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 UST 교무처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나이가 들면서 조금 신기하게 느껴지는 게 하나 있다.
전에는 해가 바뀌고 난 후 한 동안 년도를 쓸 때 곧잘 지난 해의 년도를 쓰곤 했는데, 최근엔 해가 바뀌고 나면 큰 어려움 없이 새로운 해의 년도를 잘 적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분명 기억력은 감퇴되어 가는데, 해가 바뀜에 대한 인식은 보다 또렷한 이유가 무얼까?
나이가 들면서 남은 한 해 한 해가 소중해 지고, 한 해가 가는 것이 가슴 속에 보다 깊은 나이태를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았다.
연말과 연초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한 해를 마감하는 행사로 해넘이와 해돋이를 보기 위해 산과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연말 연시를 조용히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냈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석양과 아침 해를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서 정말 년도가 바뀌면 눈으로 보기에는 가고 오는 해가 다른 해는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해가 뜬다고 생각하면서 '새해'라는 말을 쓴다.
고대에는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삼았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다 동지를 기점으로 다시 짧아지기 시작하면서 해뜨는 시각은 조금씩 빨라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 지금 보다는 새로운 해가 새롭게 느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국 새해를 맞아 떠오르는 해를 '새로운 해'로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신년이 되어 읽기 시작한 책이 한 권 있다. 창조경영의 전문가인 강신장씨와 시인이며 언론인인 황인원씨가 함께 쓴 '감성의 끝에 서라'라는 책이다.
지난 연말, 벌써 2년째 써오고 있는 '사진 공감' 칼럼을 계속 써야 할지를 망설이다 더 쓰기로 한 후 칼럼의 방향을 잠시 생각한 적이 있다.
우선 칼럼이 속한 큰 분류가 '감성노트'일 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자들에게 쉼이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더 나가 창의적인 생각의 작은 시발점이 되면 좋겠다는 나의 욕심이 발동하여 새해에는 보다 감성적인 사진을 보여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시적인 감성의 충전이 절실하였는데, 그런 나에게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읽기 시작하였다.
책에 소개된 첫번째 이야기는 헬렌 켈러 이야기이다. 어느 날 헬렌 켈러는 숲속을 산책하고 돌아온 정상적인 눈을 가진 친구에게 무엇을 보고 왔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친구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어"라고 답했는데, 헬렌 켈러는 몇 시간동안이나 숲속을 걸으면서 별로 특별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친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라는 사실이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이 대학 총장이 된다면 모든 학생들에게 '당신의 눈을 잘 쓰는 법 (How to use your eyes)'이라는 과목을 반드시 듣게 하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헬렌 켈러가 말한 '눈을 잘 쓰는 법'이란 '마음의 눈으로 보는 법'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나가 이 책에서는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시인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를 권한다.
즉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상대방이 되어 보는 일체화를 권한다. 가령 겨울나무를 보면서 내가 그냥 그자리에 서 있어 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잎을 다 떨구고 눈 밭에 홀로 서 있는 알몸의 겨울나무가 되어 긴 겨울밤의 추위와 외로움을 견뎌내 보고 새벽빛 너머로 떠오르는 황금빛 햇살에 환희를 느껴보라는 말이다.
올 한해 시를 쓰지는 않을 지라도 시인의 감성으로 자연을 보고 시와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사진공감의 독자들도 새해에는 이곳에서 작은 쉼을 얻고 이러한 감성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 연말 내가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보고는 시인의 감성으로 멋진 시를 지어 주신 김혜련 시인의 시 한 편으로 감성의 새해를 시작하기로 한다.
겨울나무로 서서/ 김혜련
밤새워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린
어느 겨울 날
겨울나무는
순백의 옷을 입고
땅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며
묵언 수행 중이다
이따금 까치가 앉은 자리
후드득 눈 떨어지는 소리가 날 뿐
겨울 숲 속의 고요 속에
장엄한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제 몸 안에 나이테 하나 더 한다
겨울나무로 서서
나에게 무언으로 속삭이는 말
세월은 가고 오는 것
미래는 새벽빛처럼 밝아오고 있으니
흐르는 세월에 마음 두지 말고
희망의 빛 속으로 걸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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