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킨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해나무 刊)'
태양과 명왕성 왕복할 수 있는 DNA의 길이
그 길이만큼 많고 다양하고 흥미로운 뒷얘기들

1884년 겨울, 체코의 한 수도원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곳에서 연구하던 멘델이 죽었다. 그는 따뜻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수도승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정부의 조사를 받고, 추문에 시달리고, 현지 관리와 대결하면서 수도원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도승들은 멘델의 유품을 남김없이 불에 태웠다. 불 속으로 들어간 종이에는 완두콩을 그린 스케치와 숫자를 빼곡하게 적은 표가 있었을 것이다. 수도승들은 알지 못했다. 그 종이들이 불타면서 '유전자' 발견에 관한 위대한 기록도 재가 되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셔는 사진속 지하실험실에서 DNA를 발견했다. <사진=책 본문 중에서>
미셔는 사진속 지하실험실에서 DNA를 발견했다. <사진=책 본문 중에서>
그 해 겨울 유럽은 몹시 추웠다. 스위스의 생리학 교수였던 미셔는 연어를 연구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몇 년 전부터 연어 정액에서 추출한 '솜같은 회색 반죽물질'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섬세한 정액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셔는 실험실 창문을 모두 열어놓아야 했다. 차가운 바람이 실험실에 몰아쳤다. 미셔는 알프스의 강추위와 매서운 바람이 자신의 몸을 서서히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험과 연구는 계속됐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솜같은 회색 반죽물질'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DNA'였다.

유전자와 DNA. 19세기 거의 같은 시기에 발견됐지만 이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50년 뒤에나 밝혀진다. 유전자와 DNA의 발견자인 멘델과 미셔는 그 업적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불리는 완두콩 논문은 1900년이 되어서야 세 명의 생물학자에 의해 발견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앞서 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과학사에서 사라질 뻔 한 수도사를 부활시켰다. 멘델이 죽기 전 말했다던 "언젠가 내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DNA 길이 만큼이나 무궁무진한 뒷 얘기들

지금은 거의 이음동의어처럼 쓰이지만 두 단어는 같은 뜻이 아니다. 멘델의 유전자 연구가 불과 화염, 미셔의 DNA 연구가 추위와 얼음이라는 전혀 상반된 서사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다른 운명을 갖고 있다.

DNA는 물질, 즉 손가락에 들러붙는 화학물질이다. 유전자는 긴 DNA 가닥(한 사람의 몸속에 있는 DNA를 전부 이어 붙이면 태양과 명왕성 사이를 왕복할 만큼 그 길이가 길다)으로 이어져 있다. 유전자가 '이야기'라면 DNA는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DNA와 유전자는 합쳐져 염색체를 이룬다. 염색체는 DNA로 가득찬 책이다. 그 안에는 생물의 거의 모든 유전자가 들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책 표지.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책 표지.

베스트셀러 '사라진 스푼'의 저자 샘 킨이 쓴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해나무 刊)'는 그런 DNA의 흥미진진하면서도 아슬아슬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래서 부제가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다. 물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한 뒤 각종 매체에 글을 쓰고 있는 작가는 이 책을 통해 DNA에 얽힌 음악과 사랑, 광기, 천재성, 세계사를 들려준다. 책은 이런 저자의 말로 시작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DNA를 이으면 그 길이는 알려진 우주 끝까지 수십 번 이상 왕복하고도 남는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DNA에 법의학적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이 DNA의 이야기들을 함께 모으면 지구 상에서 인류가 어떻게 등장하고 진화해왔는지 들려주는 더 크고 복잡한 이야기가 된다. 즉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 이토록 찬란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지, 왜 우리가 자연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물 중 하나인지 들려준다."

역사적으로 DNA와 관련해서는 기이하고 오싹한 일화가 많다. 

1920년대 이바노비치 이바노프라는 러시아 생물학자는 인간 유전자를 침팬지 유전자와 합쳐 '휴먼지'를 만들려고 하는 섬뜩한 실험을 진행했다. 이른바 '휴먼지 프로젝트'.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실험은 그야말로 엽기적이었다. 남성의 정자를 암컷 침팬지에게, 혹은 수컷 침팬지의 정자를 여성에게 수정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다행히' 실험은 계속 실패했다. 대리모를 자청한 여성 실험자와의 수정을 위해 마지막으로 데려오던 '타잔(오랑우탄의 이름)'이 뇌출혈로 죽는다. 그리고 얼마 뒤 타잔처럼 이바노프도 뇌출혈로 사망한다. 휴먼지 프로젝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 인류는 유전자와 DNA에 대한 비밀을 모두 풀고 조작할 수도 있으며 생명체 탄생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복제 포유류인 돌리가 검사를 받고 있다. <사진=책 본문 중에서>
이제 인류는 유전자와 DNA에 대한 비밀을 모두 풀고 조작할 수도 있으며 생명체 탄생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복제 포유류인 돌리가 검사를 받고 있다. <사진=책 본문 중에서>

◆선원들의 죽음·예술가들의 삶과도 얽혀 

16세기 말 네덜란드의 영주들은 보물을 얻기 위해 바렌츠에게 북극 항해를 주문했다. 선원들은 다이아몬드가 널린 섬을 발견하고 즉시 상륙했다. 하지만 그 섬에는 다이아몬드 뿐 아니라 굶주리고 포악한 북극곰이 바렌츠의 선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가 무참히 잡아먹히는 장면을 목격한 선원들은 북극곰 사냥에 성공하자 거의 모든 부위를 먹어치웠다(복수심도 컸지만 선원들은 무엇보다 고기에 오랫동안 굶주려 있었다). 급기야 곰의 간까지 스튜로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기록에 의하면 간을 먹은 선원들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피부란 피부는 모조리 벗겨지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비타민 A가 원인이었다. 북극곰 간에 비타민 A가 그렇게 과다하게 농축되어 있는 이유는 20세기 중반에야 밝혀졌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북극곰은 비타민 A의 독성을 견딜 수 있도록 유전자가 변화한 것이다. 차가운 얼음물에서 새끼를 키워야 하는 물범에게 비타민 A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장호르몬처럼 작용해 새끼 물범에게 피부층과 지방층이 빠른 시간에 두껍게 생기도록 돕는다. 북극곰도 비타민 A가 필요하고 그런 물범을 잡아먹는다. 먹이사슬 맨 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극곰은 오랜 시간에 걸쳐 비타민A의 독성을 견뎌낼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는 니코로 파가니니가 지난 천부의 재능은 손을 놀랍도록 유연하게 만든 유전질환의 '도움'이 컸다. 기괴할 정도로 멀리 벌려진 엄지손가락에 주목하라. <사진=책 본문 중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는 니코로 파가니니가 지난 천부의 재능은 손을 놀랍도록 유연하게 만든 유전질환의 '도움'이 컸다. 기괴할 정도로 멀리 벌려진 엄지손가락에 주목하라. <사진=책 본문 중에서>
유전자와 DNA는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세계를 바꿔놓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손을 펼치면 30cm가 넘었다고 한다(후세 연구자들은 그가 유전질환인 '마르팡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것은 피아노 위에서 1.5 옥타브에 해당하는 길이다. 이런 유전적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피아니스트들은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인대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반면 슈만은 '국소성 근긴장'을 앓았다. 이 때문에 오른쪽손 중지를 마음대로 구부릴 수가 없었다. 슈만은 피아니스트 경력을 그만 둬야 했고, 손가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곡을 작곡함으로써 보상을 받았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스토리는 유전자와 예술가의 관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 그의 손가락 관절은 놀라울 정도로 유연했다. 엄지손가락을 손등 뒤로 구부려 새끼손가락과 닿게 할 수 있었고, 가운데 손가락 관절을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흔들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손으로 신들린 연주를 했고, 호사가들은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콜라겐을 많이 만들지 못하는 '엘러스-단로스 증후군'을 앓은 것으로 보인다. 이 치명적 유전질환은 그를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반열에 올려놓은 동시에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인류는 유전자와 DNA의 거의 모든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DNA의 길이 만큼이나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때로는 불처럼 뜨겁고 얼음처럼 차가운 사연을 담고 있다. 어떤 종은 유전자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했고, 동시에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유전자를 변형시켜 왔다. 유전자와 DNA는 한 사람의 운명을 갈랐고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선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전자와 DNA에는 그 흥미진진한 역사 만큼이나 이와 비슷한 개인적인 스토리가 넘쳐난다. 물론 개인적 이야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몸속에 이런 이야기를 최소한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유전자와 DNA,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다. DNA보다 더 복잡하고, 유전자보다 더 많은 사연들을 간직한 삶의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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