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서평]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
저자: 고토 히데키, 역은이: 허태성, 출판: 부키
교토는 되는데 도쿄는 왜 안 되는가?
일본은 받는데 우리는 왜 못 받는가?


저자: 고토 히데키, 역은이: 허태성, 출판: 부키. <사진=yes24 제공>저자: 고토 히데키, 역은이: 허태성, 출판: 부키. <사진=yes24 제공>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예측해 온 학술 정보 서비스 기업 톰슨 로이터가 2016년 9월 2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수상 후보 21명 가운데 일본인 과학자가 생리· 의학에 1명, 화학에 2명 등 총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해까지 일본의 과학 분야 수상자는 총 21명이다. 

그중 교토 대학 출신이 6명으로 가장 많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과학계에서는 한때 교토 대학 출신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데 도쿄 대학은 왜 그러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이 화두가 되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일본은 노벨상을 받는데 우리는 왜 받지 못하는가.

일본이 노벨상을 처음 받은 것은 1949년으로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만 81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고 해도 1876년 개항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교육 체제를 정비한 지도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물론 일본은 시기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서양의 과학 지식을 흡수했다. 1860년대부터 서양 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했고, 유학에서 돌아온 야마카와 겐지로가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888년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물리학자로 알려진 최규남이 1933년 미국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에 비해 45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67년 전 최초의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은 그런 노력에 힘입어 1900년 무렵 화학자 다카미네 조기치가 아드레날린을 발견하고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1회 노벨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20세기 초반부터 서양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가 설립된 이후에는 물리학 분야에서도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고, 패전 직후인 1950년 무렵에는 세계를 선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개인적 능력 때문인가, 연구 환경 탓인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이 책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는 일본이 1854년 개국하고 나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과학 보급에 나선 이래 2012년 야마나카 신야가 16번째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기까지 일본 과학자들의 150여 년 분투 과정을 그린 책이다. 

물리학, 화학, 생리 의학, 원자력 공학 등 각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연구 업적과 뒷이야기가 메이지 유신, 러일 전쟁, 태평양 전쟁, 패전과 전후, 그리고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은이는 일본 과학자들의 삶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그린 이 책으로 제62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수상했다.

◆ 일본 과학의 발전 과정은 무엇이 달랐는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독려에 일본 엘리트층이 응답하다

"동양에 없는 것은 두 가지다. 유형으로는 수리학, 무형으로는 독립심이다."(378쪽)

개국 당시 일본에서는 화학과 의학에 비해 물리와 수학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그때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리학이 서양 학문의 왕자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물리 교육에 힘썼다. 1868년 그는 '훈리궁리도해' 즉 '도해 물리 입문'이라 할 만한 책을 출판하여 붐을 일으켰다. 

일본 최초의 과학 입문서로 당시 소학교에서 이과 교과서로 쓰였다. '서양사정'도 펴냈는데 15만 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야마카와 겐지로는 후쿠자와가 쓴 '서양 여행 안내'를 읽으며 유학을 준비했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근대화에도 관심을 보여 김옥균을 게이오 의숙에 받아들였다. 그는 세균학자인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에게 연구 장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후쿠자와는 오늘날 일본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다수 수상하는 데 최대 공헌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물리를 강조한 후쿠자와의 노력에 일본의 사족(士族) 출신들이 대거 부응했다. 일본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사족 즉 사무라이(무사)였고, 최다 계급인 농민, 상인, 승려, 신관 등이 연구자가 되는 예는 드물었다. 물리학자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아버지도 오무라 번의 학자였으며, 유카와 히데키도 와카야마 번의 한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유학생 파견을 통해 서양 학자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다

일본은 1871년 이와쿠라 견구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때 배에 동승했던 40여 명의 뛰어난 유학생들이 귀국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들 중에는 이 책에 나오는 주요 과학자와 그 가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 당시 영국인 지인에게 공학자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제안이 글래스고 대학의 윌리엄 톰슨 즉 켈빈 경에게 전해졌고, 이를 계기로 스코틀랜드의 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일본을 방문했다. 켈빈 경의 제자인 물리학자 제임스 유잉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일본에 와서 난생처음 지진을 경험한 다음 지진계를 개발하고 지진학회를 창설했다. 

그 후로도 일본은 유학생을 파견하여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왔다. 일본 최초의 물리학자 야마카와 겐지로는 제자 나가오카 한타로를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볼츠만 교수에게 보냈고, 나가오카는 제자 니시나 요시오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어니스트 러더퍼드 교수에게 보냈다. 니시나는 러더퍼드 교수에게 2년간 공부한 후 그의 소개로 덴마크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실에 머무르면서 하이젠베르크나 디랙 등 수많은 천재들과 인연을 맺었다. 

훗날 니시나는 이화학연구소의 핵물리학자들을 미국의 석학에게 보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미일 관계가 최악이었다. 하지만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런스는 국제 정치와 학술 연구는 별개라면서 일본 학자들에게 사이클로트론 제작에 대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로런스는 컬럼비아 대학도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거기에서 일본 학자들은 그 대학의 사이클로트론을 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귀국해서 설계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때 도움을 주었던 컬럼비아 대학 교수 이시도어 라비는 니시나의 보어 연구실 동료였다. 

-과학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기초 연구의 산실을 일궈 내다

"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 쪽을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44쪽)

응용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는 이화학연구소(리켄, RIKEN)의 설립을 주도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드레날린을 추출한 것으로 유명한 다카미네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사립 연구소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서양에는 민간 연구소로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현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미국의 록펠러 연구소가 있었다. 

1917년 출범한 이화학연구소는 이후 100여 년 동안 일본의 기초 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패전 후 과학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기 전에는 연구원 1000여 명에 관련 기업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크게 활약했고, 그의 제자로 둘 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유카와 히데키도 이 연구소와 관계를 맺었다. 200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노요리 료지도 이 연구소 출신이다. 

-수직적인 상하 관계를 없애고 한몸으로 연구하다 

니시나 요시오는 1920년대 이화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그가 공부했던 보어 연구실은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보어의 독창성과 인품에 매료되어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연구실에는 독일의 발터 고르돈과 카를 하이젠베르크, 스웨덴의 오스카르 클레인, 영국의 폴 디랙 등이 있었는데, 훗날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도 니시나의 연구 동료였다. 

보어 연구실은 팀플레이로 연구를 했는데 외부의 반대파가 나오면 팀 전원이 일치단결해서 싸웠다. 연구실에서는 국적이 없었고 모두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었다. 니시나는 그런 코펜하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일본으로 가져왔다. 상하의 구별 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코펜하겐 정신'을 이화학연구소에 불어넣은 것이다. 

1950년 이후 여러 대학에서 소립자론 그룹이 만들어졌을 때 이러한 '코펜하겐 정신'은 봉건적인 학계 풍토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유카와 히데키의 첫 번째 제자인 사카타 쇼이치가 부임한 나고야 대학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그때까지 전근대적인 계급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던 강좌제를 연구실 제도로 바꾸어 그 연구실 회의에서 모든 사항을 결정하도록 했다."(263쪽) 

도쿄 지역 대학들의 연구실도 나고야 대학과 마찬가지로 선생과 학생 사이에 상하가 없었다. "학생이 선생을 '○○ 교수'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었고 '○○ 선생님'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보통은 '○○ 씨'라 불렀다. 학생의 그러한 말투가 교수 부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적 세계에서 자유롭게 일하는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상하 질서에 의한 강압적인 태도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264쪽) 

-끈끈한 사제 관계로 괴로움을 이겨 내다 

유카와 히데키는 1934년 중간자 이론이라고 알려진 첫 논문을 발표하고 2년이 지난 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유카와의 대학 동급생이자 평생의 라이벌인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독일 유학 시절 동료 연구자들이 유카와를 칭찬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자기 친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처지를 생각하면 초조해질 뿐이었다. 몸도 비쩍 말라서 가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절망스런 마음을 담아 스승 니시나 요시오에게 편지를 썼고 이런 답장을 받았다. 

"연구의 성과가 오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운이라고 생각하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 삶이지. 나중에 현격한 차가 생기더라도 그런 일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네.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운도 찾아와 좋은 일도 생기겠지. 나는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 생활하고 있다네. 부디 여유를 찾고 건강에 유의하면서 운이 찾아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네."(248쪽)

-각자가 잘하는 일에 집중해 노벨상을 수상하다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제자 고시바 마사토시는 1951년 도쿄 대학을 졸업했을 때 성적이 부진했다. 특히 수학이 약해서 강의에 나오는 방정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급생에게 물어보면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풀어내는 문제를 수주일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실험에서 탁월했다. 동료들은 실험 장치를 망가뜨려 교수에게 꾸중을 들을까 봐 무서워했지만 고시바는 그들이 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고 나서 장치를 척척 움직여 데이터를 만들어 냈다.

대학원에 들어간 고시바에게 어느 날 선배가 우주선(宇宙線) 실험을 해 보라고 권했다. 마침 이론이 최전성기를 맞이한 일본의 물리학계에서 실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이었다. 그는 우주선 연구에서 세계 최고인 뉴욕 로체스터 대학에서 유학한 다음 귀국하여 폐광이었던 가미오카 광산의 지하 1000미터로 아래로 들어갔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서 가미오칸데라는 실험 장치를 만들어 중성미자를 검출했고, 이를 통해 200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2012년 줄기 세포 연구로 노벨 의학 생리학상을 수상한 야마나카 신야도 수련의 시절 수술실에서 선배들의 방해가 될 정도로 서툴렀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 임상을 버리고 연구자의 길을 택해 성공을 거두었다. 

◆ 일본 과학자들은 어떻게 고난을 극복했는가?

-일본 과학자의 서양 콤플렉스 극복기 

"나가오카 한타로는 도쿄 대학에 입학 후 의문이 들었다. 전혀 다른 종인 것처럼 보이는 모당인(서양인)의 머릿속이 자신과 똑같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들은 일본 고대의 시가집인 '만엽집'의 시대부터 일본인의 마음을 노래해 왔는데 그리스 시대부터 수천 년에 걸쳐 구축해 온 물리학을 연구할 만한 능력이 있을까."(77쪽)

나카오카 한타로는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서양 학문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열등감은 그의 제자인 니시나 요시오도 가지고 있었는데, 니시나는 스승 보어와의 만남을 통해 이를 해소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일본의 과학이 서양의 수준에 도달하는 건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도 과학에서 일류가 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어는 니시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인종의 차이라든가 유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전통뿐이다."(97쪽) 

-시기, 질투를 이겨내고 각기병 치료제를 만들다 

"스즈키의 약은 엉터립니다. 하찮은 것도 믿으면 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그런 걸로 낫는다면 소변을 마셔도 낫습니다."(57쪽) 

1910년 농학자 스즈키 우메타로가 일본의 국민병인 각기병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를 시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도쿄 대학 의학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사도 아닌 농학부 출신인 스즈키가 병을 고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즈키는 쌀겨에서 각기병에 효과를 내는 성분인 오리자닌을 추출해 냈다. 요즘의 비타민 B1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1929년 영국의 생화학자 홉킨스와 네덜란드의 병리학자 에이크만이 비타민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스즈키는 왜 받지 못했을까. 연구 성과를 대부분 일본어로 발표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도쿄 대학 의학부가 스즈키의 라이벌인 홉킨스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농민의 학부에 노벨상을 빼앗기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학문적 자세를 끝까지 지킨 세균학자 기타사토 

"과학자인 이상 인정 때문에 학문적 태도를 바꿔서는 안 되네."(31쪽)
고민하고 있던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에게 독일의 뢰플러 교수가 충고했다. 기타사토는 1885년 유학을 떠나 베를린 대학 로베르트 코흐 연구실에 있었는데, 마침 도쿄 대학 위생학 강좌 교수인 오가타 마사노리가 환자의 혈액에서 각기균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기타사토는 이에 대한 반론을 국제 잡지에 발표했는데 문제는 오가타가 동급생이자 유학을 주선한 은인이라는 것이다. 기타사토는 뢰플러 교수의 말에 따라 오가타와 논쟁을 계속 벌였다. 

1892년 기타사토는 귀국했지만 연구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다. 오가타가 있는 모교 도쿄 대학과의 관계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도교 대학 측은 도리를 모른다며 기타사토를 비판했는데 그는 학문과 개인적인 문제는 착각하면 안 된다고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위생 국장 나가요 센사이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으로 전염병연구소를 열게 되었고, 이 연구소에서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협력하고, 저항하고, 무죄로 풀려나고… 

1945년 9월 도쿄 대학교 전염병 연구소. 오카모토 히라쿠 조교수가 "어리석은 남편 비겁한 아버지를 가엾이 여기고 마지막까지 살아 남거라."(121쪽)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콜레라균 권위자였는데 세균을 인공적으로 증식시킨 다음 독성이 있는지 중국인에게 먹이는 인체 실험에 협력했다. 손을 떼고 싶었지만 육군은 이등병으로 전선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베이징 대학의 의학부. 생리학을 강의하는 소화기 전문의 요코야마 쇼마쓰에게 어느 날 소집 영장이 배달되었다. 입대하자 부대장이 충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중국인 포로의 배를 쏴서 복막염이 생기지 않도록 치료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명령에 거부하자 최전선으로 발령을 냈다. 전쟁이 끝난 후 간신히 처자를 찾아 일본으로 복귀했다. 그는 생전에 아내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야."(139쪽)

교토 대학 이시카와 다치오마루 조교수는 731부대에 지원 입대했다. 이시카와는 페스트, 콜레라, 파상풍 등 20종의 세균을 실험했고 800명을 희생시킨 실험을 통해 8000장의 슬라이드 표본을 제작했다. 패전이 임박하자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즉시 소각하라!"(141쪽)라는 명령을 어기고 표본을 빼돌린 다음 그것으로 미군과 거래해서 무죄로 풀려났다. 

-노벨상의 꿈을 키우고 패전의 잿더미에서 연구에 매달리고 

"유카와 히데키는 야행성이었다. 하지만 전등을 켜면 아이들이 잠을 깨기 때문에 스미는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겨울밤에도 우는 아이를 등에 업고 교토 분지의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 서성이곤 했다."(196쪽)

유카와 히데키는 아내 스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에게서 외국에 노벨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본인은 받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스미는 결혼하자마자 남편에게 일본인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는지 물었다. 남편이 자신의 야망을 말하자 그녀가 방침을 세웠다. "나는 집안일을 전부 할 테니까 당신을 노벨상을 꼭 받아 주세요." 

패전 후 도쿄에 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집은 모두 불타 버렸다. 그는 육군이 쓰던 임시 거처에 연구실을 마련해 '재규격화 이론'을 완성했고 친구 유카와 히데키가 발행하는 영문 잡지 '이론 물리학의 진보'에 발표했는데, 이 논문이 서양에 알려지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1965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60년 전 도쿄의 겨울은 매서웠다. 게다가 도모나가 하우스는 콘크리트로 지어졌기 때문에 바닥이 차가워서 그는 어릴 때처럼 열이 났고 아이들은 설사를 했다. 일본 육군이 만들었기 때문에 생활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난방도 화장실도 없었다. 겨울에는 전원이 외투를 입은 채 세미나를 하면서 건물 밖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개최된 도모나가의 세미나에 전국에서 30여 명의 이론 물리학자가 모여들어 열기로 후끈거렸다."(253쪽)

-과학자에게도 사회적 책임이 있는가

2006년 일본 원자력안전위원회. 고베 대지진 이후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 방침을 재고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새로운 내진 방침을 만들기 위한 분과회'를 설치하고 수십 차례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사무국의 관료들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침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같은 해 8월 분과회에서 고베 대학의 이시바시 가쓰히코 교수가 지침안을 수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위원직을 사임했다. 

"사회에 책임을 다할 수 없다. 이 분과회의 본성을 잘 이해했다. 일본의 원자력 행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359쪽) 5년 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그때의 지침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보여 준다. 

일본의 핵물리학자들은 원자력 발전은 안전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원자로는 경제산업성이 아니라 문부과학성에서 기초 연구부터 총괄해야 하며 원자력 발전을 외국으로부터 신중히 들여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행정도 난맥상을 보였는데,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이 사임 후 원자력연구개발기구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규제하는 쪽과 추진하는 쪽을 오락가락했다.

<글: yes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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