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아직 남은 가을 빛을 붙들고 있는 나에게 이제 그만 가을을 놓아주라고 초겨울 찬바람이 분다.
아직 남은 가을 빛을 붙들고 있는 나에게 이제 그만 가을을 놓아주라고 초겨울 찬바람이 분다.

12월로 접어들면서 시간은 가속도를 붙여 빠르게 지나간다. 아직 남은 가을 빛을 붙들고 있는 나에게 이제 그만 가을을 놓아주라고 초겨울 찬바람이 분다. 12월에 내리는 겨울비는 어쩌면 가을의 눈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서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 달리는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 아내와 함께 TV에서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떠 올린다.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회사 중역 출신의 스나다 도모아키는 건강검진 결과 말기암 판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 통보 앞에서도 성실하고도 꼼꼼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자신만의 '엔딩 노트(ending note)'를 준비한다. 바로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이다. 아버지가 위암 말기 판정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자 영화 감독인 그의 막내딸 스나다 마미가 죽음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엔딩 노트를 직접 카메라에 담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12월에 내리는 겨울비는 어쩌면 가을의 눈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2월에 내리는 겨울비는 어쩌면 가을의 눈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 영업부 중역으로 퇴직한 주인공 스나다 도모아키는 그동안 많은 프로젝트를 기획해 온 사람답게 죽음을 준비하는 일생일대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엔딩 노트를 만든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을 치밀하게 준비하며 장례식장까지 직접 답사를 하고, 부고장이며 초대할 사람 명단까지도 일일이 점검을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여유와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컴퓨터에 정리한 후 백업까지 받아 놓은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의 명단을 아들에게 넘겨주며 그는 "장례식 도중에 잘 모르겠으면 나한테 전화해"라고 농담을 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먼저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제가 세상을 뜰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가장 걸리는 건 가족이죠." 그는 소홀했던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힘들지만 마지막 가족여행을 떠난다.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 달리는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 TV에서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떠 올린다.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 달리는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 TV에서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떠 올린다.

그의 바쁜 직장생활로 소원했던 아내에게 쑥스럽지만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내가 "같이 가고 싶어.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줄 너무 늦게 알았어. 더 많이 사랑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라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노트에 "같이 살아줘 고맙다"고 기록한다.

방학 때 미국에서 놀러 온 손녀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아픈 몸이지만 머슴 노릇을 하며 최선을 다해 놀아주던 그였지만, 봄에 다시 오기로 한 손녀들을 기다리기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였다. 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안 가족들이 모이고 행복한 옛 추억을 담은 비디오를 보며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되살린다.

장례차가 가족 곁을 지날 때 그가 손녀들에게 말한다. "할아버지 앞에 너희들이 나타나줘 정말 행복하단다. 하늘의 별이 돼 너희들 크는 걸 지켜볼게…."
장례차가 가족 곁을 지날 때 그가 손녀들에게 말한다. "할아버지 앞에 너희들이 나타나줘 정말 행복하단다. 하늘의 별이 돼 너희들 크는 걸 지켜볼게…."

미국에서 급하게 온 손녀들은 "할아버지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하늘나라에 가시게 됐지만 할아버지랑 굉장히 즐거웠어요"하며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도록 돕는다. 그는 손녀들에게 연신 "고맙다. 감격스럽다! 할아버지 감격! 만나서 감격!"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려 기쁨을 표시한다. 그에게 있어 손녀들은 가장 큰 기쁨이며 가장 확실하게 생동하는 삶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그는 죽기 하루 전날 그가 상상했던 오르간 음악이 울려 퍼지는 장엄한 성당 대신 병실에서, 그것도 사제 대신 막내딸에게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부인과 세 자녀, 큰 아들의 세 아이까지 가족 모두가 모인 방 창가에 비치는 햇살 속에서 "이렇게 웃고 있으니까 여기가 천국 같다. 정말 그러네"하고 말한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 할 시간이다. 가을도 떠나 보내고 겨울에 충실하게 살 시간이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 할 시간이다. 가을도 떠나 보내고 겨울에 충실하게 살 시간이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영화는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대신 어둑어둑해지는 도시 하늘로 한 마리 새가 훨훨 날아 사라진다. 영화는 죽음이 축복이자 은총임을 말한다. 장례차가 가족 곁을 지날 때 그가 손녀들에게 말한다.

"할아버지 앞에 너희들이 나타나줘 정말 행복하단다. 하늘의 별이 돼 너희들 크는 걸 지켜볼게…."

 '나도 저렇게 담담하게 그 순간을 준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눈시울이 젖는 순간이었다. 외손녀를 돌보고 있는 나의 아내와 나에게는 손녀에 대한 그의 마음이 너무도 절실하게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던 가을은 빛이 바래며 저물었고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이 흰 눈을 뿌리며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생각을 정리하고 12월의 기도를 드릴 때이다.
화려하던 가을은 빛이 바래며 저물었고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이 흰 눈을 뿌리며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생각을 정리하고 12월의 기도를 드릴 때이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 할 시간이다. 가을도 떠나 보내고 겨울에 충실하게 살 시간이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생을 마감하는 도모아키씨처럼 한 해를 무사히 살아오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차분히 한 해를 마감하는 엔딩 노트를 작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화려하던 가을은 빛이 바래며 저물었고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이 흰 눈을 뿌리며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생각을 정리하고 12월의 기도를 드릴 때이다.

12월의 기도/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재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 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 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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