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회고록 읽은 학생들 서적 재발행 희망 서명운동…이병권 KIST 원장 만나 명단 제출
내년 KIST 설립 등 科技 진흥 50주년 앞둬…고인 정신 전파해야

"故 최형섭 장관님의 회고록의 재발행을 간청 드립니다. 이 책이 다시 발행돼 많은 이공계 학생과 연구자, 행정직원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이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김성영 KAIST 바이오·뇌 공학과 학생) 

"학생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청원을 하게 됐나요?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재발행을 청원해줘서 기쁘게 생각합니다."(이병권 KIST 원장)

故 최형섭 장관의 정신은 세대의 장벽도 뛰어 넘었다. 절판되어 구할 수 없게된 고인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재발행을 위해 KAIST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청원서와 서명을 받고, 최근 이병권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을 찾아 이를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은 회고록의 중요성과 재발행의 필요성에 대해 피력했다. 

이병권 KIST 원장을 만나 재발행 청원서를 전달한 김성영 KAIST 학생.<사진=대덕넷>
이병권 KIST 원장을 만나 재발행 청원서를 전달한 김성영 KAIST 학생.<사진=대덕넷>

◆ 내년 KIST 설립 50주년 앞둬…"고인 정신 더 많이 알려야"

내년이면 대한민국 최초 정부출연연구기관인 KIST가 설립된지 50주년을 맞는다. 지난 1966년 KIST가 설립된 이후, 이듬해 과학기술처 발족,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1971년 KAIST 설립 등이 이어졌다. 각종 산업기술의 개발과 보급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수많은 과학기술 연구소가 출범하면서 국가과학기술 발전의 모태가 됐다.

KIST 초대 소장과 첫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하면서 한국과학기술의 기반을 구축한 고인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최 장관과 당시 선배 과학자들의 연구철학, 열정, 사명감이 담겨있다.

특히,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시간에 초연해 연구에 몰입하고,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하라'고 강조한 연구자의 덕목은 여전히 연구자들의 연구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 국내 서점, 인터넷 서점 등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 1995년 발간된 이래 절판된 까닭이다. 또한, 도서관에서도 서적이 낡거나 보유한 도서 장서가 적어 이 책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이공계 학생들 대부분은 책의 존재조차 모르고 졸업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KAIST 도서관의 경우, 선배 과학자의 일생과 한국 과학계의 역사가 담긴 이 책의 보유 장서는 단 3권. 그마저도 헤지고, 닳아서 이 책을 찾는 학생들이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이공계를 대표하는 타 대학의 상황도 유사하다. 서울대학교 4권, 포항공과대학교에서 1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GIST와 DGIST는 보유하고 있는 장서가 없다.  

한국 과학·산업계가 국·내외적으로 위기감을 갖고 있는 시점에서 과학계 원로들은 학생들의 자발적 움직임과 변화에 주목하면서 고인의 정신을 더 많이 알리고 교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 수석은 "이공계 학생들이 옛날 이야기라고 흘려 듣지 않고, 자발적으로 의미를 생각하고 재발행을 청원해 줘서 고맙다"면서 "최 前 장관은 훌륭한 학자이자 인격자로 과학계에서 존경해야 할 분이다. 책이 꼭 재발행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과학계 한 원로는 "해방 후 기술식민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배들의 시대정신을 알아야 한다"면서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 불확실성 속에 과학계인들이 고인의 정신을 기리고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 학업에 대한 동기부여와 의욕심 고취…"졸업 후에도 계속 관심가질 것"

재발행 청원운동을 대표로 이끈 김성영 KAIST 바이오·뇌 공학부 학생은 학업에 대한 동기부여와 과학사에 대한 배움, 이타주의에서 기반된 국가관 등을 재발행돼야 하는 이유로 꼽았다. 

재발행 청원 운동을 이끈 김성영 KAIST 바이오·뇌 공학부 학생의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재발행 청원 운동을 이끈 김성영 KAIST 바이오·뇌 공학부 학생의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김 학생은 "나 자신도 그렇고, 주변에서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모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억지로 하다 보니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토로했다.

현재, KAIST 내부에서는 과학사나 과학자로서의 철학을 알려주는 교육은 사실상 전무하다.

김 학생은 "교양 중에 과학사가 있지만, KAIST 역사와는 무관하다"면서 "결국에는 진심이 중요한데 학업과 연구는 즐기는 마음과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고,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면서 "신입생 때 읽었다면 좀 더 열심히 학업에 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힘들 때 펼쳐보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선배들이 피땀흘려 일궈 놓은 지금의 좋은 환경에 감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통해 과학자로서의 정신과 전통을 배우는 시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학생은 "연구에 대한 의욕고취, 사명감 부여 등이 필요합니다. 선배들이 후배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순히 밥 먹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정신과 전통을 알려줘야 한다. 꿈을 심어주고 이해방향을 제시하는 강한 리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학생은 졸업 후까지도 계속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적어도 이 책은 KAIST에서 만큼은 필독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서 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만큼 이공계인에게 동기부여 되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재발행이 확정되면 학교 측에 건의할 생각입니다. 졸업 후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면서 학교와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책을 읽은 KAIST 학생들의 변화…"과학史·과학자 사명감 몰랐던 내 자신 돌아본 계기"

이 도서를 읽은 학생들은 실제로 많은 변화의 모습을 보였다. 과학사의 중요성과 자신들이 수행하는 학업의 이유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아래는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읽고 난 이후 KAIST 학생들의 독후감 중 내용 일부를 발췌한 부분이다.

책을 읽으면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사명감이 아닐까 한다. 학부 졸업 예정자인 나는 조만간 대학원 과정에 입학할 예정이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부터 책을 읽기까지 과연 내가 왜 과학자가 되고 싶은지, 그리고 과학자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하고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새롭게 다잡을 수 있었다. 개개인의 사리사욕, 세속적인 이익추구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꼭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M 학생)

오늘날의 한국 과학 기술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궁금해 본적이 없었다. KAIST에 다니는 학생으로서는 조금 부끄러워할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우리나라 과학 기술의 기초를 다지고 틀을 세우고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분들의 역사와 과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H 학생)

또한, 우리나라에서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우리나라 과학 발전사를 꼭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카이스트 에서는 필수 교양과목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학교가 설립된 역사, 당시 배경, 우리나라의 계획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학생들이 알게 되면 공부, 연구를 하다가 지쳤을 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학교의 명성 그리고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력을 끌어올리기 까지는 이익이나 혜택 등의 조건이 주어져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열정과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나태하게 지내오던 내 자신과 그리고 국가에 감사하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해 반성 할 수 있었고 더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갖도록 해야겠다.(C 학생)

아래는 KAIST 학생들의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재발행 청원서 전문이다.

청원서

故 최형섭 장관님의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재발행 청원

안녕하세요. 저는 KAIST 졸업을 앞두고 있는 바이오·뇌공학과 김성영 학생입니다. 제가 다소 딱딱해 보이는 청원서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故최형섭 장관님의 회고록인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재발행을 간절히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학교 강의 중 '대한민국 100주년 어떻게'라는 읽기와 토론 특강에서 교수님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KAIST에서 6년 넘게 재학했지만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수업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책이 절판되었고, 학교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도 너무 낡은 책 3권이 전부였기 때문에 빌려 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래된 책을 왜 추천해주셨는지 하는 불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故 최형섭 장관님께서 겪었던 일과 50년 전의 대한민국 과학기술이 어땠는지 상세하게 기록된 내용을 읽고 많이 놀랐습니다. 세계에서 과학기술 경쟁력 만큼은 선진 국가를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연구소를 갖춘 것이 이토록 짧은 시간이었고, 그렇게 시작된 과학기술은 대한민국이 지금의 위상을 갖게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저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진정한 감동은 故 최형섭 장관님과 대한민국 과학의 발전을 함께 이룬 연구원 분들의 정신이었습니다. 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연구소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이에 필요한 장비들은 재료만 구입해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연구소 설립을 위해 미국에서 원조 받은 돈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불만은 커녕 연구 의지는 오히려 불타올랐습니다. 반대로  저는 일 못하는 목수처럼 장비와 주변 여건을 탓했습니다. 저의 지난날들이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과학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를 알게되었습니다.

KAIST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이공계 대학교입니다. 하지만 제가 학생으로서 느낀 KAIST의 전체 분위기는 위상만큼 과학에 대한 열정이나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스템과 개인이 업적을 쌓으려는 의지로 인해 어떻게든 회전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책에는 지금 KAIST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정체되어 있는 KAIST에 고인의 정신이 담긴 회고록은 경제력과 두뇌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줄 것입니다. 또한, 학생과 연구자들에게 과학을 탐구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숭고한지를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눈 많은 학우들이 이 책이 다시 발행되어 많은 이공계 학생, 연구자, 행정직원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이 책을 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재발행을 간청 드립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