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서평] 뉴턴의 무정한 세계(정인경 저)
이상 28세에 요절...유카와 노벨 물리학상 수상 74세 장수
한국 과학자의 '꿈'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화두 제공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식민지의 천재는 뜻도 펴지 못하고 부초같은 삶을 펼친다. 과학에 대한 이해력과 관심도 상당하지만 의미 없는 지식으로 간주된다. 위험 인물로 찍혀 감옥 생활도 겪은 뒤 28살의 나이에 폐병으로 객사한다.

제국의 천재는 학문에만 정진하고 대학 졸업 전후의 젊은 나이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좀머펠트,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등의 세계적 학자들로부터 연구의 자양분을 받았다. 같은 28살이란 나이에 세계적 논문을 냈다. 그러다가 나라가 패전하며 극도의 생활고를 겪고 희망도 없는, 바닥 상태에 있을 때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란 낭보를 전했다. 그 해는 1949년이고, 그의 나이 42살의 일이다. 국가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키며 희망이 가득차게 했다. 일본은 그 다음해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활황을 맞게 되고 이후 고도성장을 구가하게 된다. 노벨상 수상 이후 전세계를 다니며 강의하다가 74세에 숨졌다.

식민지의 천재는 '이상'이란 필명의 김해경이고, 제국의 천재는 유카와 히데키이다.

사람에게 있어 국가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그 재주를 펴게할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재주가 오히려 저주스러울 수도 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 라이어란 책이 있다.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내용으로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글래드웰이 강조하고자 한 내용은 1만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는 그 시간을 낼 수 있고, 누구는 그 시간을 못내는데 그 차이는 바로 공동체의 건강성에 달렸다는 것이다.

제국의 천재는 환경이 뒷받침돼서 재능을 펼쳐 본인의 이름도 날렸고, 공동체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식민지의 천재는 재능을 못 펼치고 문학 작품으로만 남았다.

누구를 탓할 것도 못된다. 모국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운명인데, 그 이후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단절이 있던 시기에 근대 과학은 고속성장을 했고, 우리는 그 흐름을 타지 못함으로 인해 노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근대 과학이 우리와 어떻게 접목됐고,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극명하게 대비시켜주는 역사와 과학을 아우른 역작이 나왔다.

과학사를 전공한 정인경 박사가 쓴 '뉴턴의 무정한 세계'(정인경 저,돌베개 간)가 그것.

이광수 선생의 '무정'에 나오는 개화를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김 장로의 고민을 우리의 현실에 대비시키는 것으로 책은 시작한다.

그동안 과학과 관련된 책들이 번역본, 특히 이론 소개가 대부분이었는데, 과학사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 현실을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이 가는 책이다. 저자인 정인경 작가는 수학과 출신의 한국 과학사 전공 박사.한국 문화적 토양에서의 '과학기술하기'와 과학기술과 우리의 삶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 책은 뉴턴과 다윈, 에디슨, 아인슈타인의 세계 과학기술의 4대 거장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모습은 무엇이었는가 등을 다룬다.

이 책은 특히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과학기술을 이용해 한반도에서 제국 일본이 어떻게 자원을 가져가고 사람들이 부림받았는가를 서술한다. 1929년 건립돼 당시 동양 최대 수력발전소인 부전강 발전소가 기실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일본질소주식회사가 운영하는 흥남비료공장을 위해 건설됐다는 사실 등을 이야기한다.

식민지 시대, 제국 일본은 조선사람들에게는 이공계 교육을 시키지 않고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대우했다. 식민지 청년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면서기 정도가 최고였다. 외부 문물을 수입할 수 있는 영어는 상과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수학도 대수의 경우 2차 방정식을 푸는 공식조차 가르치지 않았고, 기하도 원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어렵게 학위를 따도 대부분 일본에서 연구직을 얻지 못하고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와 중등학교 교사로 취직했다고 한다.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하고 휘문고등에서 교편을 잡은 신건희는 "양자역학이니 통계역학이니 하는 것이 연구실에서 나온 지 1년여 만에 다 흩어져버린다"고 안타까워했다.

식민지 인재로 제국 일본에서 온갖 설움을 딛고 비날론을 개발한 이승기는 "조선아, 조선아, 어디로 갔느냐. 조선아! 조국아, 듣느냐, 만리이역에서 네 아들이 울고 있는 이 소리를..."하며 통분했다.

해방이후 선각자들에 의해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이뤄졌다. 폐허에서 원자력 연구원을 세우고 두뇌들을 미국으로 유학시킨 이승만 대통령, KIST를 설립하고, KAIST를 세우고, 대덕연구단지를 출범시킨 박정희 대통령 등등. 그들의 혜안에 의해 과학계는 캐치업에 성공해 이제는 세계에 우는 소리를 안내도 된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은 세계적 성과물이다. 우리만의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에 우리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야 하는데 아직은 2% 부족이다.

우리가 근대 과학을 받아들인 목적은 '따라잡기'였다. 폐허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먹고 사는게 우선이었고, 그러려면 수출을 해야했다. 수출을 위해 리버스엔지니어링으로 외국 제품을 사와 분해한 다음, 국산화를 해야했다. 과학기술은 그 수준에서 필요했고, 그것이 경공업을 거쳐 중화학 공업으로 가면서는 범용 기술이 아니라 고난도 기술이어야 했다.

실력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면서 이제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 세계에 없는 기술이고, 이를 위해서는 기초 과학이 필수적이다. 기초 과학은 먹고 사는 데 주안점을 두기 보다는 과학자 스스로의 과학에 대한 동기부여와 꿈, 실패, 빈둥거림 등등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과학자들이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차원인 신념과 가치관을 갖고 연구에 몰입해야 한다. 패러다임이 기존의 따라잡기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기도 하다.

일반인들도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과학자들은 왜 과학을 하는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등 근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의 영재는 성적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갖고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일생을 걸고 도전하며 조금씩 성과를 쌓아올리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우수한 과학자가 많이 생길 확률이 높아지고, 다양성도 높아진다 하겠다.

과학을 제대로 하려면 자신의 뿌리에 대해 의문을 갖고, 찾아보고, 고민해야 한다. 세계 과학사도 중요하지만 한국 과학사를 제대로 인식할 때 연구를 더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고 우리에 맞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최형섭 前장관의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도 한국 과학사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볼만한 책이다.

'뉴튼의 무정한 세계'는 과학도는 물론이고 연륜이 깊은 과학자들도 한 번 읽어봄직하다. 일본이 과학을 수용한 과정과, 식민지 시대 일본과 우리의 차이 등등을 알고, 미래를 내다보며 과학자가 가져야할 연구자세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데 좋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고 하겠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식민지 시대의 피해 의식이 짙게 깔려 있는데, 이 부분은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현대와 미래를 내다보며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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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기하학과 뉴턴 과학을 겉핥기로 배웠다. 일본어로 된 근대과학은 청소년기 이상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다...그후 모국어가 아닌 기호와 추상성으로 '오감도' 같은 시를 썼고, 기하학과 수학은 그의 시적 언어가 되었다. 그래서 이상의 시는 모국어와 자연스러움이 배제된, 딱딱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난무했다.

그는 시 '최후'에서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서질 그런 정도로 아팠다"라고 썼다.

이상은 시 '오감도'를 연재했는데,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연재를 15회에서 중단하고 말았다...시대를 앞서간 이상의 작품에 대해 조선인들은 냉대와 몰이해로 일관했고, 천재는 서서히 박제가 되어 갔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 과학계는 눈부신 성장을 하며 유카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수백 명이나 키워냈다.

한국문학계를 빛낸 천재 시인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상보다 3년 일찍 태어난 유카와는 28세의 나이에 중간자를 발표하고 세계 무대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이상은 28세가 되던 1937년에 도쿄에서 '불량한 조선인'으로 체포된 뒤 폐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한 명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건축학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횡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식민지 본국 일본에서 태어나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첫 번째로 추진한 정책은 서양 과학자들을 대거 초빙해 직접 일본인들을 가르치게 한 것이다. 1877년에 도쿄대학을 설립하고 법학부 이학부 문학부 의학부의 4부를 설치했다...두 번째로 추진한 정책은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해 과학기술을 배워오도록 한 것이다.

나가오카는 과학을 통해 일본도 서양과 대등한 문명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독일 유학 시절부터 구상했던 원자모형을 떠올리면서 유럽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주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1922년 11월17일, 아인슈타인은 40일간의 긴 항해 끝에 일본 고베항에 도착했다. 이 항해 중에 스웨덴 과학아카데미는 아인슈타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공식 발표했다. 그는 43일간 도쿄 센다이 나고야 교토 오사카 고베 나라 미야지마 등을 돌면서 강행군 일정을 소화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1만 4천여명이 그의 강연을 들었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열기도 뜨거웠다.

조선에서는 아인슈타인의 그림자도 볼수 없었는데, 일본에는 아인슈타인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이후 양자역학의 수장이었던 보어를 비롯해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줄줄이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대학 졸업을 전후로 서구 물리학지들이 일본을 계속 방문한 일은 내게 행운이었다. 처음 좀머펠트 문하의 라포르테가 며칠간 양자역학을 강의했다. 이어서 좀머펠트가 교토대학을 방문하여 파동역학에 관한 평이한 강연을 했다. 나아가 양자역학의 건설자인 하이젠베르크와 디랙 두 분이 일본을 방문했다. 하이젠베르크의 입에서 불확정성 원리의 해설을 듣는 것, 디랙 자신이 말하는 전자의 상대성 원리,그런 것들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을 만큼 감명 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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