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점검-1]KISTI, 설립이래 축적한 해외 학술지, 간행물 폐기 방침
과학계, "국가 중요 자원 의견 수렴 및 보존 방안 찾아야"

 

정보가 경쟁력인 시대다. 정보 수집 속도와 분석력, 서비스 제공의 질이 국가의 위상을 대신한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기본법 법령에 따라 정부출연연구기관인 'KISTI(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가 과학기술 정보 인프라를 종합관리 및 구축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보구축의 기반과 원칙이 흔들리는 움직임이 있어 연구현장에 논란이 일고 있다. 그동안 수십억 또는 수백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학술자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2회에 걸쳐 그 실태를 살펴보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독자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원하는 바이다.[편집자주] 

 

50년 동안 축적된 자료들이 일거에 버려진다면? 우리나라에서 다른 곳에는 없고 이곳에만 있는 해외간행물로 전공자들에게는 지식의 보고일 수 있는 자료들이 오래됐다는 이유 하나로 쓰레기로 취급된다면?

국가를 대표해 과학기술 정보를 수집하고 확산하는 기능을 맡은 국가과학기술정보연구원.영어명 KISTI. 출범 초기 첩보를 다루는 국정원과 함께 과학기술정보를 다루는 곳으로 수장이 같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기관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기능 중의 하나가 해외 중요 과학학술지 및 과학 간행물의 수집 및 제공. 인터넷이 발달하기전에는 이곳에 와서 많은 과학자가 논문 등을 살펴보고 연구에 참조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이 보급되며 이곳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이용률도 높지않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축적한 정보들은 디지털화가 되지도 않고,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자료들이다. 전공자들에게는 보물이 될 수 있는 것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이 자료들이 낡았다는 이유로 한 순간에 쓰레기로 취급되며 폐기될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KISTI별관 4층에 있는 자료실. 높이 약 2m, 넓이 8m의 서가가 즐비하다. 6칸으로 나뉘어진 칸칸에는 오랜 손때가 묻은 가운데 가지런히 정리된 자료가 놓여있다. 자료실답게 들어서자 마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하고 밀려들어오며 무엇인지모를 무게감을 전해준다. 책자를 뽑아들자 BIOCHEMISTRY, Journal of Ceramics 등등 60년대부터 최근 것까지 잘 구비돼 있다. 전공자라면 보물을 만난 심정일 듯 하다. 4층 자료실의 끝에서 끝까지 길이가 약 80m, 이 공간을 자료들이 빼곡이 채우고 있다. 3층에는 이와함께 마이크로 필름 등 디지털 자료와 단행본 등이 촘촘히 자리잡고 있다.

KISTI 별관 4층 정보관에 들어서니 즐비한 서가에 오랜 손때묻은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자료들도 버려질 예정이다.<사진= 대덕넷>
KISTI 별관 4층 정보관에 들어서니 즐비한 서가에 오랜 손때묻은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자료들도 버려질 예정이다.<사진= 대덕넷>

그런데 이 자료들이 다 '쓰레기'가 된단다.

일반 과학자들은 물론 국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KISTI 자료실에서는 지식인이라면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마르지 않는다.'

세종 29년에 간행된 용비어천가의 제 2장에 나오는 대목으로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많이 인용된다. 당장의 차이는 보이지 않지만 위기에 직면했을때 가장 필요한 덕목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안다. 노벨과학상과 거리가 먼 한국의 과학기술계나 각종 사고로 얼룩진 사회 현상속에서 이미 충분히 경험하며 기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KISTI의 자료 폐기 방침은 설립 목적 등 기본에 어긋나는 결정과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해당 부서원의 80%가 "과학계의 미래를 위해 절대 안된다"며 반대의견을 표시하고 있고, 외부 관계자들도 해당 출연연의 섣부른 결정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데도 강행 처리 되며 자료가 버려지고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KISTI는 최근 '디지털 라이브러리'라는 비전을 이유로 설립이래 50년동안 축적해온 해외 간행물 폐기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지난 2013년에도 해외 학술지 30만권을 이미 폐기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이번에 버려질 해외간행물들을 포함한 양을 A4용지 크기(210*297mm)로 얼핏계산해도 170여km로 서울-대전간 도로에 깔고도 남는 양이다.

외부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더군다나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자료 폐기란 상황은 공유되지 않고 폐기 작업은 진행됐다. 그러다가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부 구성원들이 문제제기를 했고, 그에 따라 일부 의견 수렴은 됐으나 정당성에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돼 폐기의 타당성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임원급을 제외한 내부 구성원 대부분은 "명분 없는 폐기는 그만하고 활성화를 논의해야 한다"며 진행되고 있는 해외학술지의 일방적 폐기를 당장 멈출것을 촉구하고 있다.

각 대학의 정보 전문가들 역시 "아무리 디지털시대이더라도 과학기술 정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인 KISTI가 최후의 보루로 보관하고 운영해야할 해외 간행물들을 일방적으로 버리는 것은 이해할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사실이 외부로 확산되며 최근 열린 국정감사에 KISTI 해외간행물 폐기 사태가 거론되기도 했다. 조해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지난 18일 해외 간행물 40만권 폐기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한선화 원장은 "이전부터 진행해 왔고 정보환경이 디지털로 변화하고 있어 디지털 자원을 중심으로 구매하고 있다"고 답변하며 해외 간행물 폐기 지속을 시사하기도 했다.

곳곳에 폐기 자료임을 알리는 문구가 붙어있어 보는이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사진=대덕넷>
곳곳에 폐기 자료임을 알리는 문구가 붙어있어 보는이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사진=대덕넷>

◆ 50년된 해외저널도 이용도 낮으면 '폐기 대상'…담당자들 망연자실

KISTI 별관 3, 4층에 마련된 정보관에 들어서니 오래된 책들이 주는 향기는 그대로인데 서가 곳곳에는 폐기 대상이란 종이가 붙어 있어 암울한 운명을 알려주는 듯 하다. 반듯하게 정리돼 있어야 할 자료 일부는 어지러이 널려 있어 우울함을 더했다. 과연 이들을 버려야 하는가?

이번 문제는 KISTI가 기관의 비전을 '디지털 라이브러리'로 정하면서 이용도가 낮은 오프라인학술지는 선별해 폐기한다는 내부 위원회의 결정이 나면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KISTI 정관에 담긴 연구원 설립 목적을 살펴보면 보유중인 학술지를 KISTI 임의로 결정해 버릴 수 있는상황은 아니다.

KISTI 정관에 명시된 기관설립 목적은 '국가 과학·기술 정보분야의 전문연구기관으로써 과학기술 및 이와 관련된 산업에 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수집·분석·서비스하고 정보의 분석·관리및 유통에 관한 기술·정책·표준화 등을 전문적으로 조사연구하며 첨단정보 및 연구개발인프라를 체계적으로 구축·운영함으로써 국가 과학기술 및 산업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한다'는 것으로 구축과 운영을 강조하고 있다.

또 '과학기술기본법' 시행령에는 KISTI는 과학기술기본법 제26조 3항 '과학기술 및 국가연구개발사업 관련 지식·정보의 관리·유통기관의 육성'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과학기술분야 정보의 총책임자 역할을 해야한다고 적혀있다.

해외 간행물 폐기 중지를 주장하고 있는 김태중 박사는 "지난 7월부터 원장과 위원회에 해외 간행물 폐기 중지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다"면서 "지난 2013년에는 예산 등의 문제로 30만권의 해외 간행물이 버려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기만 했는데 또다시 이렇게 대량 폐기되는 것을 보며 소중한 국가 자산이면서 후손들에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 버려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와 문제 제기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세계 어느나라의 과학기술도서관이나 정보센터가 소장 자료를 임의로 폐기한 사례는 없다"면서 "독일 과학기술 학술 도서관인 TIB는 정부 프로그램에 의해 국가과학기술도서관으로 지정돼 지금은 세계 최대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했다.

정보센터 근무 직원들은 해외간행물의 무조건 폐기를 지시받고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자료를 다뤄오던 사람들로 그동안 애지중지해온 자료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지난 50년간 수집해온 자료들의 일방적 폐기는 과학기술 정보의 총책임 기관으로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했다. 지시는 어길 수 없으니 버리기는 버리돼 다른 곳에서 재활용될 수 있기를 바랬다. 정부에서 운용하는 외국학술지지원센터(FRIC) 소속의 각 대학에 상황을 설명하고 간행물 이전을 알렸다. 이에 따라 일부는 서울대, 연세대, 전북대, 이화여대,부산대, 경북대 등으로 보내질 예정이다. 하지만 이는 전체의 30%에 불과하고 나머지 70%는 여전히 폐기 대상이다.

IBS(기초과학연구원)가 본원 건립시 과학도서관 설립을 계획하고 있지만 현재 기관 차원에서의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과학계 한 인사는 "국민의 피눈물 같은 돈으로 수백억원이 들여져 쌓인 해외학술지 정보가 제대로된 논의도 거치지 않은채 정보 관리 책임을 맡은 기관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21세기판 과학지식의 대학살"이라며 "과학계가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며 합리적인 대안 마련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책자를 요청해온 대학들로 보내질 자료들. 이 자료들은 폐기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KISTI가 과학기술 정보 전문연구기관의 역할도 함께 놓아버린 듯해 아쉬움이 크다.<사진=대덕넷>
책자를 요청해온 대학들로 보내질 자료들. 이 자료들은 폐기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KISTI가 과학기술 정보 전문연구기관의 역할도 함께 놓아버린 듯해 아쉬움이 크다.<사진=대덕넷>

50년간 축적된 과학 기술 정보들이 폐기 대상으로 전락하며 아무렇게나 놓여있다.<사진=대덕넷>
50년간 축적된 과학 기술 정보들이 폐기 대상으로 전락하며 아무렇게나 놓여있다.<사진=대덕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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