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컨버전스 최고경영자과정, 일본 정신적 지주 고향 찾아
"일본인들 특성 국가 아젠다 정해지면 말없이 따르는 특성 알아야"

심수관요에 들러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KCAMP 14기. <사진=길애경 기자>
심수관요에 들러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KCAMP 14기. <사진=길애경 기자>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천왕체계가 완성되고 서양과 교류를 통해 과학과 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메이지유신의 중심에는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등 사무라이들이 있습니다. 때문에 일본인의 정신적 기저에는 사무라이 정신이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내년은 메이지유신 150주년입니다. 일본의 국영방송 NHK는 매년 메이지유신 주역 중 한명을 주인공으로 1년분량의 역사드라마를 제작합니다. 이는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 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본인 특유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작용된다고 합니다. 내년 주인공이 사이고 다카모리입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한일합병, 위안부 문제 등 우리에게 아픈 역사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나라의 과학과 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지만 중요 기술, 소재 등 여전히 일본에 의지하고 있는 분야가 많습니다. 이번 현장 답사 동행 취재는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 기획됐습니다. 1편은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 사이고 다카모리, 2편은 사무라이 속 엇갈린 조선인 운명 3편 참가자들의 소감으로 보도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편지>

'박무덕, 심수관.'

일본 가고시마 속 조선인, 두 사람의 이름은 일본과 한국에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한 사람은 태평양 전쟁 전범 25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정한론과 천황제 신봉자였고, 한사람은 일본 도예 문화를 꽃피우며 현재도 그 업을 지속하고 있다.

가고시마에는 조선인 마을이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 가지야 마을 건너편에 있는 고라이 마을(고려정, 高麗町). 가지야 마을과 고라이 마을 사이에는 고쓰키가와(갑돌천. 甲突川) 천이 흐르고 이를 잇는 다리는 고라이바시(高麗橋), 고려교라고 부른다.

사무라이 정신이 강한 땅 가고시마에 100% 조선인 마을이 어떻게 들어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아픈 역사에서 시작된다. 1598년 정유재란 시기 전라도에 침입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남원성을 공략해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가면서 형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박무덕과 심수관의 조상인 박평의와 심당길도 이 시기에 잡혀가며 이 곳에 정착한다. 이들은 1000명에 이르는 순수 조선인 마을을 이뤘다.  

지금은 미야마(美山)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조선인 거주 마을 뒤에는 단군을 모신 사당이 남아있고 이들은 조선인끼리만 혼인하고 조선말을 하며 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사실은 사무라이의 보호아래 조선인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사쓰마번(오늘날 가고시마)의 번주는 조선의 도예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기 위해 단군 숭배 등 가능한 조선인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KAIST 컨버전스 최고경영자과정(이하KCAMP) 14기가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의 저자 이광훈 교수와 '메이지유신 역사 문화 탐방'을 위해 둘쨋날 방문한 곳은 심수관요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박무덕) 기념관, 특공평화회관(가미카제 기념관)이다.

◆살기 위해 도예 배운 심당길, 일본 도예문화의 중심이 되다

심수관요 입구에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비석과 여전히 작업중인 도공.<사진=길애경 기자>
심수관요 입구에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비석과 여전히 작업중인 도공.<사진=길애경 기자>

전쟁이 끝나고 심당길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대신 일본에 남는다. 심당길 뿐만 아니라 양반을 제외한 상당수 포로가 일본에 남는 선택을 한다. 돌아가도 뾰족하게 먹고 살 대책이 없다는 생각에 그나마 대우가 나은 일본을 선택했다. 혹자는 백성을 안중에 두지 않는 나라에 굳이 돌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으로도 해석한다. 

심당길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도공이었던 박평의에게 도예기술을 배운다. 심당길은 20여년간 노력끝에 백토를 발견한다. 그리고 조선의 전통가마형식인 오름가마(열기가 위로 올라가는)를 구현하며 유백색의 빛을 내는 백자 제작에 성공한다.

그의 후손 심수관이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도자기를 출품하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된다. 전세계에서 작품 주문이 이어졌다. 오늘날 심수관요의 탄생이다.

이광훈 교수는 "심당길은 중인 이상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 집에 있는 묘비를 보면 하녀가 따라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양반으로 예상된다"면서 "조선 도예 기술에 그의 지식, 지혜가 더해지며 최고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가마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를 두고 조선인들의 애국심이라고 해석하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시기적으로 문화를 높이 평가한 사쓰마 번주의 보호가 맞다"면서 "실제 메이지유신 이후 사무라이 체제가 무너지며 이들을 보호하던 사무라이도 사라지고 도공마을도 해체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심수관요의 후손은 14대까지 조선인 100%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현재 15대 심수관이 일본 여성과 결혼하면서 지속성은 깨질 전망이다. 

이광훈 교수에 의하면 일본의 국민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심수관요를 방문해 인터뷰하고 '故郷忘じがたく候(고향을 어찌 잊으랴)' 책을 내놓으면서 국내에도 알려지게 됐다.

심수관요 입구에 들어서면 시바 료타로가 지은책 제목을 새긴 '故郷忘じがたく候' 기념비가 자리해 있다. 그리고 여전히 도공들이 작업을 하며 심수관요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에서는 심수관을 조선인의 자주성, 독립성을 지킨 인물이라고 칭찬하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면서 "그를 한국인, 일본인으로 굳이 나누기보다 그냥 한 사람으로 봐야한다. 그는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업에 집중하고 있는 도공이다"라고 조언했다. 

◆살기 위해 일본 성 따른 박무덕(도고 시게노리) 태평양 전범 25인으로 

도고 시게노리에 대해 '신념의 외상'이라는 평가한 日 기록물.<사진=길애경 기자>
도고 시게노리에 대해 '신념의 외상'이라는 평가한 日 기록물.<사진=길애경 기자>

박무덕은 도공인 박평의의 후손이다. 박평의도 도공 마을에 살았다. 그의 후손은 토기뿐인 일본에 사쓰마야키(薩摩窯, 도자기)를 창조했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사무라이의 보호가 무너지고 조선인 핍박이 시작됐다. 박무덕의 아버지 박수승은 조선인 이름으로는 출세할 수 없다는 생각에 유달리 영리했던 아들의 앞날을 위해 400년간 써오던 박씨 성 대신 사쓰마 번사였던 '도고 야하치로(東鄕彌八郞)' 밑으로 입적한다.

도고 시게노리(박무덕)는 일본 최고 대학이었던 동경제대에 입학 할 정도로 수재였다. 훗날 그는 오늘날 천황제, 일본의 정체성 유지를 관철시킨다.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의 정체성을 지켜냈으니 아이러니한 역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기념관에는 그의 활약상(?)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독일어를 전공한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독일 대사를 비롯해 태평양 전쟁시기 외무대신을 지낸다. 

1945년 7월 연합군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8월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할 시기에 일본 군부는 군대 유지 등 여러 조건을 내놨다. 하지만 도고 시게노리는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는 '국체호지(國體護持)' 하나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 천황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관철시켰다

이 교수는 "도조 내각의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는 소련을 활용해 전쟁을 종식하려 했으나 소련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이뤄졌다"면서 "천황제 사수를 주장한 이력으로 그는 A급 전범 25인에 이름이 올랐다. 1948년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구금 중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슴 아프면서도 화가 난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사무라이 정신이 바탕에 깔린 일본인들은 '생사일여(生死一如)' 인식에 따라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 한국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할 때 그들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염두에 둔다"면서 "그들은 삶과 죽음을 같이 생각한다. 이런 정신적 바탕으로 어린 병사들이 죽음의 길인 가미카제 전투기에도 올랐을 것이다. 우리가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가마카제특공대 기념 '특공평화회관'

가미카제특공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태평양 전쟁시기 미국 항공모함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살특공대다. 기념관은 대원들이 탔던 부서진 비행체부터 개인별 사진, 부모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부모들의 자식을 향한 절절함을 담은 영상도 실시간 상영된다. 상영관은 빈 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KCAMP 참석자들은 기념관을 둘러보며 17세, 19세, 20세 등 어린 나이에 죽음의 비행에 앞서 마음을 담아 썼을 유서같은 편지를 하나, 하나 읽어갔다. 어린 모습의 사진 앞에 잠시 멈춰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호해지는 심정에 분노에 앞서 씁쓸해하기도 했다.

일본은 가미카제특공대의 활약을 담은 영화 '호따루-난 너를 위해 죽으러 간다(1호기 탑승자가 남긴말)'를 제작해 그들을 영웅으로 높였다. 일본은 그들을 여전히 영웅시 하고 있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을 반성하기 보다 군국주의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활용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교수는 "일본인의 국민성은 특성상 국가의 아젠다가 정해지면 자신과 맞지 않아도 같이 따른다"면서 "가미카제특공대의 젊은 친구가 유달리 많은 것도 그런 분위기가 컸다. 상황이 재현되면 일본은 같은 흐름을 따를 것이다. 이런 점이 우리가 알아야할 일본인의 특성"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게도 아픈 역사였던 현장을 둘러본 KCAMP 참석자들은 "그동안 일본 역사를 잘 몰랐고 크게 관심도 없었던 게 사실"이라고 고백하며 "사이고 다카모리, 가마카제특공대 정신이 살아 숨쉬며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산업이 급성장하며 일본을 따라 잡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을 너무 모르고 있다. 일본에 대해 알아야 할게 아직도 많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히며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참고문헌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 저자 이광훈,  '칼에 지다1, 2' 저자 아사다 지로

가미카제특공대 기념관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KCAMP 14기.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가미카제특공대 기념관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KCAMP 14기.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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