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과학 접목한 '조선과학실록'…역사적 사실 과학으로 재조명
오로라·흙비·장영실·거북선·조선의 타임캡슐 등 당시 사건 생생한 묘사
저자

일본의 수입기술 1순위로 꼽혔던 '제무자위'. '조선과학실록'은 역사적 고증을 살려 매 단락마다 삽화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사진=책 본문 중>
일본의 수입기술 1순위로 꼽혔던 '제무자위'. '조선과학실록'은 역사적 고증을 살려 매 단락마다 삽화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사진=책 본문 중>

역사는 지루하다. 지금도 기억한다. 학창시절 무조건 외워야만 했던 사건과 인물과 연도, 그리고 '태종태세문단세'로 기억하는 수많은 임금들.

역사가 재미있는 과목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교과서가 아니라 서점에서 교양역사서를 만나면서 알게 됐다. 그제야 눈치 챈 것이다. 역사는 스토리를 잇는 대서사라는 사실을. 이름도 모르고, 일면식도 없는 먼 옛날 조상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묻기만 했다. '그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죠?'

과학은 어렵다. '글 쓰면 밥벌이는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철부지 문과생에게 과학은 암기과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딱 한 번으로 기억한다. 고교시절 지구과학(그나마 대학시험에 나오지 않는 과목이라 외울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이 우주의 크기를 설명하다 말고 "결국 과학은 철학이 된다"고 혼잣말처럼 얘기하던 순간을.

그것은 아무리 쉽게 얘기해도 외우려고만 하지 도무지 '느끼지' 못하는 어린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토로이자 넋두리였다. 과학은 그냥 암기과목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때 처음 막연히 느꼈다. 이후에도 '과학은 철학'이라는 그 선생님의 얘기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여전히 과학은, 어렵다.

이런 '트라우마' 때문일까. 재미있는 사건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역사서를 만나면 반갑다. 일상에서 접하는 과학을 역시 생활의 상식으로 풀어낸 과학서도 그렇다. 마찬가지 이유로 EBS에서 발간하는 '역사ⓔ' 시리즈가 꾸준히 읽히고,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고, 최근 들어 정도전과 관련된 책(정도전을 위한 변명, 정도전과 그의 시대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 과학 교양서는 꽤 오래 전부터 이미 영화나 역사, 철학, 미술, 그리고 인문학과 같은 다른 장르와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최근 출간된 '조선과학실록(이성규 지음·맞닿음 刊)'은 역사와 과학의 만남을 주선한다. 역사는 지루하고 과학은 어렵지만, 역사와 과학이 만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목차부터 흥미롭다. 조선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빛 기운' 오로라, 530여 년간 계속된 조선 최대의 공사, 율도의 뽕나무밭 살인사건, 부엉이 바위와 비운의 임금 단종, 세종은 왜 장영실을 버렸나, 유구국 물소들의 최후, 거북선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보존된 조선의 타임캡슐…. 과학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에 숨어있는 난해하고 복잡한 과학이야기를 마치 사건현장의 목격자처럼 생생하게 들려준다.

'조선과학실록' 책 표지(왼쪽)과 본문에 실린 삽화.
'조선과학실록' 책 표지(왼쪽)과 본문에 실린 삽화.

'인조실록' 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밤에 기운과 같은 흰 구름 한 줄기가 동쪽에서 일어나 곧바로 서북방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하늘 끝까지 닿았다. 남서쪽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1625년 11월 14일)", "밤 1경에 기운과 같은 흰 구름 한 가닥이 서북방에서 일어나 남쪽을 향해 퍼져갔다. 4경에 같은 검은 구름 한 가닥이 서방에서 일어나 곧바로 동남쪽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하늘에 잇닿았다. (1626년 4월 3일)"

다름 아닌 오로라였다. 지금은 우리 하늘에서 볼 수 없는 오로라가 조선시대에는 볼 수 있었다고? '조선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빛 기운, 오로라' 편을 보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저자는 과학적 논증으로 이같은 의문을 풀어준다.

조선시대에 오로라가 목격된 이유는 자북극이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50년 후에는 자북극이 시베리아 지역에 위치할 수도 있다. 당시에는 자북극이 지금보다 훨씬 한반도와 가까웠다. 그로 인해 지금은 목격되지 않는 오로라가 그 때에는 자주 관측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오로라를 알 리 만무하다. 그래서 당시에는 오로라의 출현을 임금에게 내리는 하늘의 경고라고 보았다. 하늘에서 오로라가 관측되면 임금이 두려워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잇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황사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고, 흙비도 내렸던 모양이다. '흙비가 빚어낸 조선 최고의 간신' 편을 보면 자주 그런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때에는 흙으로 된 비가 내린다고 해서 '토우(土雨)', 또는 새까맣게 된다고 해서 '먹비'라고도 불렀다. 실제 1406년 2월 9일에는 "함경도 동북면 단주에 흙비가 내리기를 무릇 14일 동안이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451년 6월 22일에는 여름인데도 흙비가 열흘 동안 내려 배나무 잎이 다 떨어지는 등의 피해를 보았다. 1733년 3월 8일에는 하늘이 캄캄하게 흙비가 내렸는데 마치 "티끌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황사가 국정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성종 때 일어난 '흙비 사건'이 대표적이다. 1478년 4월 초하루 흙비가 내리자 성종은 이것을 하늘의 꾸짖음이라 보고, 의정부에 명을 내려 공개토론을 열었다. 이틀 후 성균관에서 영의정 이하 대신들을 비롯해 모두 2800명이 모여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몇몇 참가자가 금주령을 내리고 정자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잔치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갑론을박 끝에 이 제안이 받아들여진다.

물론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조치는 아니었지만, 황사나 흙비피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적절한 조치였다. 지금도 심한 황사가 발생하면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 활동을 자제하는 게 좋다고 권고하지 않는가.

이처럼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과학적 사건'을 꺼내와 역사와 과학의 교차점을 찾는다. 때로는 역사의 관점에서, 또 때로는 과학의 관점에서.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비엔나커피'에 비유한다.

저자 이성규.
저자 이성규.
"융합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 중 하나로 흔히 '비엔나커피'를 예로 들곤 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만나 새로운 상품을 탄생시켰다는 의미에서다. '조선왕조실록'이 뜨거운 커피라면 과학은 차가운 아이스크림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조선왕조실록이었을까?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정치 및 사회, 경제는 몰론 농업, 광업, 수산업, 도량형, 교통, 건설, 공업 , 보건, 의약, 예술, 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역사들이 비빔밥처럼 섞인 조선의 대백과사전"이라며 "그 중에서 과학과 관련된 역사들을 뽑아내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 입장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종 간 결합, 즉 '컨버전스(convergence)'가 화두인 시대다. 융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계가 맞닿거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어떤 시인이 말했다던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책도 예외는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속에서 갓 뽑아낸 비엔나커피와 같다. 역사와 과학을 비엔나커피처럼 가볍게 한 잔 마실 수 있다니, 돈도 시간도 그리 아깝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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