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주년 맞아···신진연구자 육성, 국제 이론물리학자 허브 기능 수행
아태물리학연합회 본부 유치 성공 쾌거

사례 #1. B 연구원은 매년 연구보고서 등은 제출하지만 실질적인 평가는 없어 자유로운 편이다. 5년 과제가 진행되면서 3년과 2년으로 나뉘어 간소화된 보고서만 제출하면 된다. 각종 행정 부담이 최소화되어 있어 장기 연구과제 연구에 주력할 수 있다.

사례 #2. A 연구원은 이론물리학분야 학술교류 활동을 위해 행사 계획안을 사무국에 제출했다. 사무국 직원들이 포스터 제작부터 홍보까지 맞춤형 지원을 하기에 연구자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마치 여행사를 통해 편하게 서비스를 받은 것처럼 연구자가 원하는 학술활동을 수행한다.

과학 선진국의 연구소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연구소의 사례다. 경북 포항에 가면 포스닥(Post doc), 조교수급 젊은 연구자들의 천국으로 꼽히는 한 연구소가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 이사장 남궁원 ; 이하 아태이론물리센터)다.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이론 물리학분야 국제기관으로 아태지역의 기초과학 발전을 선도하기 위해 지난 1996년 서울에 설립된 이후 2001년 포항공대로 이전해 운영되고 있다.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문화 정신을 한국에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구소다. 

이 연구센터는 새로운 과학 연구분야이거나 산업과 연계가 어려운 기초 물리학 분야 연구자 중심으로 연구자 친화적 환경에서 장기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막스플랑크 연구문화의 원칙 중 하나는 연구지원체계와 조직은 연구자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 그래서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행정직원들은 연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늘상 중무장돼 있다.

연구센터에 상주하는 연구원은 약 40명이며, 이중 행정 직원들은 16명 정도가 연구자를 지원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개인 숙박 등 생활 문제부터 연구그룹 운영문제까지 다양한 형태의 행정 지원 요청을 하면 행정 직원들은 적극 의견을 수렴해 문제가 해결되도록 돕는다. 

센터 내 연구자들을 위한 공간.<사진=강민구 기자>
센터 내 연구자들을 위한 공간.<사진=강민구 기자>

"연구몰입 우리가 이끈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국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연구몰입 우리가 이끈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국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 '막스플랑크를 한국에' 피터 풀데의 소신 뿌리내려···젊은 과학자에 전폭적 지원

아태이론물리센터 로비에 들어서면 연구자들을 위한 휴게 공간이 눈길을 끈다. 훤히 트인 공간에는 피아노도 있고,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연구원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한켠에는 Nature 등 과학 학술지도 빼곡히 구비돼 있다. 로비에서 연구실들이 바로 이웃해 있다. 각 개별 연구실마다 부착된 'Research Fellow' 이름표가 적혀 있고 외국인 연구자들이 컴퓨터를 보면서 연구에 몰입하고 있다. 연구실 공간 사이에 마련된 칠판에는 복잡한 물리학 수식이 가득 적혀 있다.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상주 연구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연구자들이 기초과학분야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하고 있다. 연구프로그램의 시작과 구축에는 막스플랑크 복잡계 물리연구소(MPI-PKS) 소장을 역임하고 아태이론물리센터의 3·4대 소장으로 재임했던 피터 풀데(Peter Fulde) 전임 소장의 역할이 컸다.

연구프로그램에 그의 연구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막스플랑크의 핵심 연구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해서 신진연구자 육성프로그램(Young Scientist Training Program)이 런칭됐다.

지난 2008년부터 매년 2개 그룹씩 선정해 현재 8개 연구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고체물리, 고에너지, 우주론, 통계 물리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골고루 분포돼 있다.

선정된 연구그룹은 인력구성, 주제선정 등에 있어 절대적으로 독립 권한을 갖는다. 그룹을 구성하면 연구비 한도 내에서는 어떠한 인력 구성도 가능하다. 1개 그룹당 지원되는 3억 원 규모의 예산을 행정 등에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고 5년간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연구주제 선택이나 출장 등에도 제한이 없다.

연구자를 위한 환경을 지속적으로 운영한 결과 20년이 지난 현재, 하나 둘씩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고 있다. 대학, 연구소 등 타 연구기관에 비해 우수한 논문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아태이론물리센터의 분석이다. 

김병기 아태이론물리센터 부장은 "센터 상주 연구자들의 평균 나이가 30~35세 정도의 젊은 과학자들이 주축을 이룬다"면서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이 때 연구방향을 설정했는데 언젠가 이곳 출신의 연구자가 훌륭한 연구자로 평가받는 날이 분명 올것 같다"고 기대했다.

센터에서 지원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사진=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 제공>
센터에서 지원하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사진=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 제공>

센터를 구성하고 있는 행정직원들과 연구원들의 조직도.<사진=강민구 기자>
센터를 구성하고 있는 행정직원들과 연구원들의 조직도.<사진=강민구 기자>
◆ 외국인 연구자 각별히 신경···국제교류 허브로 도약 목표

​이론물리학은 연구 특성상 일반 물리학과 다르게 거대 연구장비나 별도의 실험장치나 기기가 필요없다. 컴퓨터, 책상, 연구원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인터넷이 빨라지면서 이제는 연구자 단독으로 이론물리학을 연구하기 보다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화상 회의 등을 통한 협력 연구 수행이 중요해 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 맞춰 아태이론물리센터는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하다. 중력파 연구 커뮤니티가 대표적이다. 자체 공모사업이 외부 연구자에게도 공개된다. 

한국의 중력파 연구 기여도 사실상 아태이론물리센터의 커뮤니티 지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 연구진은 지난 2003년부터 'Topical Research Program'의 지원으로 '중력파와 일반 상대론'에 대한 여름학교를 개설해 운영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국내 연구 저변을 확대하고 국제 교류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센터 특성상 외국인 비율이 절반 이상으로 높다.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16개국 25개 기관과 협정을 맺고 있어 국제 교류가 활발하다. 개발도상국 지원도 중점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외국 연구자들이 얼마나 빨리 한국에 정착하는지 여부가 연구성과로 직결되기 때문에 세심한 부분까지 사무국 직원들이 전방위 지원에 나서고 있다. 외국인들을 위해 비자문제부터 구매물품까지 꼼꼼히 챙긴다. 주거할 집은 사전에 임대해 놓아 숙박의 빈 공백이 없도록 하고 있다. 연구자가 혹 출산 문제로 인해 비상연락을 하면 행정직 담당이 뛰어가도록 돼 있다.

젊은 과학자 연수프로그램인 'Young Scientist Training Program'에 참가한 옷후 도르지 인천대 물리학과 교수는 대표적인 외국인 연구자 성공사례로 꼽힌다.

몽골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6개월 가량 센터에 상주하며 연수를 받았다. 이후 그는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의 권유로 울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최근 인천대 물리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모국으로 돌아간 해외 연구자들은 대부분 중국과학원, 중국 절강대, 독일 에어랑엔-뉘른베르크 등 자국의 교수로 임용됐다. 센터 측과는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타키모토 테츠야(Takimoto Testuya)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 아만 샤필루(Arman Shafieloo)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등 아태이론물리센터를 거쳐간 유수의 연구자들은 항상 센터를 방문하면 이곳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오곤 한다. 

특히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최근 '아시아태평양 물리학연합회(AAPPS) 본부 유치'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물리학연합회와 장기간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제는 사무국으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추가적으로 담당하게 됐다. 미국물리학회(APS), 유럽물리학회(EPS)와 함께 세계 3대 물리학회 연합학술단체로서의 역할도 요구된다.

정우성 아태이론물리센터 사무총장은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상대적으로 기회가 부족한 기초물리학 관련 신진 연구자와 개발도상국 연구자를 지원하면서 연구 저변을 확대해 왔다"면서 "앞으로 이론물리학 연구의 국제 허브 기관으로서 아태 지역 역량 결집의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론물리학자의 연구실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이론물리학자의 연구실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칠판에 적혀 있는 물리학 수식.<사진=강민구 기자>
칠판에 적혀 있는 물리학 수식.<사진=강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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