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범 전국연구소장협의회장 "잘하는 기술 그만! 팔리는 기술이어야"
우진이엔지 경영 일대기···남의 집 앞마당서 창업해 수천만불 수출기업 성장

서정범 전국연구소장협의회 회장이 "기업 R&D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세계와 호흡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사진=대덕넷>
서정범 전국연구소장협의회 회장이 "기업 R&D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세계와 호흡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사진=대덕넷>
"제4차 산업혁명에서 기존 제조업과 ICT 융합이 미래 국가경쟁력을 책임질 것입니다. 기업연과 출연연 R&D 연결로 새로운 융합기술을 창출해야 합니다. 출연연·기업연 R&D 연결에 지금이 적기입니다."

서정범 전국연구소장협의회 신임 회장의 말이다. 지난달 5일 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민간기업 부설연구소 연구소장 간 R&D 협력·정보교환·연구생산성 제고 등의 역할을 꾀하고 있다.

협의회는 회원사 간 친목 도모를 위해 연 4회 정기모임을 개최하고 있으며 특히 기술융합클러스터 10개 분야를 구성해 매월 학술토론과 기술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해외 기업 R&D 벤치마킹에도 집중하며 매년 1회 해외기술을 탐방하며 선진 R&D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

서정범 회장은 2년 임기 동안의 주요 역할로 '정부 R&D 지원사업 관리체계 변화'를 내세웠다. 그는 "R&D 사후관리가 관료 중심에서 벗어나 민간단체가 중심이 돼야 한다"라며 "단기적 관점이 아닌 장기적 관점으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출연연과 기업의 전문가들이 연계해 지속적인 사후관리 체계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 회장은 "기업 R&D 연구소들이 서로 간의 벽을 넘어 다양한 협력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라며 "기업 R&D 뿐만 아니라 출연연 R&D의 협력 물꼬를 만들어가며 세계 시장이 요구하는 기술·제품을 만들어 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잘하는 R&D 그만! 팔리는 R&D 돼야"

"기업이 잘하는 기술로만 제품을 만들어내면 뭐하나요? 안팔리면 그만이죠! 기업 R&D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합니다. 세계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을 만들어 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서정범 회장은 전통 제조업 우진이엔지 기업을 이끌고 있다. 지난 1984년 영등포구 문래동 남의 집 앞마당에서 철판을 자를 수 있는 기계 한 대를 가지고 창업해 현재는 수천만불 수출 중장비 제조기업으로 이끌어온 서 회장. 그가 33년 동안 제조업을 이끌어오며 얻어낸 기업 R&D 철학이다.

우진이엔지 R&D 부설연구소에서 2000년대 초 굴착기에 들어가는 변속기를 야심차게 개발했지만, 이를 납품하는 국내 대기업에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수요가 없으니 사용자의 제품 검증도 어려웠을 터.

부설연구소 존폐 위기의 고배를 마셨지만, 수년 후 독일 중장비 기업에 가까스로 납품에 성공하게 된다. 당시 서 회장은 "기업 R&D는 세계 시장이 요구하는 기술에 선두주자로 달려야 하고, 그 시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수년간 노하우를 쌓아온 우진이엔지는 국내 두산인프라코어를 비롯해 영국 중장비 제조업체 JCB와 미국의 스탠리·테렉스, 일본의 미찌비시, 터키의 추쿠로바 등의 세계 우수업체들에 굴착기 등의 중장비 부품을 납품하고 있다.

서 회장은 "전통 제조업은 R&D 이득을 많이 보는 업종은 아니지만, 그 필요성은 느끼고 있어야 한다"라며 "우진이엔지는 국내 대기업 납품을 넘어 해외 대기업과도 R&D 교류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 수천만불 기업설립 일대기 "창업 후 6년간 '죽었다' 생각했다"

서 회장은 지난 1984년 13년 동안 재직했던 OB그룹 퇴직을 결심한다. 그동안 기업에서 익혀온 기술로 경기도 성남에 자동차 부속 가게를 차리려고 했지만, 마땅한 공간을 구하지 못해 창업의 꿈은 잠시 접어둔다.

서정범 회장이 수천만불 기업설립 일대기를 설명하고 있다.<사진=대덕넷>
서정범 회장이 수천만불 기업설립 일대기를 설명하고 있다.<사진=대덕넷>
이후 창업 공간을 물색하던 그의 눈에 '철판 자르는 기계' 하나가 들어온다. 영등포구 문래동 남의 집 앞마당에 장소를 빌려 '범우기업'을 창설해 자동차·중장비 등의 부품을 생산한다.

당시 서 회장은 "6년 간 죽었다는 생각으로 일하자"는 신념 하나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이었죠. 오전에는 사무·영업·경리 업무를 보고 직원들이 퇴근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하루 매출액 100만원을 달성하지 못하면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젊을 때니까 가능했죠.(웃음)"
 
창업 후 6년이 지나고 서 회장에게 간경화 질병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그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그는 "당시 병원에서 간경화가 걸린 사람들을 1인실로 보낼 정도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라며 "일주일에 의사를 세 번 이상 만나며 치료하고 운 좋게 한 달 뒤 퇴원할 수 있었다"고 소회했다.

이윽고 1989년 범우기업을 우진이엔지로 명칭을 개칭해 본격적으로 굴착기, 지게차, 로더 등 다양한 중장비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7평 남짓 헛간에서 인천에 수백평 부지의 공장을 설립하며 제2의 꿈을 펼쳤다.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인천 남동공단에 우진이엔지 공장이 처음으로 준공됐다.

"공장을 건설할 때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시멘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죠. 시멘트 레미콘 차가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인부들과 밤새 전등 하나 켜놓고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그 인부들과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죠."

이후 우진이엔지는 IMF 때 최대 거래처였던 대우중공업이 무너지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모든 임직원이 똘똘 뭉쳐 난관을 헤쳐 나가기로 결의한다.

서 회장은 지난 세월 동안 인천 남동공단과 시화공단을 거쳐 서산에 부지를 매입해 공장을 설립했고 지난 2008년에는 천만불의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진이엔지에서 생산되는 중장비 기계들이 전 세계 건축현장 곳곳에서 그 명성을 휘날리고 있다.

◆ 직원 평균 근속연수 30년···임직원들 "품질로 '성의' 보답"

인천 남동공단 우진이엔지 공장 임직원 평균 근속연수는 30년이 족히 넘는다. 정년퇴직 이후에도 원할 때까지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대부분 우진이엔지를 퇴직하는 직원들의 나이는 75세 이상이다.

임직원들의 눈높이에서 덕을 베풀겠다는 서 회장의 경영 철학은 기업 성과로 이어졌다. 그는 "두산중공업 혁력사 중 불량이 한건도 없는 기업명단에 우진이엔지가 올랐다"라며 "직원들에게 덕을 베풀면 그들은 제품 품질로 성의를 보답한다"고 말했다.

서 회장은 기업 설립 이래로 '사장실' 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과 한 공간에서 같은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며 "내 눈높이를 낮추고 그들에게 덕을 베풀면 결국 기업의 성과로 돌아온다"고 단언했다.

또 서 회장은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에서 중장비 제조기업의 위기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중장비를 한달에 100대 생산할 때 독일은 하루에 80대를 생산하고 있다"라며 "국내에 중장비 수요가 적으므로 스마트팩토리 공정 도입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유통업은 100원에 매입해 110원에 판매하지만 제조업은 100원에 매입해 90원에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국제적 제조업 흐름은 중국이 맹속도로 쫓아오고 일본은 도망가고 있다. 세계 흐름을 파악해 경쟁력을 유지할 방법을 기업들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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