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과학자 3人, 진공기술 '오해와 진실' 다양한 논의
"단기성과 벗어나, 20년 이상 한 우물 파는 기초연구 문화 필요" 한 목소리

"사람들은 흔히 '진공=우주'라고 생각해요. 우주 정도의 진공상태가 안 되더라도, 1기압 보다 낮으면 모두 진공이라 보거든요. 냉동식품, 단열창, 병원 MRI 장비 등도 모두 진공 기술이 활용돼요. 진공은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요."(이상훈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위성연구본부 박사)
 
"진공기술이 앞으로 더 발전한다면?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진공열차 같은 첨단 기술의 현실화가 조금 앞당겨지지 않을까요?"(하태균 포항가속기연구소 기계진공자석팀 박사)

"미국 우주계획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불리는 챌린저호 폭발 사고는 진공패키지를 막아주는 고무링(O링)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사소한 진공부품 하나를 철저히 관리하지 못해 이러한 비극이 일어났죠."(윤주영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진공기술센터 박사)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원장 직무대행 박현민) 기술지원동에 진공 분야 과학자 3인(人)이 모였다.

반도체, 우주, 가속기 과학자들을 하나로 이은 연결고리는 바로 진공 기술. 이들은 '진공 기술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화두를 시작으로 포문을 열었다.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진공'에 대한 궁금증과 오해뿐 아니라 기초과학자로서의 애로사항 등에 대한 논의도 활기를 띠었다.

윤주영 표준연 박사는 국내 유일하게 진공만을 연구하는 진공기술센터장. 우리나라 핵심 주력 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개발에 필요한 진공 관련 뿌리기술에서부터 응용, 표준기술까지 통합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상훈 항우연 박사가 인공위성을 개발하는데 있어서도 진공은 빼놓을 수 없는 기술. 인공위성이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 바로 우주. 인공위성이 인공 궤도에 쏘아 올려 지기 전, 우주 공간을 모사한 진공환경에서의 시뮬레이션이 지상에서 선행돼야 한다.

하태균 포항가속기연구소 박사는 가속기 운용을 위한 초고진공기술 및 차세대 가속기 대형 진공시스템 개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상용 기술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대기압의 천 조분의 일 (10-10 Pa) 이하의 극고진공 용 소재 처리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왼쪽부터)이상훈 항우연 박사, 윤주영 표준연 박사, 하태균 포스텍 박사가 '진공'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사진=김요셉 기자>
(왼쪽부터)이상훈 항우연 박사, 윤주영 표준연 박사, 하태균 포스텍 박사가 '진공'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사진=김요셉 기자>
◆ 진공에 대한 오해와 진실①…"진공은 우주에만 있다?"
 
이상훈 : '진공'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있다. 바로 '우주 정도는 돼야 진짜 진공이다'라는 오해. 사실 1기압 보다 낮으면 다 진공 상태라 부른다.
 
윤주영 : 매일 마시는 커피에도 진공 기술이 담겨있다. 커피의 풍미와 성분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한 진공동결건조 기술이 활용된다. 또 다양한 분석장비에도 진공 기술이 필요하다.

이상훈 : 진공은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가정마다 하나씩 있는 진공단열창, 냉동식품은 물론 병원 MRI 장비에도 진공 기술이 담겨있다.

◆ 진공에 대한 오해와 진실②…"진공 상태는 위험하다?"
 
이상훈 : 진공 상태에 인간이 노출되면 '빵' 터진다는 오해도 재밌다.

윤주영 : 고압상태라면 '빵!' 하고 터지겠지만, 진공 상태에서 빵 터지진 않을 것 같다.(웃음) 진공 상태 자체는 안전하다.

하태균 : 실제로 1965년 미국 존슨 우주센터에서 우주복 테스터인 짐 르블랑(Jim Leblanc)이 저압상태에 15초간 노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실신했을 뿐, 다행히 죽진 않았다. 빵 터진다기 보다는 다른 이유로 사망하게 되는데 동물 실험 결과 60초 정도는 생존 가능하다고 한다. 
 
윤주영 : 진공 자체가 물리적으로 위험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진공 챔버 안에 여러 가스를 보내야 하는데, 그 가스통이 굉장히 고압이다. 주의가 필요하긴 하다. 또 진공연구에 필요한 히터, 플라즈마, 반응기체 등 위험한 것들이라 일반인 입장에서는 위험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이상훈 : 진공 챔버 실험 중에는 조금 위험할 수 있다. 질소 가스를 통해 진공 챔버를 대기압 상태로 만든다. 연구 도중 질소가스가 외부로 흘러나온다면 질소가스 질식 가능성이 있다. 사고 나면 정말 큰일 난다.

하태균 : 실제로 그러한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무의식 중 한 연구자가 계속 질소를 마신 경우가 있었다. 산소가 부족해서 순간 기절했다.

이상훈 : 대기 중 산소 농도가 낮고 질소가 많을 경우 사람이 조금씩 숨이 가빠진다든지 하는 증상을 느끼다가 질식하는 것이 아니고 임계치를 넘는 순간 바로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극히 위험하다. 반도체 공장에서 질소로 인한 질식사망사고가 대표적인 예다.
 
윤주영 : 박사과정 중에 전공 분야를 진공으로 옮겼다. 처음에 무서워서 진공 펌프도 못 눌렀다. 진공에 대해선 일반인 수준이었다. 펌프를 작동시키면 "왕~"하고 소리가 나는데, 워낙 요란해 겁먹었다.(웃음) 위험하다는 선입견이 있는 만큼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오작동으로 인한 화재 사고도 배제할 수 없고.

◆ 진공에 대한 오해와 진실③…"진공은 비싸다?"

윤주영 : 굉장히 '비싼 연구'긴 하다. 진공은 연구시설이 빈약한 연구소나 대학은 섣불리 할 수 없는 분야다. 국산차 한 대가 대략 3000만원 아닌가? 진공연구에 쓰이는 펌프 하나가 그 정도다. 더 비싼 것도 많지만.

하태균 : 가속기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은 5000억 원 정도. 진공 시스템을 구축하는데는 100억 원 정도 필요하다. 정말 비싸긴 하다.

윤주영 : 반도체 양산 장비 하나가 20~30억 원정도 한다. 그런 것들로 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15년 전 내가 반도체 기업에서 근무했을 때, 새로운 반도체 생산 라인을 깔기 위해 수십 억대의 장비들이 매일 몇 대씩 들어왔다. '아, 이거 망하면 큰일 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뭐, 진공청소기도 진공이니까. 10만원이면 진공을 만들 수도 있다.

세 박사들이 표준연 진공기술센터 실험실을 둘러보고 있다.<사진=김요셉 기자>
세 박사들이 표준연 진공기술센터 실험실을 둘러보고 있다.<사진=김요셉 기자>
◆ 과학자들의 엉뚱한 상상…"우주가 진공이 아니라면?"

하태균 : 지구도 인공위성과 비슷한 처지가 되지 않을까. 대기의 밀도가 높은 고도 300~400 km에 있는 인공위성은 보통 1년 내 추락하고, 700~800 km에 있는 인공위성은 40~60년 정도 걸린다.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던 지구도 입자들의 저항을 받아 속도가 느려지면 태양으로 추락하게 될 수 있다.

이상훈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자연현상이 다 뒤바뀔 수도 있다. 흔히 우주는 검은색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빛의 산란과 관계가 있다. 우주가 진공이 아니라면 빛의 산란으로 인해 다양한 색이 존재할 수도 있고, 밤(night)이나 별빛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해질 것 같다.

윤주영 :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인데, 상당히 많은 고민이 필요한 답이다. 진공이기 때문에 멀리 수만 년 전의 별빛 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주가 진공이 아니라면? 우주 자체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조물주가 왜 진공을 만들고, 왜 지구에만 공기가 있을까?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웃음)

하태균 : 물리학적 입장에서 살펴보자. 진공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순식간에 입자와 반입자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아주 시끄러운 공간이라고 해석한다.

◆ 진공 기술 연구에도 트렌드?
 
윤주영 : 진공 기술 연구에도 트렌드가 있다. 10여년 전에는 진공을 잘 만드는 기술자가 부족했다. 진공 챔버를 잘 설계하고, 좋은 펌프를 잘 만들고.. 이런 게 중요했다. 이제는 업그레이드 됐다. 불순물이 없고, 꼭 필요한 기체 요소만 있는 진공 상태를 연구한다. 수분 등 다른 복잡한 기체들은 제거하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만을 얻어낼 수 있는 진공 상태를 콘트롤하고 만드는 것. 진공 응용 기술이다.

이상훈 : 우주개발 초창기에는 열진공 챔버 등 대부분 장비들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위성의 국산화와 더불어 새로운 시험기술도 개발이 되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장비의 수요도 늘게 되었다.

윤주영 : 직접 만들고 있는 장비들이 있는가?

이상훈 : 열진공챔버의 경우도 대형화가 되면서 외산 장비의 경우는 예산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항우연 내부적으로 그동안 축적해온 장비운용 경험이 있었기에 '우리도 국산화를 해보자' 생각이었다. 외국에 비해 절반 정도의 예산으로 직경 10 m 대형열진공챔버를 국산화에 성공해서 운용 중에 있다. 물론, 우리나라 반도체나 조선산업의 발전이 대형진공시스템 구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태균 : 가속기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면서 입자들이 지나가는 통로인 진공 챔버의 단면을 줄이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진공 챔버가 좁아지면 기체 흐름의 저항이 커져서 원하는 진공을 이루기 어렵다. 내면에 특수한 코팅을 하여 진공 챔버 자체가 기체를 흡수하는 펌프처럼 작용하게 만들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

◆ 과학기술 역사 짧은 우리나라···"한 우물 팔 수 있는 연구 문화 정착돼야"
 
윤주영 : 한국진공학회 사례만 보더라도, 대부분 분과가 반도체 등 실용 기술 분야에 몰려있다. '진공' 학회임에도 말이다. 진공만을 연구하는 국가기관은 표준연 진공기술센터가 유일하다. 우리나라 진공 기술 수준은 세계적이다. 연구자 하나하나가 진공 국가대표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진공 관련 원천기술을 심도있게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하다.

이상훈 : 일단 대학에서부터 그러한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기초학문에 대한 연구보다는 SCI 실적으로만 모든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기초교육이 자리잡기가 어렵지 않은가 생각한다. 

윤주영 : 정말 미세한 진공의 차이로 수십억 혹은 수백억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진공기술을 컨트롤해야하는 원천기술이 필요하다. 챌린저호 폭발도 진공패키지를 막아주는 고무링(O링) 때문에 생긴 비극이 아닌가. 미세한 진공을 잡아주는 기술 부족으로 참사가 일어났다.
 
하태균 :  진공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윤 박사의 말에 동의한다. 일단 진공에 대한 내수시장 규모가 작다. 진공 관련 새로운 제품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OLED 연구가 각광받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OLED는 반도체보다 훨씬 높은 진공도를 구현해야 한다. 수준 높은 진공도가 요구되는 산업들이 늘어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공 전문가들의 연구도 활기를 띠지 않을까.

윤주영 : 다른 연구를 보조하는 개념의 진공 연구는 많은데, 진공만을 위한 기초연구는 부족하다. 진공은 그냥 다리만 걸쳐있다. 기본기가 약하다. 선진국이 100년 동안 이뤄놓은 과학기술을 우리는 50년 만에 이뤄낸 것이다. 원천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이상훈 : 절대적인 과학 이론은 미국, 일본을 따라가기 힘들다. 한 분야만 10년, 20년 심도있게 파고드는 연구 문화가 우리에겐 정착되지 못했다.

윤주영 : 국내 반도체 대기업 임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기초기술에 대해 상담할 과학자가 없다고.

하태균 : 몇 년 전, 이란 진공 기술자들이 가속기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우리 연구소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돌아갔다. 우리나라 가속기 초고진공 시스템 설계·운영 능력은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세계를 이끌 수 있는 기술력 확보를 위해선 단기적 성과 도출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공기반기술에 대해 긴 안목의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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