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꽃들은 왜 이렇게 향기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벌이나 나비 등 꽃가루를 옮겨 줄 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꽃들은 모양이나 색으로 꽃가루를 날라 줄 곤충이나 동물들을 유인하지만, 멀리 있는 곤충들에게는 향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네비게이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루 중 꽃들이 향기를 방출하는 시간도 꽃가루를 주로 옮겨주는 곤충의 활동 시간과 맞추어져 있다. 즉 나비나 벌에 의해 수정되는 꽃들은 낮 시간 동안에 꽃향기를 주로 방출하고 나방이에 의해 수정되는 꽃들은 밤 시간에 꽃향기를 주로 방출한다.
또한 수정의 준비가 덜 된 막 피어나는 꽃이나 이미 수정이 이루어져 더 이상 꽃가루받이가 필요 없는 꽃들은 아직 수정되지 않은 꽃들을 위해 향기 배출이 억제된다.
오래 전 배웠던 신라의 선덕여왕과 모란꽃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당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내 왔다고 한다. 그런데 후일에 선덕여왕이 된 어린 덕만공주는 꽃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향기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아버지인 진평왕이 "그것을 어찌 아느냐?"고 물으니 공주는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꽃은 향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선덕여왕의 총명성을 부각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용비어천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로 모란꽃에는 향기가 있다.
얼마 전 동네를 산책하면서 영산홍이 아름답게 핀 화단을 본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벌이나 나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림 속의 꽃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적막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우리 동네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연구팀에 의하면 대기 오염이 꽃향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이로 인해 벌과 나비가 먹이를 찾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어 벌과 나비의 개체수가 급속히 줄어드는 한 원인이 된다고 한다.
연구팀에 의하면 1800년대와 같이 대기 오염이 없던 시절에는 꽃향기는 1 km 이상을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도시에서는 꽃향기가 멀어야 300 m 정도까지 밖에는 퍼지지 못한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벌이나 나비가 꽃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꽃들은 수정의 기회가 줄어들어 번식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꽃향기는 휘발성이 강한 물질인데, 대기 오염 물질 속에 있는 오존이나 기타 반응성이 큰 화학물질과 빠르게 결합하여 향을 잃어버리거나 변질 되게 된다. 그러므로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냄새는 원래의 꽃향기가 아닌 다른 냄새가 되어 벌과 나비들에게 꽃의 위치를 알려주는 네비게이터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프랑스 연구팀의 연구에 의하면 장미의 달콤하고 기분 좋게 하는 향의 주 성분은 모노테르펜 게라니올(monoterpene geraniol)이라는 물질인데, RhNUDX1이라는 효소가 장미로 하여금 꽃술에서 이 물질을 만들도록 하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향기가 없거나 약한 장미에서는 이 효소가 없음을 발견하였다. 판매를 위해 장거리 여행을 해야하는 장미에게 필요한 것은 꽃향기보다는 강인함이기 때문에 새로운 품종의 개발 과정에서 향기 부분이 희생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가장 향기가 좋은 꽃 10 가지를 뽑아 놓은 게 있어 옮겨 본다. 순위가 낮은 꽃부터 나열하면, 등꽃(10), 프랜지파니(9), 향기알리섬(8), 스위트피(7), 분꽃(6), 초콜릿코스모스(5), 치자꽃(4), 은방울꽃(3), 쟈스민(2), 그리고 가장 좋은 향기를 가진 꽃은 역시 장미였다.
사람들에게도 고유의 향기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향기는 향수를 뿌려 만든 인위적인 향이 아니라 내면의 인품과 생각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은밀한 향기 같은 것을 말한다. 꽃과 마찬가지로 그 향은 벌이나 나비가 좋아하는 달콤하고 기분 좋은 향기일 수도 있고 딱정벌레가 좋아하는 그런 냄새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풍기는 내면의 향기에 따라 그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모여 친구가 되기 때문이리라. 달콤한 5월의 덩굴장미 향을 맡으며 나는 어떤 꽃의 향기를 닮은 사람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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