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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②]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

글: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올해 4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국은 사실상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했다. 시진핑의 역사 발언이 동아시아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기고문을 작성했다. '동아시아의 역사와 시진핑의 역사' 기고문을 3편으로 연재한다.<편집자의 편지>

[기고]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 1편 바로가기

[기고]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 3편 바로가기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사진=대덕넷 DB>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사진=대덕넷 DB>
시진핑의 역사인식을 이루는 논법은 이러하다. 한편으로는 동한(東漢) 이후 수(隋)나라가 통일하기까지 북방민족과 퉁구스계 민족들에게 점령당했던 시기와 몽골계와 퉁구스계 민족에 의한 점령시대인 원나라와 청나라를 중국으로 두고(이 때 중국은 지리적 개념으로 동아시아의 일부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을 다시 한족의 나라로 등치시킨다(이 때 중국은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 중국이다).

시진핑의 역사발언은 방대한 역사연구 분야에서 전문화된 연구자들이 생산해 내는 담론과 연구물들을 이용하되, 이처럼 일관적이지 않은 두 명제를 명백한 비약이 있는 삼단논법으로 결합해서 팽창주의 비전에 이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인 스스로의 역사, 다른 아시아 국가 민족의 역사, 동아시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시진핑은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가졌던 주변 국가를 중국의 일부라고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 기원과 실상을 볼 때 조공과 책봉은 중원의 한족 왕조가 유목국가에 대해 행한 전략적 보상을 수사학적 표현으로 포장한 것이다.

실제로 한족 왕조들은 무력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유목세력에게 책봉으로 명예를 부여하고 물질적 이익을 주기 위해 조공을 바쳤다. 정착-농경 국가인 중원의 왕조에게는 조공책봉제도가 평화공존을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군사적 해결책보다는 공물을 바치고 국경무역을 제공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Jagchid and Symons 1989: 116).

한족 조정은 현상유지를 원하는 유목제국으로부터 종종 군사적 도움을 받아 내부 세력을 진압하거나 혹은 다른 외적의 침입을 격퇴했다. 사실 주나라가 호경(鎬京)에서 낙양(洛陽)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 사건도 주 유왕(幽王)의 장인 신후(申候)가 유목민족의 군사력을 빌어 폭군인 사위를 제압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유목민의 군사적 도움을 받는 사례는 그 외에도 중국 역사에 허다하게 등장한다. 근본적으로 군사기술은 유목민족 정복자들의 주 특기였다. 전국시대 조(趙)나라 무녕(武寧)왕은 국방을 위해 유목민족이 입는 옷(胡服)을 입게 하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유목민족의 전투기술을 익혀 강력한 기병대를 양성하기도 했다.

시진핑은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할 때,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조선'과 '화령' 중 국호를 선택하도록 의견을 구하고 조선에서 세자를 책봉할 때 중국에 알려 동의를 구한 조선-명나라 관계를 두고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명 왕조와 한국의 조선 왕조가 조공책봉질서 아래 교류했다는 점이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근거라면 중국의 한나라 조정이 화친정책을 펴는 기간 동안 한나라는 흉노의 일부였고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은 스탈린 소련의 일부였다는 말과 같은 얘기가 될 것이다.
조공무역은 당시 중국이 설정한 국제무역 규범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국제교역질서의 일부였던 조공무역에 참여하던 주변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다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자유무역에 관한 국제규범을 따르게 된 중국은 그 규범을 만든 미국이나 유럽의 일부라고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한국인과 세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고조 유방 이후 한나라는 전한·후한 총 400여 년을 지속했다. 오늘날 중국 문화 학술을 한학(漢學)이라고 부르는데서 알 수 있다시피 중국 학술 사상의 근간의 상당부분이 이 시대에 정립되었다.

유교와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전통문화가 확립되어 2000여년을 지속된 기초도 이 때 다져졌다. 한나라 시절 중국의 강역은 한 때 중앙아시아, 인도차이나, 요동까지 확장되었다. 하지만 강력한 흉노제국과 화친하기 위해 유방은 한나라를 개창한 후 북방의 흉노선우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조공을 보내야 했고 이러한 관계는 한(漢)왕조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기원전 200년 흉노의 선우(單于, 흉노 왕의 칭호) 묵돌(冒頓)이 마읍(馬邑)을 점령한 뒤 남하하자 유방은 흉노를 막기 위해 직접 나섰다. 그러다가 그만 묵돌선우의 유인술에 넘어가고 말았다. 유방은 역습을 당해 엄동설한에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갇혀 있었다. 유방은 사경 속에서 책사 진평(陳平)의 계책을 받아들여 황금과 주옥을 묵돌의 연지(閼氏, 흉노 왕후의 칭호)에게 바치며 포위를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연지의 말을 듣고 묵돌선우가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열어준 덕택에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온 유방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후로도 한나라는 한동안 흉노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방은 유경(劉敬)을 불러 흉노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유경은 유방이 묵돌선우의 유인술에 넘어가기 전에 흉노를 정탐하고 돌아와 "자신이 본 흉노의 가축은 여위고 비쩍 말라 있고 병사들은 늙거나 약한 자들뿐이었지만 정예군을 매복시키고 기다리며 유인하는 계략으로 보이니 흉노를 치면 안된다"고 유방에게 충고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유방은 당시 "망령되이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한다"고 유경을 광무현(廣武縣)으로 유배시켰다. 하지만 백등산에서 사지에 몰리고 나서야 비로소 유경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 뒤 유방은 유경을 사면했을 뿐만 아니라 2천호의 식읍을 내리고 관내후(關內候)로 삼았다. 유경은 이렇게 답했다.

"흉노선우에게 본처 소생의 맏공주와 후한 공물을 보내면 흉노가 공주를 연지로 삼고 그 소생을 태자로 삼을 것입니다. 묵돌이 건재하면 사위가 되고, 묵돌이 죽으면 외손자가 선우가 되는 것이니 외손자가 할아버지와 대등한 예를 취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11)

유방은 조왕 장오(張敖)에게 시집간 자신의 외동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이혼시킨 후 흉노에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아내인 여후(呂后)가 울며불며 반대한 탓에 유방은 그 대신 가인(家人, 궁녀들 가운데 관직명을 얻지 못한 사람) 중 한 명을 뽑아 맏공주라고 하여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유경을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게 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 나타난 화친 정책의 시작이다.

그 후 한나라는 황실의 여자를 보내고 매년 거액의 공물을 바쳐 화친하는 방식으로 흉노의 침입을 막았다. 기원전 195년 한 고조 유방이 죽고 15년 동안 한나라가 여후와 여씨들의 천하였던 시절에도 한나라는 흉노 선우의 조롱을 받으며 공물 바치기를 지속하였다.

무제가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과 같은 명장들을 앞세워 흉노를 맹공격한 이후 잠시 일방적 관계가 변화하고 흉노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한나라에 대한 압박이 약화된 시기도 있었지만 흉노는 줄곧 한나라에 위협적 세력이었다.

한나라는 흉노를 공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화친 전략으로 평화를 샀다.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이야기도 그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흉노선우 호한야(呼韓邪)에게 시집간 왕소군과 같은 여인은 그 어떤 한나라 사신이나 장군보다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평화로운 시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중원의 중국과 조공책봉관계였던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근거라면 흉노에 공물을 바치던 한나라는 흉노제국의 일부였다고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마오쩌둥은 1950년 통일을 앞둔 시점에 대만해협을 건너는 대신 압록강을 건넜다. 미국을 한국에 묶어 두는 사이 동구 위성국가를 안정시키고 볼셰비키 혁명의 공고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스탈린의 전략적 지시 때문이었다.

대만해협이 미7함대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마오쩌둥이 통일을 목전에 둔 시점에 대만해협 대신 압록강을 건너기로 결정한 이유는 스탈린에 대한 마오쩌둥의 강박증 때문이라는 것이 구(舊) 소련 문서까지 종합하여 고찰한 연구(Pantsov and Levine 2013)의 결론이다.

중국에 스탈린주의를 이식하려 했던 마오쩌둥은 공포정치로 두려움에 떨게 한 스탈린을 경외하고 의심 많은 스탈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소련의 세계 공산화 전략에 따라 압록강을 넘은 것이다. 이처럼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을 충실하게 따르는 추종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독립적인 중국 사회주의 국가를 일구어 내었다. 중국인민들이 마오쩌둥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마오쩌둥의 중국을 스탈린 소련의 일부였다라고 말하면 중국인들은 몹시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도덕적 강국'을 꿈꾸는 중국인들은 체면(面子)이 크게 손상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데 중국인들의 자존심이 상했다면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는 시진핑의 역사인식과 발언을 들은 한국인도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역사해석은 왜곡된 역사의식의 발로여서 자존심 문제에 그치지 않고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12)

그러므로 지혜로운 한족 중국인이라면 이웃나라를 존중하는 문화를 가꾸는 것이 자국을 위한 길도 됨을 알 것이다. 또한 고유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자국 내 타민족에게도 존중에 기반한 정치를 하는 것이 마땅함도 알 것이다.

만일 '중국의 꿈(中國夢)'을 위해서는 그런 가치를 포기할 수도 있고, 그래서 시진핑이 행한 무람된 언행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중국 역시 다른 나라에 의해 그에 상응하는 무례한 대우를 받고 불이익이 생기더라도 감수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시진핑의 역사 발언과 그것을 있게 한 생각은 위험하다. 그런 언행은 일부 편협한 한족이 열광하는 국수주의에 편승해서 공산당 일당독재의 한계를 숨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한국민의 일반적 생각이다. 이러한 팽창주의적 포부는 전략적 필요성이라는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국제사회의 비판과 중국의 국론분열을 초래할 것으로 본다.

사마천(司馬遷)은 전한시대와 그 이전에 있었던 북방유목민과 한족의 역사를 사기 속에 담았다. 건륭제는 퉁구스계 민족의 역사를 상세한 고증과 함께 정리하고 이를 만주원류고에 실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한족의 역사 중심에서 벗어나 소수민족사를 모두 중국사에 담는 방식으로 중국 일원적 역사로 개수하고 있다. 그 방법은 중국 영토 안에 있는 소수민족의 역사를 모두 민족국가 중국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한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보면서 편의에 따라서는 중국 안에 일부 존재하는 초원민족의 역사 또한 모두 중국의 역사로 본다. 즉 중국 영토 밖의 민족과 한족의 역사를 편의에 따라 구분도 하고 때로는 교묘하게 동치시킨다.

그리하여 민족사학으로는 초원민족의 역사, 지역사학으로는 중앙유라시아와 동유라시아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늘날 중국 역사학자들의 과업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헌적 근거에 반하는 과거 영토 확대를 위해 가짜 증거를 만들어내는 것이 또 다른 과업으로 정의된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 역사작가 가오훙레이(高洪雷)는 '다른 절반의 중국사(另一半中国史)'라는 제목 아래 몽골과 퉁구스계 민족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이를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중적 역사작가들의 작업은 불가피하게 이중적 의의를 갖는다.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 자신들의 역사라고 보는 탓에 과거 중국사서에서처럼 유목민족을 폄훼하는 일은 없어졌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다. 그가 한족의 역사를 넘어서 중국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도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북방민족사, 퉁구스계민족사를 그 자체 그대로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한족의 역사와 동의어로 간주되는 중국사를 벗어나 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서의 중국사를 서술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오훙레이의 역사이야기는 오용 우려에도 노출되어 있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실제로 역사 왜곡의 압력을 벗어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중국 정치인과 관학자들의 존재는 오용 우려를 현실화시킨다.

이들은 사실보다 이념을 중시하면서 현재 '중국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와 그 주변'의 역사를 '민족국가 중국'의 역사로 기술하는 데에 가오훙레이의 저작과 같은 작업을 이용한다. 가오훙레이가 들려주는 역사는 초원민족의 역사이고 중앙유라시아와 동유라시아의 역사이다.

청나라가 물려준 광활한 영토를 중화인민공화국이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관학자들은 '중국사=한족의 역사'라는 담론을 유지하면서 편의에 따라 '중국사=중국영토에 속한 소수민족들의 과거역사와 한족의 역사'라는 개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이런 등식은 교묘하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서술로 이끈다. 신장과 티벳의 역사를 서술할 때의 가오훙레이는 이러한 왜곡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4월, 중국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과 국가측량국(國家測量局)은 공동으로 명나라 때의 만리장성 동쪽 기점이 산해관(山海關)보다 훨씬 더 동쪽에 있는 압록강 하구 단동(丹東) 부근의 호산(虎山) 산성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역사적 사건들을 보나 유물들을 보나 산해관이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사 연구자에게는 상식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악한 조성작업과 함께 만리장성이 산해관을 넘어 요양(遼陽)까지, 다시 요양을 넘어 단둥 부근까지 연장된 것이다. 심지어 만리장성의 위치를 단둥을 넘어 청천강 하구까지 연장시킨 지도들이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중국 관학자들의 이러한 행태는 한반도보다 선행하는 구석기 시대를 갖기 위해 일본의 구석기 유적을 조작한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와 그에 동조했던 전문학자들을 닮았다. 중국은 일본의 역사반성을 촉구하면서도 지금 건강하지 못한 역사학 풍토를 동아시아에 조장하고 있다.

중국 관학자들의 이러한 왜곡은 아편전쟁 후 일본의 국학자들과도 닮은 구석이 있거니와 한국민은 이를 반식민상태 정서의 일종이라고 본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국학자들의 사고로부터 자양분을 섭취했음은 시진핑도, 중국 공산당 내의 지식집단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 정부가 지금 조장하고 있는 학문 풍토가 그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스스로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상대방을 제압한 일본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내부의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하려는 태도와 학문ㆍ사상 통제였으며 군부의 입김이 강했다는 점이다.

한국민들이 보기에 고도성장으로 굴기한 중국은 지금, 공산당 일당 체제 특유의 정치적 체질 위에 과거 일본이 동아시아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길로 진행할 때와 유사한 상황적 요인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일본이 저지른 불행한 결과를 우리는 역사로부터 잘 알고 있다. 수없이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고통 당하고 무고하게 죽었으며 일본 스스로도 결국 자국민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불행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국인들 스스로의 자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중국에서 언론과 지식인의 비판활동이 그럴 만큼 자유롭지 못하며 "군중의 갈채에 현혹되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회주의 원로'도 없다.

중국사는 동아시아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고찰할 때 보편성, 합리성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담는 것보다는 확대된 시각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고 한족 민족국가 역사로서의 중국사를 미화하면 중국사는 오히려 초라해진다.

많은 중국인들도 이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중국문화와 한족문화의 층위가 그저 영토의 대소문제라면 중원을 송두리째 들어다 바치고 유목민족의 지배를 받은 한족의 역사는 속절없이 자존심에 거슬리는 역사가 된다.

송나라의 훌륭한 문화적, 철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시 강성했던 유목민족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멸망한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가 된다. 산해관(山海關)을 열어 만주족의 청나라와 함께 이자성(李自成) 세력을 격퇴하고, 버마까지 쫓아가서 계왕(桂王: 永曆帝)을 붙잡고 명나라 부흥세력을 일소한 오삼계(吳三桂)의 명나라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훌륭한 학자들이 많은 중국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팽창주의적 굴기를 위해 이를 감추며 교묘한 역사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 국민을 잠시 눈가림할 수는 있을지언정 양심적인 중국인 학자를 속이기 힘들고 세계 사람들에게 보편적 설득력을 지니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한 역사관으로 팽창주의를 '굴기'라고 여기는 일은 '도덕적 강국'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중국인들을 불행한 상태로 이끌 가능성이 높다.

한족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부끄러운 역사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민도, 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진핑의 역사 발언과 지금 중국 정부가 강조하는 역사관은, 스스로 설정한 논리의 함정에 빠진 나머지, 부끄러울 이유가 없는 한족의 역사를 부끄럽고 초라한 역사로 만들며 이를 스스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만주족 정복자들은 명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요동의 한족들 상당수를 한인팔기(漢人八旗)의 형태로 동원하였다. 중국을 평정하고 난 후에는 이들을 만주족과 동일하게 대접해 주었다. 청나라 지배층 자신들은 계속 만주어를 사용하면서, 정복된 한족들에게는 요동출신 한인팔기들이 사용했던 요동의 중국어를 사용토록 하였다 (Hong 2012: 47-48, 360).

만주족 지배층과 함께 북경으로 간 한족팔기군의 언어는 북경관화(北京官話)가 되었다. 관화란 명대에 공식중국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청조의 등장과 함께 명조의 북경관화를 대체한 청조의 북경관화는 한족 관리들이 쓰던 알타이어화한 사투리 중국어였다. 알타이어화한 한인팔기군의 언어는 만주족 지배층의 귀에 친근했을 것이다.

1980년대에 일본 경제가 세계경제를 모두 집어삼킬 것과 같이 무서운 기세로 시장 지배력을 키워가던 무렵 국제비즈니스를 하던 미국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일본식 영어를 별도로 학습했다. 심각하게 알타이어화되고 발음 또한 일본어식인 일본 비즈니스맨들의 영어를 본토 영어 사용자들이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과정이 수백 년 동안 진행되었다면, 그래서 영어권 식자들이 모두 일본식 영어를 별도로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면, 영어의 일본어화(알타이어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요동지방의 한족들이 사용하는 중국어에서 수백 년에 걸쳐 실제로 진행되었다.

만주족이 아홉 세대에 걸쳐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동안 만주어는 북경 관화에 더욱 영향을 미쳤다. 북경 지역 중국어의 알타이어화는 한층 더 진행되었다. 오늘날의 표준 중국어는 어미변화 경향과 함께 알타이어 영향을 문장구조에 갖고 있다. 목적어를 동사의 앞에 두는 경향이 있으며, 비교문에서 비교 대상을 비교 형용사 앞에 두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알타이어의 영향이다 (Ostler 2005: 146). 또한 어미에 조사와 같은 성분이 흔히 붙는다. 성조변화도 단순화되었다. 중국어 중에서도 광둥어에는 9개(6개로 보기도 한다)의 성조가 있는 반면 오늘날의 표준 중국어에는 그보다 적은 4개의 성조만 있다. 표준 중국어인 보통화(普通話)는 이렇게 알타이어화하며 형성된 것이다.

청나라의 중원 정벌은 만주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 요동의 한족으로 이루어진 한인팔기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621-1635년 사이 청 태조 누르하치와 청 태종 홍타이지는 만주팔기(滿洲八旗)와 마찬가지로 몽골팔기(蒙古八旗)를 만들었다. 청조는 국경 수비를 몽골팔기에 의존했다.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대는 청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한 무제의 고조선 공략 이후 요동에 살게 된 한족들은 만주족들과 섞여 살며 알타이어화 한 중국어를 말하며 살았다. 이들은 청조가 일어날 때 한인 팔기의 주축이 되었다.

요동의 한인팔기(漢人八旗)는 만주어와 중국어를 구사했고 만주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한족 번왕 협력자인 오삼계(吳三桂), 상가희(尙可喜), 경정충(耿精忠)과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73년 이들은 '삼번의 난'을 일으켰고 청군에 진압당해 멸문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대륙 정복 이후 요동의 한인팔기들은 청나라 조정의 관료로 임명되었다. 만주족, 몽골족, 요동출신 한인팔기들은 지배계층을 이루었다. 말단과 지방을 관리한 중추 집단은 한족 식자층들이었다.

중국인들은 중국의 역사를 한족의 역사로 정의해서는, 즉 유목민 정복왕조를 배제하고서는, 역사적·문화적 자존심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제국주의 시대를 산 많은 한족 지식인들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현대 문인이자 현대의 루쉰이라고 일컬어지는 문화사학자인 위치우위(余秋雨)는 송나라의 사직을 위해 끝까지 싸우고 쿠빌라이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택했던 문천상(文天祥)이나, 몽골초원에서 내려와 중원의 지배자가 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나, 모두 중화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치가와 관학자들은 지금 배타적 민족주의에 그 역사를 이용하고 있다. 이런 중국과 한국이 자국의 일부였다고 말하는 중국을, 한국인들은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주나라(周) 이래의 중국 왕조사를 일별해 보면 한족 왕조, 북방의 몽골계 유목민 왕조, 동북방의 퉁구스계 유목민 왕조가 번갈아가며 중원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몽골세력, 만주세력, 한족세력이 번갈아가며 중원을 다스렸다. 서진(西晉) 다음에 들어선 5호 16국과 북조(北朝) 왕조들은 이들 몽골계와 퉁구스계 유목세력이 세운 왕조였다.

수나라와 당나라 황실도 반은 선비족 가계였다. 송나라가 한족 왕조였지만 몽골족의 원나라가 이내 중국을 다스렸다. 다시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 대체되었다.
중원을 넘어 중앙유라시아로 시야를 넓혀 보면 가까이는 17-18세기 중반까지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청과 자웅을 겨루었던 준가르(1671-1760)로부터 멀리는 흉노, 돌궐, 월지 등 더 많은 초원 민족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이처럼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의 한 점 위에 우리는 서 있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일본인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한중일 3국에 있는 정치인과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애국주의 관념에 빠져 동아시아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심각한 점은 박약한 근거에 입각해서 과도한 애국주의 역사관을 젊은이들에게 주입하고, 그럼으로써 상대국에서 자신들과 닮은 정치세력과 국수주의 학자들이 재생산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은 지금 '지리적 범위를 가리키는 중국'과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 중국'을 교묘히 등치시키면서 동아시아 역사를 왜곡하고 팽창주의 비전에 이용하고 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정치적 민족주의에 빠져 중국사와 동·중앙유라시아사, 한족사와 초원민족사를 의도적으로 편의에 따라 동치시키고 있다.

시진핑과 정치인들의 발언은 그러한 역사인식의 영향을 받은 발언이자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모순된 역사 서술을 하게 하는 무언의 압력이 되고 있다. 그러한 역사인식이 진정으로 중국에게 도움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아시아 공동체(One Asia) 비전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 국경선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는 민족국가 중국만의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를 누볐던 민족들 공동의 것이자 세계인의 것이다.

중국은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가들을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티벳 자치운동을 억누르며 서부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복제국 청나라의 유산이 민족국가 중화인민공화국에 드리운 한 단면이다. 현재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이 그 통제권을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과거 역사는 그 기간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말해 주고 있다.
* '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는 3편에 계속됩니다.
 
◆각주

11)[史記 劉敬叔孫通列傳 6] 陛下誠能以適長公主妻之,厚奉遺之,彼知漢適女送厚,蠻夷必慕以為閼氏,生子必為太子。代單于。何者?貪漢重幣。陛下以歲時漢所餘彼所鮮數問遺,因使辯士風諭以禮節。冒頓在,固為子婿;死,則外孫為單于。豈嘗聞外孫敢與大父抗禮者哉?兵可無戰以漸臣也。若陛下不能遣長公主,而令宗室及後宮詐稱公主,彼亦知,不肯貴近,無益也。폐하께서 만일 본처 소생의 맏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많은 예물을 내려준다면 그는 한나라가 본처 소생의 맏공주를 보내고 예물이 많은 것을 보고 오랑캐일지라도 반드시 공주를 존중하여 연지로 삼고, 공주께서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선우의 대를 잇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나라의 많은 예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에는 언제나 남아돌지만 그들에게는 귀한 물건을 폐하께서 자주 보내주면서 그때마다 변사를 보내 예절을 가르치십시오. 묵돌이 살아있으면 폐하의 사위이고 죽으면 폐하의 외손이 선우가 됩니다. 폐하께서는 외손자가 감히 외할아버지와 대등한 예를 취하려는 경우를 들어보셨습니까? 이렇게 하면 군대를 내어 싸우는 일 없이 그들을 서서히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맏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의 딸을 뽑아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 그녀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가까이하지 않을 터이니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12)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한 요인은 여러 가지이다. 그 중 하나로서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정신적, 심리적 분위기를 간과할 수 없다. 윈스턴 처칠은 '위기 속의 세계(The World in Crisis)'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국가들은 물질적 번영에 만족하지 못하고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투쟁의 길로 내달렸다. 종교가 쇠퇴하는 가운데 지나친 찬양을 받은 국가적 열정이 온 대지의 아래에서부터 활활 타올랐다. 거의 온 세상이 고통 받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은 분명 위험을 무릅쓰기를 갈망했다."(강상규·김세걸 2014: 105에서 재인용).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적으로 비정상적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어리석은 역사 전쟁이 치기어린 자존심 경쟁과 바보 같은 의사 결정을 거쳐 처칠이 경험했던 100여 년 전과 같은 상태로 동아시아 사람들의 생각을 몰아갈 리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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