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 '이공계 인력 두뇌 유출' 설문조사 발표
과기인 47% "기회 되면 해외로 취업한다"
韓 단기 실적주의 문제 등 "해외 연구 시설·환경·인프라 우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과제들은 3~5년 단기 프로젝트 위주다. 10년 혹은 백년대계는 없다.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 위주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장기 연구를 할 수 없다. 특히 기초과학 분야는 당장의 성과를 중요시하지 않고 장기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설문조사 A 응답자)

"국내에서 1~2년 단기적 연구 결과를 국제저널에(IF가 낮더라도) 발표하지 않으면 다음 연도 연구비를 삭감하거나 제한하는 평가 시스템이 당연시되고 있다. 더욱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설문조사 B 응답자)

"석·박사 이상급 고학력 인재를 3개월씩 기간제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3개월, 6개월, 10개월 혹은 1년마다 직장을 옮겨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언제나 새로운 주거지를 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계약직은 일의 양이 적지도 않은 상태에서 혜택과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며 일해야 한다."(설문조사 C 응답자)

이공계 고급 R&D 인력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들은 해외로 떠나는 이유로 한국의 백년대계 연구 비전 부족 문제를 꼽았다.

브릭(BRIC·생물학정보연구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1일까지 이공계 박사 혹은 박사졸업 예정자 1005명을 대상으로 이공계 두뇌 유출(Brain Drain)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만약 앞으로 1년 안에 취업해야 한다면 국내와 국외 중 어느 지역을 우선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절반에 가까운 47%(470명)가 해외 취업을 택했다.

만약 앞으로 1년 안에 취업해야 한다면 국내와 국외 중 어느 지역을 우선 선택하겠는가의 질문에 대한 응답 결과.<그림=브릭 제공>
만약 앞으로 1년 안에 취업해야 한다면 국내와 국외 중 어느 지역을 우선 선택하겠는가의 질문에 대한 응답 결과.<그림=브릭 제공>
국내 취업을 선택한 응답자는 31%(310명)였으며, 나머지 22%(225명)는 '어느 곳도 상관없다'고 응답했다.

해외 취업을 우선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한 응답 결과.<그림=브릭 제공>
해외 취업을 우선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한 응답 결과.<그림=브릭 제공>
해외 취업 자리를 찾겠다는 응답자 470명이 해외 취업을 우선 고려하는 이유로 '연구시설과 연구환경 등 연구 인프라가 좋기 때문에' (42%, 196명), '처우가 더 좋을 것 같아서' (30%, 142명), '국내에서 취업자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14%, 68명) 등을 꼽았다.

이공계 두뇌 유출이 심화되는 이유에 대한 응답 결과.<그림=브릭 제공>
이공계 두뇌 유출이 심화되는 이유에 대한 응답 결과.<그림=브릭 제공>
연구자들은 이공계 두뇌 유출이 심화하는 이유로(복수응답) '지나친 단기 실적주의와 연구 독립성 보장이 어려워서'(59%, 595명), '국내에 일자리가 부족해서'(41%, 413명), '선진국보다 처우가 열악하기 때문에'(33%, 329명) 등을 선택했다.

앞서 지난 5월 STEPI(과학기술정책연구원)가 발표한 '2015년 이공계 인력의 국내외 유출입 수지와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 취업으로 한국을 떠난 박사 학위의 이공계 인력 수는 2013년 기준 8931명으로 2006년(5396명)에 비해 65.5%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에서 발표한 '2015 세계 인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 유출 지수는 3.98점으로 조사 대상 61개국 중 44위 수준에 머물렀다.

◆ 지나친 단기 실적주의 만연···"10년 혹은 백년대계 세워야"

설문조사에서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주관식 질문도 이어졌다. 다수의 응답자는 국가의 지나친 단기 실적주의가 두뇌 유출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답했다.

국내 과학기술계 백년대계의 부재를 지적하는 D 응답자는 "과학기술 발전에 수많은 시간과 돈, 노력이 필요함에도 100년 앞을 내다보는 플랜은 존재하지 않다"며 "10년 이내에 결과를 낼 수 있는 성과에 집중하는 정책은 과학기술의 체계적 발전을 유도 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지속적인 연구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한 E 응답자는 "연구란 것이 오랜 시간 끈기있게 지원해주는 풍토가 필요하지만, 한국은 1~2년 만에 성과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며 "연구자 대부분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 깊이 있는 연구가 아닌 보여주기식의 연구만 진행한다"고 평가했다.

단기 성과를 기대하는 국내 연구환경에서는 독립적인 연구 진행이 어렵다는 연구자의 의견도 나왔다. F 응답자는 "연구자에 대한 처우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이다"며 "박사 혹은 포닥을 마친 30대 중후반의 핵심 인력들이 굳이 한국에 들어와서 길어봐야 20년인 정년까지 일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고 질타했다.

아울러 유행을 따라가는 성과위주식·행정중심적 연구비 시스템에 대한 지적도 다수다. G 응답자는 "현재 연구 시스템은 연구 창의성과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라며 "국가세금이 들어가니 성과를 내야 하고, 행정적인 통제가 당연하다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자유롭게 연구하고자 하는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의 유출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과학계 정책적 지원에 대한 의견도 제안됐다. H 응답자는 "선심 쓰기 식의 지원이 아닌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며 "경쟁과 질책이 아닌 지적 호기심 유발과 보상이 잘 이루어지는 연구실 분위기 형성이 시급하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이공계 두뇌를 위한 생활지원, 연구와 제반시설 확충 신식 기기의 도입을 비롯해 안정적 연구비 확대 등이 보완돼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과학계 한 원로는 "국가에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재유출이라는 단어는 무색하다"라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을 만들어 그에 맞는 처우를 해준다면 이공계 인력 유출도 막고 국가에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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