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장비 국산화②]경쟁기업 없으면 '부르는게 값'
연구자 "익숙함과 성과중심 선택···국내산 구입? 색안경부터"
"첨단연구장비 제작위한 데이터·아이디어 다 넘어가는 상황" 현장의 경고

#1 우리나라에 경쟁기업이 없는 연구장비는 부르는게 값이다. 외국 연구장비 기업들이 국내에 경쟁기업이 있는지 여부를 파악한 후 기존 가격보다 3~4배나 높은 가격을 책정할때도 있다. 가격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요에 따라 구입한다. 그럴 경우 서비스 받기도 쉽지 않다. 희귀 장비는 국내에 서비스 업체도 없어 해외에 직접 요청해야 하는데 몇 개월이 지나서야 서비스를 받는 경우도 적지않다.
 
 #2 정부과제 제안서에 이미 장비 특정사양 등이 제시돼 있는데 국산장비가 기준을 맞추기는 어렵다. 관료들은 표준화된 장비 구입을 요구하고, 연구자들도 외국에서 공부하며 익숙한 장비, 결과의 우수성을 경험했기에 외산 장비를 선호한다.
 
부르는 게 값. 연구장비 선진해외 기업들이 국내 연구현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분명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사용자(소비자)인데 외국 장비기업들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다. 핵심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앞선 기술을 가진 기업이나 국가에 휘둘릴 수 있다는 현실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과학기술 입국 50년 역사 속에서 왜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현장 연구자, 정부 관료, 기업인 누구도 이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장 연구자는 익숙함과 빠른성과를 요구하는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이유로 외산장비 구입에 망설임이 없었다. 정부 관료는 성과 우선 정책에 따라 표준화로 이미 시장에서 인증받는 외산 장비 구입을 공공연하게 유도하고 묵과했다. 초창기 연구장비 기업들 대다수는 장비개발보다 수입으로 기업 외형을 키우는데 집중했다. 누구도 국산 연구장비 기술확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셈이다. 

그 결과 과학기술 강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국내 연구현장 장비의 70%이상, 50억원 이상의 핵심장비는 97%이상 해외 기업 장비들로 실험실 공간이 채워졌다.
 
그 결과 연구장비 선진국들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는 동안 국내 장비기술은 과학입국 50년이 넘도록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연구자 입장 "국산장비 구입 제안하면 색안경 끼고 봐"

"3년 단위의 과제시 기업과 협력해 장비를 개발하고 업데이트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혹여 국내 기업 장비를 구입하겠다고 하면 기업과 특별한 관계가 아닌지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연구성과 평가시 논문이 몇 편인지 수치로 평가하는데 논문과 거리가 먼 연구장비를 누가 개발하려고 하겠는가."
 
외산 연구장비를 구입하는 연구자의 말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K 과학자는 "과제 제안서에 이미 표준화된 장비기준(대부분 외산)이 있다. 국내 장비기업이 이 기준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면서 "실제 기준에 맞지 않는 국내 기업 장비를 넣으면 바로 관료로부터 지적을 당한다. 공연한 오해를 받는 게 싫어서 이미 알려진 장비를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다른 연구자는 "국산장비로 연구하고 논문을 썼더니 일부 데이터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을 하더라"라며 "정부 관료조차 국산장비를 신뢰하지 않는 문화다. 연구자들이 국산장비를 통한 연구를 꺼리게 된다"고 안타까워 했다.

연구자들의 해외 연구장비 선호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해외에서 연구하며 익숙하게 사용하던 해외 연구장비를 우선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신뢰감 때문이다.

연구장비를 많이 이용하는 연구자는 "국내와 해외에 똑같은 연구장비가 있다면 연구자들도 해외장비를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시작이 늦은 국내산 장비가 해외 장비를 앞서기는 쉽지 않고 연구자들은 과제 기간내에 성과를 내야하는 압박감에 역량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국내 기업 장비를 불편해 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국내 연구장비 중 중소형 장비는 기술 역량이 우수한 기업도 많다. 하지만 고가의 장비는 여전히 외국장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면서 "국산 장비 이용도 중요하고 국산장비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있지만 연구성과의 정확성을 위해 이미 검증된 장비를 구입하게 된다"고 솔직한 심경을 피력했다.

◆ 해외 연구장비 기업 '갑질' 부르는게 값…기술 주고 '좀비' 장비 받는 현실

출연연의 K 박사는 분석장비를 해외에서 구입하면서 3배의 가격을 지불했다. 과다한 가격책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연구에 꼭 필요한 장비를 구축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구입 신청했다. 장비 후진국을 넘어 장비 식민국 상황이 이미 시작된 셈이다.

K 박사는 "해외 연구장비 기업들이 갑이다. 국내에 경쟁기업이 없으면 본래 가격에 비해 3~4배를 부르기도 한다"면서 "알면서도 필요하니 사야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연구 장비 수입은 비용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비싼 비용에 우리의 기술력까지도 고스란히 유출되는 것이 현실이다. 첨단 연구 장비의 경우 대부분 '선주문 후제작' 형태로 이뤄진다. 장비가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족히 3~5년이 걸린다.
 
장비 제작을 위해 해당 기업에서는 끊임없는 자료를 요구하고 연구자는 요구대로 넘겨주다보면 아이디어, 샘플, 분석법 등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작기업으로 넘어가게 된다. 부분적으로 주지만 결국 연구성과까지 통으로 넘기는 꼴이다.

첨단연구장비를 구입했던 M 박사는 "처음엔 단순히 아이디어 공유로 시작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술이 넘어가고, 장비를 받고 나면 더 좋은 성능의 장비가 시장에 나오게 된다. 우리는 돈, 기술 다 주고 좀비 장비를 받는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내 연구자들이 첨단장비라고 구입한 장비는 졸지에 일반장비가 되고 결국 교육장비로 추락한다.
 
과학계 한 관계자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구현할 전문 기술자가 부족하니 연구 장비 수입 의존도는 커질 수밖에 없다"면서 "장비 제작을 이유로 제작자가 아이디어, 분석법 등을 요구하면 다 줄 수 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다른 관계자는 "선진국은 연구자와 기술자의 협력이 잘 이뤄져 첨단 장비를 개발하고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다"며 "우리는 기술자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열악해 연구소 내에도 연구자는 넘쳐나는데 기술인은 점점 줄고 있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특별 취재팀 = 길애경 기자·박은희 기자·김지영 기자·강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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