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연? 구조적 모순···과제기획부터 제대로"

[과학·산업계 리더에게 듣다③]유진녕 LG화학 CTO
지난 2005년 부임 이래 R&D 이끌어···"성공 경험 타분야 확산시킬 것"
2017년 미래를 향한 새로운 항해가 시작된다. 한국 과학기술 50년 역사를 보내고 미래 100년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대덕넷>은 과학산업계 오피니언 리더를 만나 새로운 동력과 지혜를 얻는 '2017 과학산업계 리더에게 듣는다'  신년 특별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요동치는 국가적 격랑 속에서 4차 산업혁명이 촉발하는 기술발전 의미의 통찰과 함께 앞으로 대한민국 과학산업계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 길에 대해 들어 본다.<편집자의 편지>

시작은 미약했다. 지난 1980년대초 당시 전체 연구소 인력은 50여명 남짓. 30여년이 흐른 뒤 이곳은 이 인력의 100배가 증가한 5000여명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가 됐다. 선진국의 제품을 모방해서 만드는 패스트팔로워(Fast Follower)에서 이제는 퍼스트무버(First Mover)로서 리튬이온전지 분야 업계 선두에 섰다. 한국이 선진국 대비 가장 취약한 것이 개념설계라는 지적도 여기서는 옛 말이다. 연구소의 R&D 역량을 기반으로 기초소재, 정보전자소재, 재료, 전지, 바이오 관련 제품 혁신을 이끌고 있는 LG화학 얘기다.

R&D를 통해 이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는 유진녕 사장은 지난 1981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이래 36년 넘게 연구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는 신소재연구소장, CRD(Corporate R&D) 연구소장 등을 거쳐 지난 2005년부터 기술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최근 LG화학이 R&D 성과창출과 연구역량 제고를 위해 신설한 CTO(최고기술책임자) 조직을 맡아 서울과 대전을 오가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 "연구자, 기업 역량 파악↓···연구자, 공무원 등 모여 허심탄회하게 대화해야"

"정부출연기관에 자율성, 지속성, 도전성을 줘야하는데 지금 규제와 시스템으로는 높은 목표에 도전하지 못하고, 오래 못하고, 마음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과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유진녕 사장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선임직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국가과학기술심의회 위원 등을 수행하면서 국가 R&D에도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다. 유 사장은 국가 산업기술 발전 측면에서 정부 출연연을 비롯한 한국 과학계 발전을 위한 견해를 피력했다.

LG화학의 R&D를 이끌고 있는 유진녕 사장.<사진=대덕넷>LG화학의 R&D를 이끌고 있는 유진녕 사장.<사진=대덕넷>
예전 패스트 팔로워 시절 연구소가 없어 KIST 등 정부출연연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현재는 삼성, LG 등을 중심으로 민간 연구소의 기술 역량이 발전하면서 일부는 상황이 역전됐다.

그런 가운데 출연연 연구원은 기업 보안 등을 이유로 현재 기업의 역량이나 기술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산업기술 개발에 실패하고, 실패를 방지하기 위해 목표를 낮게 제시하다보니 기업에서 관심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유 사장은 "산업기술 측면에서 보면 100%에 가까운 과제 성공률에서 나온 기술 중 산업계에서 활용되고 있는 기술은 손꼽을 정도인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목표가 낮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과제시스템도 걸림돌이다. 과제 기획부터 평가, 활용 전체 매커니즘 자체가 성과가 나오기 힘든 구조라는 평가다. 

연구원 입장에서는 과제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패널티를 받게 되다 보니 성공할 수 있는 것만을 목표로 제시하게 되며, 기업 입장에서는 목표가 낮아 과제에 성공해도 사업화에 관심이 없게 된다.

유 사장은 원내 사례를 예로 들며 이같은 현상을 부연설명했다. LG화학 등 기업에 도움을 주는 교수를 살펴보면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가는 교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행따라 교육, 연구 등이 바뀌는 것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연구고집과 철학을 가진 교수 등이 나올 수 있는 연구환경 마련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유 사장은 "성공적인 협력연구를 만들어 내는 교수는 고분자합성, 유기합성 등 분야에서 소액의 연구비로 자신의 연구 분야만 20여년 넘게 연구하고 있는 그런 교수"라면서 "이들의 축적된 연구를 살펴보면 기업 입장에서도 획기적이다. 이러한 사례가 더 많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기회가 감소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유 사장은 이러한 상황의 해법으로 기업 중심 과제 기획을 꼽았다. 앞으로 5~10년 후 필요한 기술에 대해 기업 중심으로 과제 기획에 참여시켜 문제를 도출하고 출연연 연구원, 교수 등이 참여해 이를 해결하고 과제 참여 기업이 해당 기술을 사용토록 하면 서로에게 상승효과(Win-Win Effect)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그는 "과학계와 정부 관계자 등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해법을 모색하고, 과학계에서도 공무원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22년째 지속적으로 R&D 투자···"전기車 시대 미래 먹거리 창출"

유 사장은 R&D의 중요성을 씨름의 기술 중 하나인 들배지기에 비유해 설명했다. 씨름의 70여종 기술 중에서 들배지기는 70% 이상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술이기 때문에 선수들이 오랫동안 연마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조업의 미래는 현장에서의 생산기술과 R&D에 달렸다는 것. 기획, 재무, 영업 등의 요소가 아무리 좋아도 기술 역량이 없다면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를 갖기 어렵고 결국 도태하게 된다.

유진녕 LG화학 CTO <사진=대덕넷>유진녕 LG화학 CTO <사진=대덕넷>
핸드폰은 2년, 소재는 7~10년, 바이오 신약은 15년 이상의 시간이 R&D부터 시작해 제품으로 나오기까지 소요된다. 이러한 속성을 감안하지 않고 특정 시간을 보고 평가해 투입대비 결과가 없다고 회의감을 가지면 안된다고 유 원장은 강조한다. 

LG화학에서 연구생산성 지표 중 하나로 활용하고 있는 '신제품 매출 비중'은 정보전자, 배터리, 석유화학 등 각 분야별 특징을 감안해 소요기간을 측정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다. 이 평가에 따르면 현재 LG 화학의 신제품 매출 비중은 약 30~35% 수준으로 집계된다.

유 사장은 "전지는 100%, 정보전자 100%, 석유화학도 90% R&D를 거쳐 개발된 것으로 사실상 100%로 봐야 한다"면서 "R&D를 안한다는 것은 경쟁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고 정의했다.

현재 LG화학에서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전지 분야다. 외부 공인평가 기관의 업계 기술역량 종합평가 결과에 의하면 LG화학은 삼성 SDI, 파나소닉 등 경쟁 업체 보다 우위에 있다. 특히 자동차 전지 분야에서는 세계 1위 기술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LG화학 관계자에 따르면 자동차 배터리 관련 매출액은 재작년 7000억원에 이어 지난해 1조2000억원을 달성했다. 오는 2020년까지 7조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지난해 9월까지의 누적수주 계약액만 36조원이다. 추가 계약과 수주에 따라 이 금액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LG화학에서 배터리 연구개발에 착수한 것은 지난 1995년 이래 올해가 22년째다. 1999년 소형전지 양산화에 성공했지만 한때는 연간 2000억원 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R&D 책임자 뿐만 아니라 최고 경영층(Top Management)의 의지와 실행력이 컸다. 구본무 회장은 이차전지가 미래 먹거리라며 개발초기부터 지속적으로 R&D를 지원했다. 그는 매년 R&D 성과보고회를 직접 찾을 정도로 이를 중시했다.

또한, 자동차용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2000년 일본 업체에서도 가격, 안전성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할 것이라며 포기하던 상황이었다. GM 등에서 시도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정도로 구현이 어려웠다. ​전문 경영인들이 화학과 맞지 않는 사업이라며 정리하려 하던 상황을 딛고 직전 CTO인 故 여종기 원장은 자동차 전지로의 응용을 주도했다.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의존할 것은 사람의 경쟁력 뿐. '강토소국 기술대국' 글귀가 복도 중간 조형물에 적혀 있다.<사진=대덕넷>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의존할 것은 사람의 경쟁력 뿐. '강토소국 기술대국' 글귀가 복도 중간 조형물에 적혀 있다.<사진=대덕넷>

현재 전기차 배터리는 개발 관점에서 상당히 진전된 상태다. 지난 2011년 출시된 1세대 배터리는 1번 충전 시 100마일 수준이었지만 내년 말 경 이를 3배 수준으로 향상시킬 전망이다. 전기자동차가 당초 예상보다 5년 가량 상용화가 지연되고 있어 사업적으로 완전한 성과를 창출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20여년간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미래 먹거리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유 사장은 "우리 기술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가니 세계적인 기업에서 협력을 제안하고 있다"면서 "세계적인 업체들이 우리 연구원을 노리고 있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연구원에서 업계 선두 수성에 신경쓰고 있는 가운데 연구몰입환경조성을 위해 조직문화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힘들어도 보람을 느끼면 만족하는 반면 아무리 시간 여유가 있어도 보람이 없으면 불만만 쌓일 수 있기 때문에 치열한 삶 속에서 일에 보람을 느끼고 서로를 배려하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신입직원이라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퍼스트무버로서 조직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리더가 시키는 대로 하고, 효율만 따지다 보면 이는 불가능합니다. 많은 구성원들의 집단지성을 활용해야 합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LG화학 인력은 4200명 규모로 집계된다. 올해 1일자로 LG생명과학이 흡수합병되고 신규 채용까지 예정되어 있어 올 연말까지 직원은 5300여명에 이를 전망이다. 이중 박사학위자는 1000명이 넘는다. 

그는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가 30명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재들은 내부 기준에 따라 연구위원·임원, 부장 등의 위치에서 연구업무에 매진하고 있고, 역할에 따라 보상도 파격적으로 받으면서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배터리 관련 각종 시설.<사진=대덕넷>배터리 관련 각종 시설.<사진=대덕넷>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티타임을 갖고 소통하고 있는 모습.<사진=대덕넷>직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티타임을 갖고 소통하고 있는 모습.<사진=대덕넷>

◆ "R&D 중심은 대덕···성공 경험 타분야로 확산"

LG화학 연구원은 원내 차원에서 주변 지역에 먼저 다가가는 활동을 다수 수행하고 있다. KIST, ETRI, 화학연 등 출연연과 기술교류회를 재작년부터 수행하면서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스타트업 연합회와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우수 스타트업과의 연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점에서는 과학페스티벌 참가, 주니어공학교실, 지역 학교, 소외계층 후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 연구원들이 학교에 찾아가는 주니어 공학 교실은 20년 넘게 지속됐다. 지역 고등학교 도서관 개축공사 후원, 초록우산재단과 트윈엔젤기금 조성 등 기부활동도 수행하고 있다.

LG화학은 오는 2030년까지 대덕, 마곡, 과천 세 곳을 R&D 기지로 적극 육성할 예정이며, 이 중 절반 정도의 인원을 대덕에, 나머지 인원은 마곡과 과천에 각각 배치된다.

"일부 사람들은 LG화학 전체가 마곡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마곡에서는 LG 그룹의 시너지를 창출하는 연구를 주로 수행할 예정입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올해 연말까지 원내 일부 직원 500여명이 마곡으로 이동합니다. LG화학 R&D의 중심은 여전히 대덕입니다." 

마지막으로 유 사장은 중국 업체 등의 추격을 따돌리고, 세계 1위의 성공 경험을 타분야로 확산시키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리튬이온전지의 한계치가 수년 후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용량과 가격면에서 월등히 높은 새로운 배터리에 대해 도전해야 할 시점입니다. 지난 20여년간 다사다난한 경험을 통해 축적한 성공체험과 정신을 타분야에 확산시켜 선순환 체계를 구축해 보고 싶습니다."​

실험실 내부에는 각종 장치가 구비되어 있다.<사진=대덕넷>실험실 내부에는 각종 장치가 구비되어 있다.<사진=대덕넷>

건물 동 사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사진=대덕넷>건물 동 사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사진=대덕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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