<뒤틀림-그물망> 1안 제작도면. <출처=김주현 작가의 노트>

◆ 예술가와 과학자의 임무

과학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던 2005년, 김주현 작가는 궁금했다. 과학자들은 내 작품을 어떻게 볼까? 작품에 과학 용어를 가져다 써도 될까? 과학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2005년 개인전을 열면서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토론장을 마련했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작가, 평론가, 건축가, 인문학자, 물리학자를 초대해서 무려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이 당시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생소했지만 작가는 적극적으로 과학자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김 작가는 이 만남이 억지로 이뤄질 필요는 없지만, 예술가와 과학자 모두 각자의 결과물로 사회에 기여할 책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작가 역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한 작품을 만들어왔다. 2007년 발표한 <생명의 다리>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자동차 위주의 대형 다리들이 가득 찬 한강에 식물이 곳곳에 심어진,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보행전용 다리를 놓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생명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조형물을 만들던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생명체가 공생하는 자연의 삶을 제시하는 적극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여전히 "우리 사회 마지막 이슈는 환경뿐이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한다.

<생명의 다리> 모형도. 김주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건축이 되고 도시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다리>는 실제로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다. <사진=김주현 제공>
<생명의 다리> 모형도. 김주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건축이 되고 도시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다리>는 실제로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다. <사진=김주현 제공>
김 작가는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활용될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조각가로서 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물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사회에 제안하는 것이며 수용은 사회의 몫으로 남겼다. 

예술 전문가보다 일반인하고 대화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 김 작가는 내년 전시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자신의 작품을 보러 온 사람들과 작품의 원리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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