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사이언스코리아 1부-③ 현상점검]협업 어렵고 내부끼리 경쟁
전략적 자원활용 실패…"출연연 위기극복 소통 활성화해야"

#사례 1. 정부 연구과제가 공고되면 연구소 내부에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인다. 과제 수탁을 따내기 위해 같은 직장동료끼리도 정보교류는커녕 보안유지에 혈안이다. 

#사례 2. A 출연연 박사는 신약개발 중 필요한 실험장비를 찾아 국내 대학과 기업체를 수소문했다. 과제 종료 후에야 연구소 내에 관련 장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씁쓸해 했다.

#사례 3. 대덕에 모인 출연연 연구원들은 자기 연구소 담장을 넘으면 이웃 연구소 어느 한 곳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 반면 대전정부청사 공무원들은 같은 출입증으로 세종청사 출입이 자유롭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의 대표적인 불통 사례들이다.

창조경제 시대 출연연은 안개의 숲 한가운데 있는 모양새다.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어디가 비상구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연구현장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소통이 필요할 때라고 입을 모으지만, 현실은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높고 종류도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양상이다.

40여년 전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할 당시부터 출연연을 모아놓고 다양한 시너지를 통해 세계적 성과를 창출하자고 주창했으나 여전히 불통의 벽이 높다. 이대로 연구자들이 각개전투를 벌이는 양상을 그대로 놔두는 한, 출연연에서 국가와 국민이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많다.

혼자면 인재, 뭉치면 둔재?협업 안되는 시스템

현장 전문가들은 출연연 연구원 개개인의 역량은 우수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이나 개별 연구팀의 벽을 넘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출연연의 각 연구팀은 하나의 독립된 회사와 같다. 개별 팀 단위로 성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팀을 넘어서는 협업이 어렵다. 괜히 손잡았다가 평가 불이익, 또는 인건비 문제 등이 불거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팀과의 협업을 꺼린다.

심지어 같은 연구소에서 정부 과제에 겹쳐 지원하는 사례도 공공연히 발생한다.

실제 예를 보자. 정부의 자동차 관련 센서개발 과제 공고에 A 출연연 P팀과 L팀이 각자 제안서를 제출했다. 평가위원들이 '두 팀이 협력해 함께 진행하면 더 유리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인건비 등이 얽혀있기 때문에 단독으로 진행해야 함은 물론 자기 팀이 선정돼야 하기에 상대팀과의 협력은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씁쓸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출연연 정책담당 부서에 근무하는 B박사는 "출연연 융복합 과제 도출을 위해 20여개 출연연이 모여서 과제를 발굴하는데 각 출연연들이 각자 상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더라. 결국에는 목소리 큰 연구소가 하자는 대로 결론이 났다"고 푸념했다.

출연연 C박사는 "출연연이 변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다. 스스로 변화가 없으면 개방화도 결코 이룰 수 없다""출연연 간 벽을 없애고, 소통과 개방이 필요함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 만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본지가 실시한 '세계 최고의 연구성과 어떻게 창조하나?' 긴급 설문조사에서 '세계적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3%가 연구문화(200명중 66)라고 답했다. 그 다음이 연구시스템 31%, 연구자의 역량 28% 순이었다.

연구자의 개인 역량도 중요하지만, 조직의 연구문화와 연구 시스템이 갖춰져야 좋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대변하는 설문 결과다.

출연연 시스템이 '세계 최고 기술' 남발?

"우리나라 정부 연구소들은 세계 최고, 세계 최초 기술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칭찬이 아닌 비아냥이다.

민간연구소장 출신의 K 벤처기업 대표는 "우리는 창조적 혁신을 얘기하지만 실상은 선진국 연구자들이 발표한 연구성과에 아주 조금의 목표를 더해 성과를 도출하고는 세계 최고, 세계 최초라는 수식을 붙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출연연 성과전시회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출연연이 무인주차시스템을 개발·전시 했지만 기술 시연회를 하던 중 오작동이 빈번했다. 더군다나 해당기술이 해외 뿐만 아니라 국내 자동차 업계에 이미 수년 전 개발된 기술이어서 시연회를 지켜본 참석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출연연 출신 벤처기업 L 대표는 "출연연 연구자들이 3, 5년 안에 무엇을 만들어내겠다고 정부나 기업에 늘상 그렇게 설명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과거 개발하던 것에 약간 개선 수준이고 별거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동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꼬집기도 했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연구아이템을 발굴하고 기획할 때 어디로부터 영감을 얻는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9%가 외국 연구사례 및 논문(200명중 98)이라고 답했다.

한 민간연 원장은 "출연연에서 세계적이면서 독창적 연구가 진행되려면, 기존 연구의 단순한 업그레이드 차원을 빨리 벗어버리고 정말 세계 1등을 위한 연구원들의 지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연연 H박사는 "출연연과 민간연의 가장 큰 차이는 위에서 목표를 정하고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라고 말했다. 현재 출연연의 상황은 정해지는 목표에 손·발이 달리는 게 아니라 각 독립적인 연구주체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향해 가긴 가는데 구심점이 없는 상태라는 지적이다. 방향성이 없다보니 자원이 전략적으로 집결되지 못하고, 성과가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출연연 기관장을 지낸 한 원로 과학자는 "출연연의 씽크탱크 역할은 결국 출연연 스스로 결과를 내야 한다""출연연의 정체성과 역할 제정립을 위해서 출연연 전 구성원들이 소통 활성화에 나서야 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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