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현균 표준연 과학나눔교류 회장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방학 때면 할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에서 방학을 보내곤 했었다. 1970년대 농촌의 풍경이란 어린아이에게는 정말 한가롭기 그지 없다.

자동차는 한 달에 한번 볼까 말까 했었고, 동네에서 교감선생님 한 분만 출퇴근용 자전거를 보유하셨던 그런 시골이었다. 그런 마을 입구에 새로운 사람의 형태가 보이면 정자나무 밑에 모여있던 동네 사람들 입에서는 저것이 누구일까라는 추측과 더불어 추측된 그 사람과 관련된 '~라더라'라는 출처없는 이야기들로 한가로운 시골 풍경은 잠시 들뜨곤 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던 방문객은 엿장수였다. 제 소임을 다하고 구멍난 양은그릇, 세수대야, 주전자, 분유깡통, 소주병은 엿과 바꿀 수 있는 대박 물품이었고, 그날은 동네 아이들이 가장 신나는 날이기도, 가장 많이 머리를 쥐어 박히는 날이기도 했다. 가끔 어른들 몰래 멀쩡한 그릇이나 대야를 몰래 가져다 엿 바꾼 형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한가로운 고향의 방문객에 얽힌 추억 중에 필자 머리 속에는 '기호' 형이 자리잡고 있다. 아마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았을 것이다. 첫 방문에서 기호형은 온 종일 나와 함께 놀이를 해 주었다. 어린 나를 종일 데리고 다니면서 과일도 따주고, 목마도 태워주고, 꼬맹이가 심심하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해 준 것이 어린 나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형의 두 번째 방문은 무슨 일인지 오른팔에 하얀 붕대를 감고 다 저녁에 와서 이른 아침 일찍 훌쩍 떠나버렸었다. 왜 그렇게 빨리 훌쩍 떠나버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형이 가고 난 뒤에도 한나절을 울었었단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야 형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머니도 기억하시는지 내가 어렸을 적에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기호 형이라고 소개시켜 주셨다.

어린 시절 기호 형은 나에게 그리운 손님이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멋진 손님 한 분이 다녀가셨다. 프란치스코 교황(78). 필자는 천주교도가 아니라서 같은 종교를 가진 분들이 느꼈을 가슴 깊은 흥분과 따듯함은 못 느꼈지만, 그분의 행적을 보면서 그 분이 왜 이 시대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인지, 어떻게 1300년 만에 비유럽권 출신으로 교황에까지 오른 것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국가 원수에 준하는 예우도 사양하며,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눈길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긴 방문은 아니었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좋은 말씀은 오래도록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 과학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의 마음에 남은 것은 "엄청난 물질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남은 정신의 빈곤, 외로움, 절망감의 고통"이란 말씀과 "삶은 혼자 갈 수 없는 길"이라는 부분이다.

최근 대덕 연구단지에 일부 뜻을 같이 하는 연구인들이 모여 '벽돌한장'이라는 사단법인을 막 출범시켰다. '따듯한 과학마을'이 모토라고 하는데, 점점 썰렁해져가는 이 마을을 어떻게 따듯하게 해 줄는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같이 노력해야 할 일이다. 사실 대전 연구단지 대덕골에 연구인들이 모여든지 벌써 40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제대로 된 대덕골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생겼으니 늦어도 참 많이 늦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늦은 때가 가장 빠른 때인 것을.
 
동네 주민들을 중심으로 고유한 문화가 있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3년전부터 필자가 살게 된 전민동이 그렇다. 큰아이가 고등학교에 배정되면서 살게 되었는데, 대전의 여러 지역에서도 이 지역은 참 독특한 마을 문화가 있다. 1993년 대전 엑스포를 기점으로 세워진 아파트에 약 2000세대가 20년 정도 함께 살고 있는데, 작은 엑스포 공원을 중심으로 봄, 가을로 집에서 물건을 거래하는 벼룩시장이 형성되고, 전문인과 아마추어를 함께 초청해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문화제가 있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주변을 중심으로 이 동네 아이들은 그들만의 체육활동과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마치 서양의 어느 오래된 문화가 있는 마을을 가져다 놓은 듯 했다. 이곳 문화는 오래도록 더 발전할 것이고 주민들의 결속력과 자존심도 더 높아질 듯 하다.

자원이 부족하여 지식과 기술을 수출해 먹고 사는 우리나라에게 대덕 연구단지는 우리나라 근대과학사에 있어서 숲이고, 늪이고, 뻘이었다. 숲을 줄이고, 늪과 뻘을 메우면 당장 작은 이익이 생길지 모르지만 곧 후회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지난 50년간 급속한 개발역사를 통해 체험했다. 연구단지에서 근무해보면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이 사실은 전쟁터와 같다고 금새 동의하게 될 것이다.

국내 연구 수준은 분야별로 세계 5~15위권에 형성되어 있어서 세계적 선진대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은 모두 각자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경쟁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정치권과 정부에서 연구단지를 기업의 연구소와 비교하면서 생산률, 효율, 금전적 가치에만 기준을 두고 연구자들을 옥죄고 있다.

필자가 마침 대기업 연구소에도 일한 경험이 있어서 비교해 보면, 기업의 연구소와 정부출연 연구소는 그 목적 자체가 다르다. 기업 연구소는 특정 제품의 성능 극대화가 목적이고, 정부출연 연구원은 기초연구가 주를 이룬다. 이 두 개를 비교하는 것은 마치 비닐하우스와 숲을 비교하는 꼴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되는 때깔 좋고 싱싱하고 큼직한 딸기를 가르키며 왜 숲에서 이런 딸기가 없냐고 호통치는 꼴이다.

지금 정부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성장해온 불혹의 대덕 연구단지에 그런 기준을 갖고 평가하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웬만한 중소규모 회사들도 아이들 대학 학자금을 무상으로 지원해 주는 데가 많은데, 무상지원은 고사하고 학기당 고작 200만원 융자해 주던 시스템도 비정상이라고 중단시켰다. 월 십만원씩 지원해주던 어린이집 지원도 비정상이라고 중단시켰고, 연구 성과급도 대폭 줄였다. 현재 정부출연 연구원들 연봉은 기업체 연구원 연봉보다 훨씬 적다. 우리는 지금 빠른 개발과 성과 위주의 물질적 번영이 최고라고 모두 집단 최면을 당해 살고 있는 듯하다. 멀리 가려면 기업 혼자서는 갈수 없다. 기초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단지가 함께 가야 한다.

우리나라 두뇌의 숲이요 늪이요, 뻘로 기능해오고 성장해온 연구단지가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 연구단지 숲을 살리는데 가장 먼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과거의 화려한 대우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존심만은 지켜달라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만의 대덕 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첫 단추로 흉물스러운 공동관리 아파트를 허물고 연구원들을 위한 마당과 무대를 지어서 문화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그 시작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벽돌한장 같은 자생적으로 살아 보겠다고 만들어진 단체를 참여시켜 함께 고민해 봐도 좋을 듯 하다. 부디 긴 호흡을 가지고 멀리 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한민국은 과학기술로 먹고 사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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