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열전⑬]원자력 규제관리 1세대 한영성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천문학에서 원자력전문가로…자격증·학위 수료 등 끝없는 도전으로 전문성 키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엔지니어클럽'이 아이디어와 정보 교환의 장이 되길 바라며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키워드를 남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엔지니어클럽'이 아이디어와 정보 교환의 장이 되길 바라며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키워드를 남겼다.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技術人은 祖國近代化의 旗手  -1974年 대통령 박정희)

원자력 안전규제관리 1세대인 한영성 회장이 지난 2월 엔지니어클럽의 새로운 수장이 됐다. 한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친필휘호와 같은 엔지니어클럽을 만들기 위해 올 한해 다양한 정책을 만들 계획이다.

"조국 근대화의 주인공들이 다 모인 곳이 여기(엔지니어클럽)라는 키워드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겨주셨습니다. 기술인들이 외골수에서 벗어나 마음 터놓고, 아이디어와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장(場)이 되길 바라시고 이런 글을 남겨주신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전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천문기상학을 전공한 한 회장은 국립과학관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에서 일하며 해외 원자력안전정책을 국내에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훈련과정, 원자력기술사, 비엔나 대사관 과학관, 과기처 원자력국장, 실장·차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력만 보면 승승장구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초급 공무원시절 기술직이라 그런지 '행정센스'가 없다고 늘 꿀밤 맞기 일쑤였단다. 원자력 분야 업무를 담당할 때는 '천문쟁이가 무슨 원자력을 안다고'라는 비아냥을 받았던 가슴 아픈 기억도 있다.

이런 주변 인식이 오히려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해 보란듯이 학위를 이수했고, 원자력 기술전문가로 검증받을 수 있는 기술사 시험에 통과해 역량을 높였다.

순간순간 좌절보다 긍정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영성 회장 유년시절부터 현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시골 마을청년, 별에 호기심 갖다

한 회장은 경남 사천의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3남3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집 주변에 중학교가 없어 8Km를 걸어 통학했던 그에게 아침형 인간은 생활이었다. 어머니는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아들 아침밥은 꼭 챙겨주셨다.

농사 일을 도왔던 어머니는 그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설 전날 정성스럽게 마련한 쌀과 유과, 김 등을 손에 들려 절에 보냈다. 한 회장은 그 때마다 친구들과 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설 당일 새벽에 한 걸음에 달려와 차례를 드렸다. 절은 마을에서 3Km정도 떨어져 있었다.

"새벽 4시쯤 일어나 찬물에 세수를 하고 부처님께 예불을 올린 후 밖으로 나와 하늘을 봤죠. 아직도 사방은 깜깜한데 무의식적으로 올려다 본 하늘, 북두칠성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별들이 그렇게 신비롭고 선명할 수가 없었어요. 이맘때 호기심에 이끌린 별나라 산책이 천문학에 뜻을 두게 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경남 사천에서 초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 진학 시기가 됐다. '흙', '상록수' 등 당시 읽은 책에 영향을 받았는지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는 농대를 지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제 농민으로서 겪는 육체적 힘듦을 잘 알기에 어머니는 '좋다면 해야지만 힘이 많이 드는 것 같다'고 반대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는 천문기상학을 선택하기로 했다. 농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머니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골 소년의 서울생활이 시작됐다. 교과서나 사전 등에 이름이 올라있는 저명한 교수들과 같은 캠퍼스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의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에 아르바이트하랴 공부하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더구나 4.19혁명으로 대학에서는 학생운동이 한창이어서 기대만큼 공부도 열심히 하지 못했다.

아쉬움만 가득 남은 채 대학생활이 끝났다. ROTC 1기로 군복무를 필한 후 취직자리를 알아봤지만 오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다 재일교포 친척의 도움을 받아 개인사업을 운영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3년 만에 이마저 도산하면서 길바닥에 나앉을 운명에 놓이게 됐다.

◆ 대학지식 살려 공직의 길로 "과학기술 관심과 희망 느끼다"

가진 것은 대학에서의 짧은 지식밖에 없었던 그는 늦깎이로 어렵사리 공직의 길로 접어들었다. 첫 발령을 받은 곳은 당시 서울에 위치했던 '국립과학관'. 상설전시관이 처음 신설되는 등 과학관이 막 발전하는 시기에 기술직으로 입사한 그는 전시 계획이 결정되면 전시품을 설계·계량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중앙과학관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1972년 하나의 사건이 그의 생각을 180도 바꿔놨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관 방문이었다.

"1972년도 중앙과학관에 상설전시관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상설전시관 개관 날 아침 분위기가 삼엄하더라고요. 저는 준비하느라 너무 바빠서 왜 그런지 생각치도 못하고 있었는데 대통령 내외분이 직접 과학관에 오셨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방문에 이어 '전 국민의 과학화' 등에 힘입어 과학기술에도 길이 있겠구나 하고 새로운 관심과 희망을 느꼈습니다. 일을 재밌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거죠."

◆ 과기처 탄생, 원자력과 인연을 맺다

교육부 산하에 있던 과학관은 과학기술처가 생기면서 과기처 산하로 이관됐다. 당시 원자력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과기처 원자력과 공무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천문학을 전공한 그를 스카웃한다고 나섰다. 원자력과 천문학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자력의 구조와 태양계 구조는 서로 닮아 있어 한 회장은 대학시절 원자력 분야도 함께 공부했다.

원자력국으로 새롭게 발령난 직후 그는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USNRC)에 제1차로 1년간 파견됐다. USNRC에서는 원자력 관련 공정관리, 품질관리, 작업진행과정, 현장실습 등을 공부했다. 새로운 배움은 즐겁기도 했지만 한국인 대표라는 책임감과 기술 약소국이라는 무시를 견뎌야하는 설움도 있었다. 현장실습시간에는 조원들에게 고의로 외면당하는 수모도 견뎌야했다.

한국중공업 Turbine- generator 제작현장.
한국중공업 Turbine- generator 제작현장.
"원자력발전소 현장 실습시간이었습니다. 3인 1조로 미국인 2명과 팀이 되었는데 처음 들어가 보는 원자력발전소 크기와 시끄러운 소리에 압도당했어요. 그런데 미국인 친구들이 저에게 장난을 친다고 갑자기 사라진 겁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정말 많이 당황했죠. 2시간 같은 10여 분이 지나니 조원들이 나타나더군요. 그 이후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부를 더 꼼꼼하게 살폈던 것 같아요. 설계도면을 통해 보는 것과는 달리 정말 큰 실물을 보면서 규제관리를 하는 공무원들도 내부시설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운 친구들이죠.(웃음)"

어려웠던 영어와 기계·전기·전자·화공·물리·토목건축 등 종합기술인 원자력에 대한 지식을 쌓아 귀국한 그는 과기처 원자력국 핵연료 과장을 비롯해 부처 내 원자력과 5개를 돌며 원자력 인허가 업무를 담당하는 등 원자력계에서 일명 '통하는 사람'이 됐다.

대표적인 예로 원자력 관련 세계적 기업인 웨스팅하우스가 발뺌하려고 했던 핵연료손상 책임문제를 따져 시정과 사과를 받아낸 사례는 지금도 국내 원자력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그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까지 따라붙는 꼬리표가 있었다. 기술직인 그를 두고 '행정센스가 없다', '원자력(비전공)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등의 인식을 넘어서야만 했다. 어렵사리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마치고 꼬리표 하나는 떼어놓게 됐다.

다음은 '천문기상학과를 나온 주제에 원자력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하는 비아냥이었다. 기술직으로서 전문지식은 필수라고 생각한 그는 에너지(원자력)기술사 시험에 도전했다. 첫 번째는 고배를 마셨지만 두 번째는 통과해 동기 380여 명을 대표해 선서하는 영광을 안았다.  1970년대 들어 원전건설사업 인허가 및 검사업무 실무책임자의 역할이 주어졌고, 이어 비엔나 과학관으로 명을 받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유엔 공업개발기구(UNIDO)등 국제무대에서의 4년은 본인의 공무원 사(史)에 있어 꽃에 해당할 것입니다."

◆ "엔지니어클럽회원 자부심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활동 할 것"

지난 2월 19일 엔지니어클럽 회장 이·취임식을 시작으로 한영성 회장이 본격 업무에 돌입했다. 그는 당시 엔지니어클럽의 가장 큰 특징인 '한강의 기적 주역자 모임'이라는 점을 살려 창립 40주년(오는 10월 2일)을 맞아 기념잔치도 제대로 하고, 자랑스러운 회원들의 공을 발굴해 후세에게 알릴 수 있도록 책자 발간, 기록영상물 제작, 연구원(硏究院)을 만들어 활동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엔지니어클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유로 설립된 단체다. 한 회장은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는데 기술인들이 큰 역할을 했지만 그들은 자기분야만 파는 고집이 있었다"며 "기술인들이 다같이 마음을 터놓고 정보교환 할 수 있는 장이 되길 바랐기에 만들어진 곳이 엔지니어클럽이다. 그 전통을 어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한 회장은 "엔지니어클럽 기부금 감세, 연구원 설립, 조국 근대화 기수의 발자취를 기록에 남겨 후세들의 길라잡이가 되도록 하는 등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며 "엔지니어클럽회원으로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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