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진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의 '축구공 위의 수학자'

'축구공 위의 수학자' 1996년 초판 표지.
'축구공 위의 수학자' 1996년 초판 표지.

이 세상의 책은 크게 세 종류라고 믿는다. 빌린 책, 산 책, 훔친 책. 소설가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 '버린 책'은 분명 '훔친 책'의 메타포일 게다. '금지를 금지하라'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는 작가지만 훔쳐서 읽은 책을 자랑하기에는 아무래도 '거시기'하여 그렇게 제목을 달았을 터. 따지고 보면 훔친 책은 버려도 되는 책 아니던가.

책의 종류를 좀 더 미시적으로 분류한다면 '산 책, 그리고 또 산 책'이 아닐까 싶다. 구입한 책을 두 세 번 읽는 것이야 애호가들의 흔한 독서법이지만 같은 책을 또 사서 읽은 경우는 많지 않다. 정말 뜻깊게, 감명깊게 읽은 책이더라도, 설사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 개정판이 나오더라도 같은 책을 또 사서 읽는 행위는 의외로 용기가 필요하다. 돈 문제가 아니다.

가끔, 아주 드물게 그런 책이 있다. '축구공 위의 수학자(문학동네 刊)'도 그 중 하나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996년. 첫 직장으로 발을 내딛은 신문사 생활은 다이나믹 했으나 마음은 늘 허전했다. 그때는 그것이 현실에 대한 불만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던 것 같다. 불만이었든 불안이었든 갈증을 채우려 책을 찾았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책이 강석진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가 쓴 바로 이 책(초판은 석필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이다.

나름 '못하는 운동이 없다'고 자처하던 때인지라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축구공 위의 수학자라…. 축구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책인가? 수학을 축구로 해석한 책인가? 어찌됐든 축구와 수학이라니.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는 단어들이 생소했던(아예 없었던) 시절, 책 제목부터가 흥미로웠다.

1996년 초판(왼쪽)과 2002년 개정판.
1996년 초판(왼쪽)과 2002년 개정판.

그 많은 서점의 신간중에 눈길을 끈 것은 제목이었지만, 책을 펴들게 한 것은 앞표지의 저자 발문이었다.

"예일대학교 캠퍼스 안의 요크사이드 피자하우스. 밤늦게 생맥주잔을 기울이던 자리. '왜 이 어려운 수학 공부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을까?' 다들 한순간 우울해졌다. 그때 가장 친한 친구 프레드 워너가 입을 열었다. '어렵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도전의 어려움은 우리 인생을 그만큼 아름답게 한다."

그리고 뒷표지의 저자(본인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소개는 결국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게 했다. "강석진. 34살.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 A-C-A-C 학점형 인간이어서 아내를 비롯한 B-B-B-B 학점형 인간을 가끔은 지루하게 여김. 여자 프로 농구를 살리겠다고 최근에 수학과 선배 교수와 함께 '오빠부대'를 결성하였음. 스포츠의 세계는 그 깔끔한 아름다움이 수(數)의 세계와 통한다는 믿음으로 평생을 두 과목 복수 전공할 예정임."

"내 인생은 축구공 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운동권(?) 교수였다"는 그의 고백처럼 그는 수학자라기보다 운동선수, 아니 스포츠 광팬이다. 신동파, 이회택, 차범근, 펠레, 조 루이스, 막스 슈멜링, 레이 레너드, 김태식, 홍수환, 황영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스포츠 스타 얘기들이 빼곡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는 농구천재 허재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첫 페이지를 펴든지 이틀도 안돼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6년이 흐른 2002년 출판사를 바꿔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추호의 망설임 없이 이 책을 또 샀다.        

저자가 바라보는 스포츠와 수학의 '공통분모'는 도전정신과 자신감이다. 그는 필즈상 수상자인 스티븐 스메일 캘리포니아대 교수의 말을 인용한다. "재능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운동선수나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공리가 같으므로 이 말은 바로 바로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태도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한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한 훈련,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감독으로 있는 자연대 축구부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강조한다고. "축구 못하는 놈치고 공부 잘하는 놈 못 봤다!"

책 표지 뒤에 실린 수학공식.
책 표지 뒤에 실린 수학공식.

수학자인 저자를 가장 매료시킨 인물은 허재였다. 그는 허재를 단순히 기량이 매우 뛰어났던 한 명의 운동선수로 보지 않고 한 명의 '천재'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방정식'으로 해석한다.

연세대와 고려대, 그리고 현대와 삼성이 농구판을 좌우하던 시절, 중앙대 출신이자 기아에서 활약한 '비주류' 선수가 농구계를 평정한 성공신화, 그리고 끊임없는 돌출행동으로 주류문화와 권위문화에 반항(저항)하다 겪게되는 고난사, 결국은 오로지 자신의 실력과 승부근성 만으로 이러한 편견과 난관을 극복하고 당당히 스포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 인생역정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자는 허재를 통해 수학자, 혹은 과학자의 삶을 얘기하고 싶었을 지 모르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구석진 실험실(혹은 연구실)에서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밤을 새는 고독한 연구자. 오로지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의 실력과 도전정신 뿐이다. 아무리 큰 연구성과가 나오더라도 주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겪는 고통, 그리고 실력 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적 통념에 휘둘려야 하는 힘없는 연구자의 서러움. 그래서 저자는 무엇보다 '스포츠맨십'을 강조한다. 그 스포츠맨십은 경기장 뿐만 아니라 연구실, 대학, 우리 사회 전체를 건전하게 이끄는 '최대공약수', 혹은 '최소공배수'이기 때문이다.

책을 관통하는 것은 '도전 정신'이다. 전 세계 천재들이 매달려도 끝내 풀지 못한 수학공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재성과 실력 만으로 안된다는 사실을 저자는 경험적으로 안다. 그래서 운동선수와 수학자의 가장 유사한 DNA를 찾는다면 바로 '도전 정신'일지도 모르겠다. 승자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냉철한 스포츠의 세계를 통해, 불굴의 투혼으로 승리를 거둔 운동선수를 통해, 저자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이렇다.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도전한 목표를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은 더욱 강렬할 것이다. 우리의 손이 전혀 닿을 것 같지 않은 까마득한 곳에 위치한 목표를 바라보며 우리는 절망하고 무력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이루려는 목표가 너무 어렵다고 미리 좌절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맹렬한 투지와 헌신으로 도전할 때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수학자가 아니더라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학공식과 같은 난관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있다. 답은 분명 '0'이나 '1'처럼 더 없이 간단할텐데 문제의 미로에 갇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럴 때 한 번 쯤 읽으면 더 없이 좋을 책이다. 답은 끝내 보이지 않더라도 잘하면 정답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정판이 나온 지 10년도 더 된 책을 다시 책장에서 꺼내본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수학 만큼이나 운동을 사랑했던 '운동권 교수'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강 교수는 '축구공 위의 수학자'에 이어 '수학자 위의 축구공', '아빠와 함께 수학을', '수학의 유혹' 등을 펴냈다. 1999년 젊은과학자상, 2006년 한국과학상, 2009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도 수상했다. 그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며 웃고 있을 것이다. "축구 못하는 놈 치고 공부 잘하는 놈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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