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단계 아닌 기획단계의 혁신 필요…관리 권한 관료에서 전문가로

정부출연연의 연구성과 비효율성 문제는 오래된 이야기다. 상당히 많은 개선대책과 대안연구가 있었지만 별 개선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기초기술 연구보다 산업화 위주 연구정책을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국가연구사업의 정책적 방향성에 견주어 볼 때 OECD 24개국 중 최하위의 연구성과라는 성적표는 충격적인 것이다. 이젠 피상적 해법을 넘어서 모두가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말하고 도전할 때이다.

◆우리나라 정부연구개발 투자의 현황

2012년 기준 우리나라의 국가연구개발비(기업+정부)는 GDP대비 4.36%로 OECD 국가중 2위, 절대규모로는 6위에 속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절대규모 10위 이내의 국가 중에서는 GDP대비 투자규모가 세계 1위이다. 또한 그 증가추세가 10%를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연구개발 투자 예산은 더 이상 확장하기 곤란한 정점에 다가서고 있다. GDP 성장율의 정체 때문만이 아니다. 저명한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을 되찾는 방법론으로 연구개발투자의 확대 못지않게 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대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경제학 산책' 참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내의 주류 경제학자들과 언론은 그동안 복지가 확대되면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논리를 줄곧 강조해 왔다. 하지만 장 교수는 혁신적인 기업가적 도전이 많아지고 경제가 살아나는 해법은 복지에 있다고 일갈하고 있다.

국가연구개발 투자와 관련해 외부의 변화를 보면 그 어느 때보다 효율적인 R&D 체제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질 것임은 자명하다. 특히 복지예산과 대척점에 있는 국가연구사업 투자의 특성을 고려할 때, 연구 성과를 개혁하는 것은 연구자의 직업적 사명을 넘어서서 저소득층, 실업인, 장애인 등의 복지에 쓰여야 할 혈세를 소비하는 주체로서 도의적 책임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연구를 위한 연구, 지식 재산의 축적과 전문인으로서 경험 축적의 의미에 만족하는 연구는 설자리를 점점 잃어갈 것이다.

◆출연연 연구성과 개혁에 관한 정부의 고민과 한계

출연연 성과개혁의 실패가 장관교체에 결정적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연구개발 사업의 성공률은 100% 수준에 가깝지만, 성과가 낮은 패러독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 3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①평가실패 ②기획실패(애초에 성공이라는 평가의 근거가 되는 사업목표가 너무 낮은 수준, 쉬운 수준으로 설정되었다는 것) ③앞서 제기된 2가지가 복합된 실패.

연구사업의 성과평가를 담당하는 실무현장에서 발견한 점은 ①항을 통한 개선, 즉 엄정한 평가지표 발굴과 전문성, 공정성을 담보한 평가 위원회를 구성하더라도 기획단계의 부실과 평이한 사업목표 설정, 상업화에 대한 충분한 사전 기획과 전략적 반영이 결핍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동안 추진된 연구성과 개선안은 대부분 평가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표적인 제도개선 실패사례는 논문을 통한 연구사업 평가를 들 수 있다. SCI 논문 등재수를 평가기준으로 삼자 우리나라의 SCI 등재 순위는 세계 6위 수준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연구사업 결과의 상용화 성공률에서는 세계 43위에 머물고 있다.

논문의 질적 수준을 한층 개선하기 위해 논문 인용지수를 도입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별 성과가 없었다. 왜 그럴까? 2013년 12월 발행된 '2012국가연구개발사업 성과분석'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SCI 피인용 지수는 5.86으로서 G7국가의 평균 수준(6.80)에 필적한 수준으로 향상되었고 BRICS 평균 3.45보다 월등히 높다.

그럼에도 왜 연구결과의 상업화 성과는 OECD 최하위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단초를 연구비 10억당 SCI 논문 편수 특성에서 찾아보자. 대학의 경우 5.9편, 출연연의 경우 0.7편으로서 대학이 출연연에 비해 8.5배의 성과를 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학이 석박사 졸업 요건으로 SCI 논문을 요구한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고, 출연연의 경우 원천기술 연구보다는 제품개발에 가까운 연구에 치중한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SCI 양적, 질적 개선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원천기술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상업화 실적과는 거리가 크다는 것이다. 대학생의 박사논문 연구주제가 출연연이나 산업체의 애로기술을 해결하는 목적성 연구에서 괴리된 주제라면 그것은 그저 학문적 방법론의 진보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기획단계의 혁신 없이는 평가단계의 정량적, 정성적 한계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SCI 평가지표를 통한 연구사업 성과개선시도 사례라 할 수 있다

대안 - 평가개혁보다는 연구사업 기획혁신이 답이다

흔히들, 성과평가만 잘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적확한 지표 발굴과 지표의 충족성, 평가결과에 대한 신뢰성·정확성에 공을 들인다. 그러나 ①평가 대상사업 목표의 산업전략과의 연계성 ②그 연계성을 보장할 기술개발 목표의 도전성 ③사업목표 및 기술개발 목표와 잘 부합(대표성과 구체성 측면에서)하는 평가지표의 정량적 정의 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리 신뢰성 높고 정확한 평가 방법론이라도 무력해 질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일례로 상업적 경쟁력이 있는(사업목표) 위성 개발과 관련 핵심기술개발(특정 기술개발 목표)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의 경우, 평가지표는 이 두가지 목표를 대표하는 구체적 정량지표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업에 대한 정량적 지표가 SCI 논문이나 특허 숫자라면 사업목표 따로 평가지표 따로인 셈이다.

이 상황에서 상업화 성과 향상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사업의 기획단계부터 상용화와 연계된 충분한 검토와 전략적 요인을 반영한 기획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업 종료 후 상용화 실적을 추적평가 관리하는 것이다. 현재 정부가 택한 길은 두 번째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기획단계의 개혁은 충분히 이뤄졌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그러나 기획단계의 부실은 이미 상식이다. 100%에 가까운 국가연구사업 성공률에서 찾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메시지는 기획단계부터 부실하다는 점이다. 즉 너무 쉬운 목표 설정 또는 상업화 전략은 미흡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기획단계 혁신의 필요와 방향에 관한 제언, 통찰

어떻게 하면 기획단계부터 연구사업의 목표가 도전적이고 혁신적이며, 정량적인 위험관리와 평가가 가능한 사업기획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을 푸는 열쇠는 첫째 연구의 수행주체인 연구자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비롯된다. 정직하고 정열에 찬 연구자라 할지라도  상당한 불확실성을 품고 시작하는 연구사업에 대해 충분히 도전적이고 구체적인 성과관리 지표를 스스로 공개할 리가 없다. 즉 도전적 연구사업에 대한 핵심은 불확실성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이다.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연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선 적정수준의 목표설정을 하려할 것이다. 또한 평가지표의 정의에 있어서도 관료들이 선호하는 정량적 성과라는 모양새를 충족하면서도 핵심을 비켜가는 지표를 선택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연구자가 제대로된 기획을 하게 하려면 ①불확실성을 떠 안는 도전적 목표설정에 대한 파격적 인센티브 ②성공-실패 패러다임의 평가체제를 '연구과정의 성실성' 중심의 평가체제로 전환 ③산업체의 기술수요와 시장수요 조사에 중점을 둔 '사전기획연구단계' 지원 및 사전기획연구 결과의 성실성에 근거하여 신규 연구사업을 발굴하는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연구사업의 기획단계 혁신을 위해 필요한 세가지 요소를 정리해 보았다. 세가지 요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공통적 환경이 필수적으로 요구 된다.

▲(전문가) 연구사업의 도전성 및 연구진행단계의 성실성을 평가․자문할 전문가의 확보
▲(거버넌스) 기획안에 대한 조정 권한 부여
▲(정보제공) 이 전문가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자료 제공을 통해 자문, 조정, 평가의 질적 제고
▲(예산제공) 사전기획연구를 지원할 예산과 충분한 시간의 확보

이상으로 연구기획단계의 혁신 방향과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연구환경 개혁의 필요성을 정리해 보았다.

환경 개혁은 거친 밭을 기경하는 것과 같다. 씨뿌리기 전에 충분한 시간과 땀을 들여 땅을 갈아 엎어야 가능하다. 평가단계의 개혁보다는 기획단계의 개혁, 기획단계의 개혁보다는 기획환경단계의 개혁! 그렇다면 한 가지 통찰이 찾아온다. 연구성과의 혁신은 단기간에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위에 제시한 기획환경 개혁과제는 연구사업의 기획, 평가, 관리 권한을 관료집단으로부터 전문가집단으로의 이양을 요구한다. 지금부터라도 연구성과 혁신을 위한 단기적 해법보다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과혁신을 담보할 환경혁신에 대해 고민할 때이다.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실장은

안오성 항우연 실장
안오성 항우연 실장
현재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연구기획조정실을 맡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틸트로터 무인항공기의 기획 및 비행체 설계와 체계종합을 10년동안 담당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 T-50 개발사업에서 비행체 설계통합, 서브시스템 체계종합과 착륙장치 PM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 항공우주부문 자문연구원, 민군기술협력센터 기술기획 소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중입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우리나라 산업 환경 및 국제동향, 국내 정책 환경을 통합한 장기적 항공우주 산업육성 전략, 항공우주분야 민·관·연 협력 체계, 국가 대형 R&D 사업의 기획·관리·평가 체계의 혁신 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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