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사이언스코리아 1부-⑤현장점검]위기의 연구공동체
대기업 수도권으로 R&D 집중…'한국의 실리콘밸리' 중심축 이동?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조성중인 삼성 R&D센터 조감도. 단일 R&D센터 규모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사진=서초구청 제공>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조성중인 삼성 R&D센터 조감도. 단일 R&D센터 규모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사진=서초구청 제공>

#1.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이곳에는 LG 사이언스파크가 조성된다. 2020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LG 사이언스파크에는 화학, 전자, 디스플레이, 생활건강, 이노텍, 유플러스 등 11개 LG 계열사 연구개발(R&D) 시설이 들어선다.

#2. 서울 서초구 우면동. 현재 삼성 R&D센터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부지만 5만9822㎡로 서초동 삼성 사옥의 2배 규모다. 지하 5층 지상 10층 건물이 6개나 들어선다. 예상 상주인력은 1만 명. 단일 R&D센터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3. 수원시 권선구 구운동·입북동 일대. 수원시는 이곳 35만2000㎡ 부지에 '수원 R&D 사이언스파크'를 조성한다. 2019년 말까지 에너지, 생명공학, 나노기술 연구시설을 집약시킨다는 방침이다. 사업비는 1조2000억원에 달한다.

#4. 판교테크노밸리. 이곳에는 지난해 말까지 넥슨, 엔씨소프트, 한게임(NHN엔터테인먼트), 네오위즈게임즈 등 국내 게임업체 '빅4'가 입주했다. 최근 게임 컨텐츠 등에 대한 국가적 관심까지 높아지면서 '게임 실리콘밸리'라는 야심찬 목표에 도전장을 던졌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꿈꿨던 대덕이 위태롭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역동성이 사라지면서 출연연이 밀집해 있는 대덕의 위상도 갈수록 침체되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고사하고 "더 이상 대덕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기술과 돈과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대신 민간연구소를 중심으로 수도권에 한국의 R&D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대덕에서 판교테크노밸리로 일터를 옮긴 김주희씨(28)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있다. 김씨는 "IT업체인 회사가 본사를 옮기면서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됐는데 분위기가 대덕과는 비교할 수 없다. 미국 실리콘밸리를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래서 사람들이 실리콘밸리를 자꾸 얘기하는구나 실감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 민간연구소 수도권으로 "헤쳐모여"

40년 전 대덕에 출연연을 집중시키기 시작하자 '안보'나 '안전' 문제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런 반발을 무릅쓰고 출연연과 대기업 연구소를 한 곳에 모은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시너지 효과' 때문이다. 여러 연구소들이 모여 있어야 기술과 사람이 교류하고, 그것이 더 큰 연구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시너지 효과는 이미 해외 사례에서 검증됐다. 대덕도 이런 기반을 바탕으로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의 먹거리를 창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민간연구소가 출연연에서 나오는 기술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개발하고 있는 기술보다 오히려 낙후된 경우도 많다. 융복합 연구는 극히 드물다. 대덕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배울 기술은 없고, 우수인력을 채용하기도 어렵다.

한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채용공고를 내고 적임자를 찾으면 거꾸로 질문을 받는다. 어느 지역에서 일하게 되느냐고. 대덕이라고 하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리고 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김명수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은 "산학연 역할이 다른데 지난 40년 동안 대학 기능이 커지고 기업연구소가 발전했지만 정부 주도의 역할은 크게 변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서울 마곡지구에 조성중인 LG사이언스파크 현장. 2020년 완공되는 이곳에는 LG 11개 계열사 연구소가 들어선다. <사진=서울시청 제공>
서울 마곡지구에 조성중인 LG사이언스파크 현장. 2020년 완공되는 이곳에는 LG 11개 계열사 연구소가 들어선다. <사진=서울시청 제공>

판교테크노밸리 이미지. 대기업은 물론 국내 게임업체들이 몰려들면서 한국의 '게임 실리콘밸리'를 꿈꾸고 있다. <사진=경기과학기술진흥원 제공>
판교테크노밸리 이미지. 대기업은 물론 국내 게임업체들이 몰려들면서 한국의 '게임 실리콘밸리'를 꿈꾸고 있다. <사진=경기과학기술진흥원 제공>
 

출연연이 역동성을 잃고 대덕이 주춤하는 사이 민간연구소들은 '헤쳐모여'를 통해 R&D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역시 이유는 하나다. 융복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 때문이다. 일사불란한 의사결정 체계와 막강한 자금력, 지자체들의 기업유치 경쟁, 그리고 여기에 수도권 규제까지 완화되면서 서울·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 R&D 클러스터를 앞다퉈 만들고 있다. 출연연과 이웃해 있는 대덕의 민간연구소들도 동요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수도권으로의 대기업 연구시설 집적화는 우리나라 R&D의 중심이동을 의미한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표방하고 있는 판교실리콘밸리에는 지금까지 700개 회사가 둥지를 틀었는데 입주기업의 90% 이상이 연구소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종사자만 3만8000여 명에 달한다. 입주가 마무리되는 2015년에는 1000여개 기업에 5만 명을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우면동 삼성전자 R&D센터는 상주인력만 1만 명이 넘는다. 우면동과 양재동 일대에는 이미 크고 작은 R&D 연구소가 300여 개 입주해 있다. 삼성 R&D센터가 완공되면 인근 연구소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마곡 LG 사이언스파크 역시 2만 명이 상주하게 된다.

서울 마곡지구에는 LG 외에도 코오롱, 에스오일, 대우조선해양 등 55개 기업이 R&D센터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수원 R&D 사이언스파크의 경우 1만6400개의 일자리와 연간 1조6330억원의 경제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수도권 R&D 클러스터의 성공 비결은?

이처럼 수도권 지역에 R&D 역량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는 글자 그대로 '수도권'이기 때문이다. 서울과의 접근성은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비교우위를 갖는다. 우수한 연구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용이하다.

또 다른 대덕의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서울에서 가까운 민간연구소와 서울에서 먼 정부출연연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하라고 하면 10명 가운데 7~8명은 민간연구소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방 소재 민간연구소는 연구시설 못지 않게 정주 환경에 신경을 쓴다. 기업 입장에서도 수도권에 연구소를 두는 것이 효율적이고 경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수도권 효과'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경기개발연구원에서 판교테크노밸리의 성공요인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다. 서울과의 접근성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혔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지자체의 노력'이었다. 연구를 주도한 이상훈 선임연구위원은 "판교테크노밸리는 이미 기반구축 단계를 지나 '클러스터 형성기'로 진입중이고 IT 대기업·중견기업의 집결지가 되고 있다"며 "계획부터 기반조성, 입주까지 사업의 전 과정을 지자체가 주도했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성공요소"라고 밝혔다.

판교테크노밸리 입주업체 현황. <자료=경기과학기술진흥원 제공>
판교테크노밸리 입주업체 현황. <자료=경기과학기술진흥원 제공>

분석에 따르면 경기도는 강남 테헤란밸리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용지를 공급해 조기 분양과 입주를 실현했다. 민간주도 개발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설계를 한 것도 주효했다. 

물론 서울 강남과의 접근성, 양질의 배후도시기능 등 뛰어난 입지요건은 판교테크노밸리의 조기 정착을 견인했다. 실제 이곳에 입주한 기업의 20% 정도가 대기업이다. 중견기업도 52%를 차지한다. 한국 상위 10대 게임업체 가운데 7개 업체가 판교테크노밸리에 둥지를 틀었다.

이러한 유리한 입지조건이 수도권 R&D 클러스터의 성공요인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렇더라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보자'는 지자체의 주도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빠른 성장은 힘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대덕 '패스트 팔로워'에서 '슬로우 팔로워'로?

대덕도 양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다. 연구기관 30개, 대학 5개, 기업체 1300개, 공공기관 11개, 국공립기관 14개, 비영리기관 30개 등이 입주해 있다. 특히 국내 이공계 박사 인력의 10%가 집중되어 있고 약 5만7000여 건의 국내외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수치'일 뿐이다.

대기업과 민간연구소가 '눈독'을 들일 만한 기술이 출연연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출연연의 기술로 벤처를 창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지자체와 대덕의 연결고리가 여전히 취약하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이라는 호기를 맞았지만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연계는 미약하다. 판교나 수원, 서울의 R&D 클러스터를 벤치마킹하려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이런데도 대덕의 핵심 동력인 출연연 입장에서 대덕은 그저 '근무지'이자 '거주지'일 뿐이다.

대덕기술사업화포럼에 참석했던 이장우 창조경제연구원장(경북대 교수)은 "대덕이 한국의 미래를 책임지느냐, 아니면 그저그런 고소득 월급쟁이의 성(城)이 되느냐가 곧 결정될 것"이라며 "창의성이 강조되는 창조경제는 과학기술과 정신·문화를 축으로 삼아 지역을 살리는 것이다. 출연연은 다른 기관이나 기업·지역과의 융합·협력·상생으로 과학기술에 기반한 창업과 지역 활성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욱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도 지난해 '대덕의 위기'를 주제로 열린 상상력포럼D에서 "대덕은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가 많이 사라진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손 교수는 "사람도 40세가 되면 위기와 기회를 맞는 시기가 되는데 대덕도 그럴 때가 됐다"며 "어떤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는가,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은 있는가, 조직문화는 어떠한가, 소통이 가능한 열린 토론의 장이 있는가 등의 질문을 구성원 스스로 던지고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문제는 수도권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구경북, 부산, 전북, 광주, 강원, 충북 등 전국에서 이미 R&D 클러스터를 조성했거나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R&D 집적화 단지를 만들고 있다. 막강한 물적·인적 파워와 서울과의 접근성을 무기로 한 수도권, 그리고 지자체의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지방. 지금 한국의 R&D역량은 '헤쳐모여'가 한창이다. 당연히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목표다.

그렇다면 지금 대덕은? 이제 따라가기도 버거운 '슬로우 팔로워(Slow Follower)'로 전락할 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수원 R&D 사이언스파크 조감도. 사업비만 무려 1조2000억원에 달한다. <사진=수원시청 제공>
수원 R&D 사이언스파크 조감도. 사업비만 무려 1조2000억원에 달한다. <사진=수원시청 제공>
 

지난해 불혹을 맞은 대덕연구개발특구 전경. 동력을 상실하면서 '패스트 팔로워'에서 '슬로우 팔로워'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사진=대덕넷 DB>
지난해 불혹을 맞은 대덕연구개발특구 전경. 동력을 상실하면서 '패스트 팔로워'에서 '슬로우 팔로워'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사진=대덕넷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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