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가 51년 불문율 깼다···과학계 자율 청신호?

연임 가능성 낮았으나 '실적' 좋아 막판 대역전···2020년까지 6년 경영
과학계 성과 내고 정부가 인정 '선순환'···"과학계 자율·변화 계기 삼아야"
이병권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이 연임에 성공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장은 평가 성적이 좋아도 연임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을 이 원장이 깼다. 출연연 기관장 연임 기준이 바뀐 이래 첫 사례다. 공식적으로 성적이 좋아 연임이 된 것은 출연연 51년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사실 출연연 기관장 연임 자체는 그리 큰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뛰어난 과학계 내부 전문가도 많거니와 관료 출신들이 줄줄이 대기 상태다. 더구나 지금은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이다. 

KIST와 같은 알짜 과학계 대표 기관에 기관장이 되려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정부로서도 과학계 대표 기관이니 만큼 챙겨야 할 인사가 많았을 게 뻔하다. 이런 여러 가지 난관을 뚫고 연임을 했으니 과학계는 물론 정부 안팎에서까지 화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원장의 연임은 어려워 보였다. 이 원장 자신도 연임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했다. 이 원장은 연임에 대해 큰 미련이 없었다. 내부 직원이나 지인들에게도 "그저 누가 기관장이 되든 KIST가 잘되려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분위기가 반전됐다. 출연연 역사상 전무후무한 '매우 우수' 평가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전문평가위원회를 가동해 실시한 종합 기관평가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고 난 뒤 기관장 연임에 무게가 쏠리기 시작했다. 

최고 평가라는 감격과 기쁨도 잠시. 연임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2월 말 미래창조과학부가 매우 우수를 받은 KIST 결과에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며 '재평가 검토'를 요청해 왔다. 실제 재검토가 추진됐고, 평가가 하향조정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연임 희망도 그림의 떡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재검토 소식이 전해지면서 과학계 여론이 들썩였다. '평가위원회가 가동돼봤자 결국 정부가 연구소 평가를 정한다'라는 비판과 '성과를 내고도 연임하지 못한다면 누가 열심히 하겠는가'라는 여론의 강한 비판이 쏟아졌다.(관련내용은 대덕넷 단상 기사로도 보도된 바 있다. 기사링크)
 
결론적으로 KIST 평가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평가위원회의 검토결과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정부는 우수 평가에 따라 기관장이 연임되는 새로운 사례를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결국 종합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은 이 원장은 연임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받았고, 지난 3월 3일 열린 이사회에 차기 원장 후보로 단독 추천되는 기회를 얻었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13명 이사 중 12명이 참석, 3분의 2 이상 찬성표를 얻어 최종 연임이 결정됐다. 

◆ 연구소 운영? 미래영역도전 위해 '기관 전면 오픈'
 
이 원장은 후덕한 얼굴에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기본기를 강조하는 리더십은 주변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간부회의만 하면 '기본' '변화' '새로움' 같은 용어를 반복하면서 분발을 촉구하는 스타일이다. 

이 원장은 앞으로 타 기관과의 소통, 협업 등을 통해 미래영역에 도전하는데 연구소 운영의 방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최근 열린 KIST 51주년 기념식에서 "반세기 KIST가 과학기술계를 선도해 이끌었다면 이제는 한 가운데에서 다른 주체와 소통, 화합하며 함께 나가야 한다"며 "KIST 개별연구소 뿐 아니라 국가 과학기술 밑거름 역할을 하는데 힘쓰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출연연이 혁신의 주체에서 혁신의 대상이 되는 등 과학계를 둘러싼 외부시각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 원장은 잘 알고 있다. 국민세금으로 기관을 운영하며 연구개발하는 만큼 KIST 내부연구와 위상강화에 집착하지 않고 분야의 최고 연구자에게 오픈하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미래영역에 도전하며 국민공감을 이끌어내는 연구개발에 힘쓰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KIST는 미래영역 도전을 위해 대학 간 협력사업 본격화를 위해 2016년 KIST-대학 조인트 리서치 랩을 서울대, KAIST, POSTECH 등에 설치했다.
 
특히 이 원장은 임기 시작 2014년부터 개방형 융합연구사업(ORP)를 대폭 확대해 운영 중이다. ORP 사업은 국내외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로 드림팀을 구성하는 사업이다. 치매조기진단, AI 모니터링·현장진단, 녹조제거 기술개발, 양자컴퓨팅, 나노신경망모사 등 외부기관과 함께 연구개발 중이다. '매우 우수'평가를 받는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뇌질환 진단치료기술개발 기술(기술이전 총3300억원 규모)도 ORP 사업을 통해 개발된 연구성과 중 하나다.
 
이 원장은 "지난 몇 년간 KIST 고유 연구영역의 재정립, 개방형 융합연구 확대, 국제사회 적극적 기여 및 협력 활성화, 중소ˑ중견기업 지원강화, V-KIST 설립, 홍릉단지 재창조 등을 위해 노력해 왔다"며 "금년에도 이러한 노력을 더욱 가속화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성과 내면 인정받는다" 새로운 동기부여···"과학계 자율 변화의 계기 삼아야"

이번 KIST의 이병권 원장 연임 사례를 놓고 연구현장에서는 과학기술계의 자율과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성과가 우수하다'는 전문평가위원회의 객관적인 사실을 정부가 인정했고, 열심히 성과를 내게 되면 과학계 연구기관의 기관장들도 인정받고 연임할 수 있다는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진 사실에 고무적인 분위기다. 

KIST 원장 연임에 대해 대덕연구단지를 비롯한 다른 출연연들도 우리도 뭔가 해보고 인정받자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과학기술계 한 인사는 "과학기술계의 객관적 사실에 대해 정부와 사회가 인정한 의미가 크다"라며 "KIST 연임 사례는 출연연 경영에 분명히 새로운 긍정적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기관장 출신의 과학계 한 원로는 "과학기술계의 자율 경영은 정부나 사회나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과학계가 이번 계기로 좋은 성과를 내고 인정받는 합리적 프로세스를 만들어 나가는데 구성원들이 직접 행동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 체제의 경영이 3년이 지나 또 다른 미래 3년이 연속되는 시점에서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출연연의 새로운 연구개발 시대가 실현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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