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자 화학연 책임연구원, '2014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 선정
'내병성 병리검정 체계화' 이끌며 국내 중소종자기업 지킴이 역할

병리검정 기반 구축으로 국내 종자산업의 독립운동을 돕고 있는 최경자 책임연구원. <사진=장준미 기자>
병리검정 기반 구축으로 국내 종자산업의 독립운동을 돕고 있는 최경자 책임연구원. <사진=장준미 기자>

최경자 책임연구원의 연구실은 '화학연구원' 하면 연상되는 스테레오타입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다른 실험실처럼 각양각색의 실린더나 플라스크는 물론 기본이지만 여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 더해진다. 연둣빛 채소들이 한가득 자라고 있는 유리온실이다.

"종자회사에서 검정을 의뢰해온 씨앗들을 기르는 곳이에요. 떡잎에서부터 열매를 맺을 때까지 식물의 한 살이 별로 생기는 병들이 모두 달라요. 그래서 이렇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키우면서 생육단계에 따라 다른 병원균을 접종하고 발병 여부를 관찰합니다. 온실이 워낙 덥고 습하다보니 여름에는 인기가 없어요. 겨울에는 물론 서로 여기서 일하려 하지요.(웃음)" 

최 책임연구원은 2009년부터 서울대, 동아대, 강릉원주대,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과 함께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원하는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을 이끌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는 내병성 작물육종을 위한 병리검정 지원. 우리나라 종자회사들이 병에 강한 채소종자를 개발하는 데 꼭 필요한 병리검정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다.

'병리검정'은 병원균에 대해 식물이 저항성을 갖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어떤 식물이 특정 병원균에 대해 완전히 또는 자가 치유가 가능할 정도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면 '내병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연구대상은 가지과, 박과, 배추과 작물. 듣기엔 간단하지만 가지, 토마토, 고추, 파프리카, 오이, 수박, 참외, 멜론, 호박, 무, 배추, 양배추, 브로콜리 등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는 채소들 대부분이 모두 이 3개 과(科)에 포함된다.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의 안내 사이트.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의 안내 사이트.

주요 식물병에 대한 병리검정기술 개발은 크게 3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어린 싹을 이용하는 'in vivo' ▲식물조직의 DNA를 검사에 이용하는 '분자마커' ▲실험실 내에서 선발한 품종이 재배지에서 얼마나 저항성을 나타내는지 조사하는 '포장' 검정기술 등이다. 최 박사팀은 현재 이들 분야에서 모두 50여 종의 병해에 대한 병리검정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이렇게 확보한 기술을 바탕으로 새 품종을 개발하는 종자기업과 육종학자 등에게 병리검정을 지원 중이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이들의 지원을 받은 기업은 약 40개, 개별 건수로 따지면 약 10만여 계통에 이른다.

5년간에 걸쳐 제대로 정리가 안 돼 있었던 국내 병리검정의 체계를 바로 세우면서 부수적으로 거둔 성과도 만만찮다. 국내 채소종자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14건의 민간육종가 교육을 실시했고, 연구 기간 동안 병리검정 관련 석박사 학위자들도 50명이나 배출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관련기업에 들어가 국내 종자산업을 이끄는 핵심 연구인력으로 활동 중이다. 또 42편의 논문이 SCI 학술지에 게재됐다.

특히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성과는 연구팀의 병리검정 지원을 받은 종자회사가 새로운 채소품종을 개발해 시판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뿌리혹병에 저항성을 가진 배추 '청야'와 '청남'이 그것이다. 또 양배추 재배 농민들에게 골칫거리였던 검은썩음병에 저항성을 가진 '조은 에이스'와 '그린 스페이스'도 현장 확인시험을 거쳐 수출이 추진되고 있다.

IMF 이후 괴멸 상태에 빠졌던 국내 종자산업의 부활을 위해 사업단이 펼쳐온 그간의 노력은 최 책임연구원이 지난해 농림축산식품과학기술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데 이어 24일 '2014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되며 거듭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세계는 종자전쟁 중… "고군분투 국내 중소종자회사에 힘 되고 싶어”

(왼쪽부터) ①뿌리혹병이 발생한 배추. ②저항성 품종인 청남배추. ③검은썩음병 저항성 양배추 품종 그린 스페이스. <사진=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 제공>
(왼쪽부터) ①뿌리혹병이 발생한 배추. ②저항성 품종인 청남배추. ③검은썩음병 저항성 양배추 품종 그린 스페이스. <사진=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 제공>

 
세계는 지금 소리 없는 종자전쟁 중이다. 이제 무력이나 종교, 문화를 넘어 종자(種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1년 한 방송사에서 방영된 특집프로그램은 우리나라 종자산업의 허약한 실상을 드러내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방송에 따르면 현재 한식에 들어가는 식재료의 70%가 수입산 종자이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대표 먹을거리 청양고추도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로 특허권이 넘어간 지 오래다. 청원·서울·중앙·흥농종묘 등 한국의 주요 종자회사들은 1997~1998년 IMF 외환위기를 전후해 대부분 미국과 스위스, 일본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종자는 특허권을 보유한 기업에 모든 권한이 있다. 종자회사의 허락 없이는 단 한 톨의 종자도 사용할 수 없다.

세계 종자시장 규모는 2011년 기준 약 780억 달러이며 연평균 1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2011년 226억 원의 로얄티를 해외에 지불했다. 2012년부터는 신품종보호대상이 모든 작물로 확대돼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지 가늠하기 어렵다. 미래 식량위기에 대비하고 식량안보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종자산업의 육성이 시급한 상황이다.

최경자 책임연구원. <사진=장준미 기자>
최경자 책임연구원. <사진=장준미 기자>

최 책임연구원은 "IMF 사태 당시 종자회사가 해외로 넘어가며 우리나라의 육종 기반이 뿌리째 무너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적잖은 한국인 연구원들이 다국적 기업을 박차고 나와 벤처회사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종자산업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면서 "하지만 대부분 10명 이내의 중소기업이라 좋은 품종개발에 꼭 필요한 병리검정을 자체적으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을 도와 국내 종자산업의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게 최 책임연구원의 가장 큰 바람이다. 우리나라 종자회사들이 다국적 기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규모이지만 좋은 품종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노하우는 충분하기 때문에 지원만 충분하면 얼마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업단이 보유한 병리검정 기술을 특허로 기업에 이전하면 어떻겠냐고도 하지만, 우리나라 종자회사들이 소규모이고 열악한 상황에서는 아직 그럴 수 없지요."  

종자 개발에는 아주 긴 시간이 걸린다.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교배 육종하는 방식으로 10여 년의 지난한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수많은 연구개발과 시행착오를 거치기 때문에 씨앗 1g당 가격이 금값보다 비싼 채소품종도 있다.

따라서 초기 병리검정에서 오류가 발생한다면 품종 개발에 들인 종자기업의 오랜 시간과 비용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연구팀은 오류 방지는 물론 신속하고 정확한 병리검정 기반을 갖춤으로써 '식량주권'의 밑거름이 될 토종 종자기업들을 지켜내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 정부는 현재 2020년 2억 달러 종자 수출을 목표로 한 ‘골든씨드(Golden Seed)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최 책임연구원이 이끄는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은 프로젝트 내 5개 사업단 중 2곳에 포함돼 기존에 다루지 못했던 병 저항성 유전자와 병원균 분화에 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화학연 연구팀과 함께한 최경자 책임연구원. <사진=화학연 제공>
화학연 연구팀과 함께한 최경자 책임연구원. <사진=화학연 제공>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