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회 "구체적 시행안 마련으로 기획부터 과정 등 지원 예정"
연구현장 "시행안 마련보다 실패 인정하는 문화 확산 필요"

연구성과의 성실실패를 인정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15년 전부터 있었지만 각 정부출연기관마다 실제 보고된 사례는 단 한건도 없었다. 왜일까.

15년 만에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이사장 이상천·이하 연구회)는 연구개발 전문가들로 TF팀을 구성, 성실실패 용인제도의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시행안 마련에 들어갔다. 연구회 관계자에 의하면 오는 3월 말까지 시행안을 마련하고 연구과제 기획단계부터 지원에 들어갈 예정이다.

성실실패 용인제도. 성실하게 연구과정을 진행했지만 목표에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성실실패로 인정해 연구자가 다음 과제 수주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미의 제도다.

연구 현장에 성실실패 용인 제도가 직접 도입된 것은 2010년부터다. 정부는 지난해 5월 '정부R&D혁신안'을 통해 '성실실패 용인 제도'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성실실패 사례는 여전히 '0'을 기록하고 있다.

연구회 관계자에 따르면 성실실패 용인제도 도입 5년이 지난 현재까지 구체적인 실행안이 마련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평가자들은 성실실패를 인정할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불편한 상황을 피해갔다. 또 과제 막바지에 성실실패로 인정해도 지원할 마땅한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서 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이 관계자는 "성실실패 용인제도의 취지는 좋은데 이를 도입한 출연연도 많지 않고 도입한 기관들은 시행안을 마련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면서 "제도 활성화를 위해 연구회 차원에서 평가 단계 뿐만 아니라 기획 수행 단계부터 관여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시행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 시행안이 마련되면 성실실패 용인 사례가 나오며 도전적인 연구가 늘어날 수 있을까.

연구 현장에서는 성실실패 용인제도나 시행안 마련보다 '연구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문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위기다. 또 연구성과는 목표 대비 상황이 달라지는데 평가자가 내린 점수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 성실실패 용인제도 시행안 나오면 평가 가능할까?

우리나라의 국가 R&D 성공률은 100%에 육박한다. 그러나 연구성과가 산업계나 사회에 실질적으로 파급되는 효과는 낮은 편이다. 도전적 과제가 감소하면서 국가 R&D의 역량이 점점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연구현장의 목소리를 종합해 보면 연구자들이 도전적 과제를 회피하기 시작한 것은 과제중심제도(PBS)가 도입되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과제 기반의 평가가 이뤄지며 연구자들은 하고 싶은 연구보다 당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연구를 우선시 하게 됐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평가에 불이익을 받지않기 위해 성공 확률이 높은 과제에 쏠렸다. 과제가 탈락하면 연구조차 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연구자들은 도전적인 연구나 미래 연구, 세상에 없는 연구는 외면했다.

이에 정부는 연구자들이 도전적인 연구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에서 성실실패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시행안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제 평가시 전혀 반영되지 못했고 평가자들 역시 성실실패보다는 과제 성공유무 중심으로 평가했다. 성실실패 용인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했던 셈이다.

평가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정부 연구과제 평가시 60점 이하면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두고 성실실패인지 부정실패인지를 판단해 구제해야 한다"면서 "그런데 현실적으로 60점 밑으로 점수를 줄 수 없다. 그럼 연구자들이 피해를 보게되고 일이 복잡해지는데 평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피곤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한다"고 현재 평가의 문제를 진단했다.

평가자로 참여한 출연연의 한 과학자는 성실실패제도의 모호성과 연구결과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연구는 당초 연구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부수적 성과가 나올수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의외의 성과가 나오면 어떻게 평가를 해야할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서 "또 연구라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다. 이를 두고 자료를 내지 못하면 실패한 걸 단정지어버리면 누가 연구를 하겠는가"라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과학정책 한 전문가는 "외국에는 성실 실패제도 자체가 없다. 연구하면서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 있을때 관련 위원회를 열고 명확히 제제에 들어간다"면서 "그런데 연구결과만을 가지고 성공실패 등급을 판정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구 결과를 통해 실패를 빨리 알면 알수록 제대로 투자한 것이다. 안되는 일을 그만큼 빨리 안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성공이든 실패든 어떤 지식을 찾았으면 의미있는 연구다. 제재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과학후진국이나 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한 과학자는 미국의 사례를 들며 연구 실패 사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 식약처의 경우 부작용 사례, 실패한 사례 정보만 모으는 과제도 있다. 실패 정보를 많이 모아야 문제를 빨리 알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문제를 노출시켜야 효능, 부작용을 빨리 분별하고 환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약물 부작용 사례조차 숨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과학정책은 성공과 실패 기준 잣대를 획일적으로 정해놓고 성공만 높이 평가하는 문화다. 실패한 정보는 모두 쓰레기로 날려 버린다"고 안타까워했다.

연구회 관계자는 "지금의 PBS 환경 속에서 최적화된 성실실패제도를 운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인정하며 "아직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 없지만 처음부터 성실실패 과제로 구분하는 방식 등 기획안부터 시도하면서 지원하고 성실실패 연구자들이 다음 과제 수주시 피해가 없도록 보호제도도 마련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성실실패 제도를 객관적으로 하더라도 도전성을 인정해주고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연구회, 정부 관계자 등의 인식과 시각이 같아야 한다. 이를 해결하는 것도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구상중인 성실실패 제도의 구체적인 시행안이 마련되면 연구현장의 사기가 진작될지, 좀 더 도전적인 연구 과제가 늘어날 수 있을지, 평가자들이 성실실패를 용인하는 사례가 증가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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