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즈만 나가오카 첸쉐썬 이원철 등등 조국 발전 큰 역할
한국 위기···과학자들 온실 뛰어나와 '개척'하며 국난 극복 기대

호국 보훈의 달 6월이다. 젊을 때는 애국을 언론 등에서 거론하고 어른들도 강조할 때, 기성세대의 '강요'로 받아들이며 부정적이었다. 세계를 둘러보고, 역사를 돌아보고, 앞날을 내다볼수록 국가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는 공동 운명체라는 것을 인식하며 '애국'이란 말을 저절로 읊조리게 된다.

국가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념과 감정이 혼재되며 국가의 근간이 위협받고 있다. 자연 앞날의 비전도 부재하며 갈팡지팡하고 있다. 과학은 이러한 국가 위기의 국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외국의 과학자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 우리나라 과학자들 가운데 나라 세우기에 역할하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 계시는가?

최근 'NASA 앰배서더'란 독특한 명함을 갖고 있는 폴 윤 교수를 만났다. 그로부터 미국 어린이들한테 과학자는 아직도 선망되는 직업의 하나이고, 화성 가는 우주인 양성 프로젝트에 1만8천여 명이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국가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은 구성원 모두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할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진세대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할 사항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 사회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바 중 하나가 '롤 모델'의 부재이다.

초등학생들이 장차 자신들이 되고자 하는 인물이나 직업이 보편 타당하고 미래 지향적이면 그 사회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사회가 그러한 롤 모델을 제시하는가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의견들이 많다.

국가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근대 과학은 큰 역할을 해왔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하지만 과학을 조국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 인류 발전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그러한 삶의 자세가 후손들에게 롤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국인 과학자로 자신들의 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의 사례를 살펴보자.

일본인 과학자 가운데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郎)란 사람은 독특한 인물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서양 과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며 외국에도 유학을 보냈다. 1893년부터 1896년까지 독일에 유학하며 루드비히 볼츠만으로부터 배운다. 그런 가운데 물리학 분야에서 일본인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의 역할을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의한다. 개인의 학문적 성취에 두기 보다는 일본이란 국가 공동체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 과학 주류와의 접목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서양 최고 과학자와 일본 과학계를 연계하는 '다리'역할을 자임했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보다 지속가능한 것이라고 느껴서 한 것일까?

나가오카 박사의 주선으로 1900년대 초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일본을 줄줄이 방문했다. 당시 교통 상황은 배가 유력한 교통 수단인데 유럽이나 미국에서 한 번 배로 오게되면 한 달 가량 소요되고, 그런 만큼 일본에서 오래 체재하며 일본의 우수 영재들한테 서양 최고수들의 지식이 제대로 전수됐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가와 히데키는 이런 강의가 자신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그의 소개로 일본을 방문한 서양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디랙, 하이데베르크 등등이 방문한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를 후보자로 추천한 사람도 나가오카 박사이다.

1차 세계대전이후 세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려 격변하는 와중에 국가 탄생에 큰 역할을 한 과학자도 있다. 바로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와이즈만(Chaim Weizmann) 박사이다.

러시아 태생인 와이즈만은 영국에 사는 화학자로 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아세톤을 대량생산하는 길을 연 사람이다. 와이즈만의 역할이 있어서 영국은 승전의 전환점을 맞는다. 와이즈만은 영국에 기술을 제공하며 '거래'를 한다. 종전 이후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도록 영국이 도와준다는.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고 아랍 세계 지도를 새로 만드는 가운데 팔레스타인이 살던 곳에 이스라엘이 비집고 들어간다. 중동 분쟁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로서는 역사 속의 나라가 현실 국가로 나타나는 계기이기도 하다.

1948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료됨과 동시에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 임시 대통령이 되고 다음해 이스라엘 정부 출범과 더불어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국가를 세우면서 과학을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우고 연구소를 만든다. 그것이 현재 세계 최고 연구소로 꼽히는 와이즈만 연구소의 출발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Ve1-K9rvxw

중국인으로 중국 로켓의 아버지라 불리는 첸쉐썬(钱学森)도 주목할 인물이다. 미국 유학을 하며 항공우주 전문가로 성장했으나 메카시 선풍이 불며 가택연금을 당하고, 미국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그런 가운데 모택동이 한국전에서 포로가 된 미 공군 장교 11명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중국에 오게된다.

1955년 중국에 오면서 당시 모택동 주석이 바라는 인공위성 제작에 착수하며 '15년 조건'을 내세운다. 15년 뒤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터이니 지원만 하고 간섭하지 말라는 것. 5년은 기초연구, 5년은 응용연구, 5년은 제작. 실제로 15년 뒤인 1970년 중국은 자력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게된다.

중국이 국방 정책으로 양탄일성(두 개의 폭탄과 하나의 위성. 여기서 두 개의 폭탄이란 하나는 원자폭탄, 다른 하나는 수소폭탄)을 내세우는데, 그 정책 성공에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p3be0_cvjo

중국의 우주 기술은 이제 세계가 알아준다. 최근의 영화 마션이나 그래비티 등 미국 SF물에 중국 우주 정거장이나 로켓이 단골로 등장할 정도로 높은 실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는데 거기에는 첸쉐썬 박사의 역할이 지대하다 하겠다.

한국에도 국가가 어려운 시기에 과학 발전을 위해 일신의 안녕을 마다한 과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잘 안알려져있다.

대표적 인물의 한 명이 이원철 박사이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천문학 박사 학위를 1926년 미국에서 받았다. 학위를 받자마자 귀국해 모교인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교직에서도 추방되는 등 불의의 시절을 보냈다.

해방이 되며 전공은 천문학이나 우선 국가에 필요한 기상 관측을 하기 위한 기상대 설립에 앞장서 오늘날 기상청의 초석을 닦았다. 과학사학자인 문만용 전북대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고 국가 과학발전의 토대를 닦은 업적은 후손들이 기억하고 후배 과학자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원철 박사와 함께 일본에서 태어나 1950년 귀국해 배추 개량 등 오늘날 우리 먹거리 마련에 큰 기여를 한 우장춘 박사도 우리가 기억해야할 인물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시간에 연구에 더 몰입해 국가 농업의 기반을 닦겠다는 집념의 결과로 감자, 감귤, 배추, 유채 등의 한국 식물 종자 상당수가 확보돼 오늘날 우리의 먹거리가 풍요롭게 됐다.

최형섭 장관은 한국 과학의 초석을 이룬 분으로 더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http://www.hellodd.com/?md=news&mt=view&pid=48992

과학자는 본연의 연구로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자의 조국이 불안정한 상태이면 그의 존재와 연구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해방이 될 때 우리가 가진 이공계 박사수는 10명을 넘지 못했다. 일제는 식민지 인재는 키워도 조국 독립을 위해 일할 가능성이 크므로 키우지를 않았다.

2010년 대한민국의 이공계 박사는 누계로 1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불과 60여년만에 1만배가 불어난 것이다. 왜일까? 국가 발전을 위해 이공계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집중 육성한 결과이다. 국가가 있어야 재능 가진 사람들이 날개를 펼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해방이후 어느 때보다 어렵다. 과학자가 지금까지의 국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권력자의 지원과 국민의 지지라는 ‘온실’ 속에서 성과를 낳은 것이다. 국가 살림이 팍팍해지고, 국민들의 삶도 고단해지는 가운데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야생에서도 꿋꿋하게 성장해 국가로부터의 수혜자가 아니라 국가 발전의 견인차가 돼야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개척’ 정신을 발휘해 국가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호기이다. 그리하여 과학자가 정말 매력적인 직업으로 존경도 받고 롤 모델이 되는 한편, 본인들 스스로도 당당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많은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국가 공동체와 자신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교과 과정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은 연구 중심으로 과목이 편성돼 있는데 과학사와 과학철학 등 왜 연구를 하는지에 대해 보다 깊은 질문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목도 필수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하겠다.

국립 대전 현충원에는 최형섭 장관을 비롯해 원자력 국산화의 주역인 한필순 박사와 인공위성 국산화의 주인공 최순달 박사 등이 모셔져 있다. 호국 보훈의 달에 현충원을 찾아 이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순달 박사, 최형섭 前 장관, 한필순 박사 묘비.<사진=대덕넷, 원자력연 제공>
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순달 박사, 최형섭 前 장관, 한필순 박사 묘비.<사진=대덕넷, 원자력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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