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 계룡산의 뾰족뾰족한 닭벼슬 모양 봉우리 아래로 산이 흘러 내려와 만난 논에는 추수가 끝나고 볏짚을 말아 만든 커다란 마시멜로가 먹음직스럽게 놓여있고, 그 위로 산을 막 넘어 떠오른 아침 햇살이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 ⓒ2013 HelloDD.com

가을의 깊이가 깊어가는 듯 하더니 어느새 초겨울로 접어들고 말았다. 요 며칠 사이 최저 기온은 영하권을 맴돌고 우리 동네에는 첫 눈도 내렸다. 아름답던 가을 잎들도 이미 낙엽이 되어 버렸거나 화려하던 가을 빛을 잃고 갈색의 화석처럼 변해버렸다. 하지만 숲 속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가을 빛을 간직한 나무들이 간간이 보이고 있어 나는 아직은 초겨울이 아니라 늦가을이라고 우기기로 한다.

물론 내가 우긴다고 가는 계절이 내 곁에 머무는 것은 아니지만 가을을 보내고 나면 겨울의 찬바람 속에 바로 한 해가 지나가 버렸던 지난날들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아직 가을이 아름답게 머무르고 있던 상신리의 가을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상신리는 가까운 계룡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대전에서 공주 쪽으로 가면서 동학사 입구인 박정자를 지나 조금 더 가다 보면 왼편으로 계룡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한적한 길이 나타난다.

 

▲ 산 밑 마을로 가는 논 사이의 굽어진 마을 길 위에도 가을 아침 햇살은 정겹게 비치고 있었다. ⓒ2013 HelloDD.com

길을 따라 조금 가면 오른편에 하신리라는 마을이 있고 그 길을 따라 더 가면 작은 마을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찻길은 끝나고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로 이어지게 된다. 근처에는 도예가들의 공방이 있는 도예마을이 조성되어 있어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찾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여름 대전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막 새로 포장된 2차선 도로를 따라 상신리까지 가는 길은 한적하고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이어서 가족과 함께 주말이면 가끔씩 찾아가곤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마치 우리만을 위한 드라이브 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감나무에는 아직 붉게 익은 감들이 남아 있어 넉넉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2013 HelloDD.com

봄이면 중간에 차를 세우고 논둑에서 쑥이며 돌미나리를 뜯거나 작은 개천에서 다슬기를 잡기도 했다. 나는 아내에게 계룡산 줄기가 바라보이는 하신리에 집을 하나 사서 개조하면 퇴직 후 살기 참 좋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하였었는데, 실행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말하던 곳에 멋진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어 정말 그 때 투자를 해 두었으면 참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방면에는 별로 소질이 없으니 이 곳을 가끔 찾아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 작은 농가 옆에 있는 감나무에는 다닥다닥 감이 열려 가을빛으로 물든 계룡산을 바라보며 달콤한 홍시로 익어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2013 HelloDD.com

그동안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상신리로 가는 길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아 참 좋다. 계룡산의 뾰족뾰족한 닭벼슬 모양 봉우리 아래로 산이 흘러 내려와 만난 논에는 추수가 끝나고 볏짚을 말아 만든 커다란 마시멜로가 먹음직스럽게 놓여있고, 그 위로 산을 막 넘어 떠오른 아침 햇살이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

산 밑 마을로 가는 논 사이의 굽어진 마을 길 위에도 가을 아침 햇살은 정겹게 비치고 있었다.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감나무에는 아직 붉게 익은 감들이 남아 있어 넉넉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작은 농가 옆에 있는 감나무에는 다닥다닥 감이 열려 가을빛으로 물든 계룡산을 바라보며 달콤한 홍시로 익어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 막 계룡산의 계곡에서 벗어나 자그마한 개천을 이루기 시작한 하신천도 가을 빛으로 물들었다. ⓒ2013 HelloDD.com

감나무를 지나 조금 가다 보면 막 계룡산의 계곡에서 벗어나 자그마한 개천을 이루기 시작한 하신천도 가을 빛으로 물들고 가을 빛 물줄기를 따라 낙엽과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마을 입구 물가에 서 있는 오래된 물푸레나무는 나무가 겪어온 세월만큼이나 넉넉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상신리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소박하고 정겨운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이제 가을이 떠나가고 있다. 가을이 아름답게 머물러 있던 사진 속의 상신리에서도 지금은 아마 가을의 흔적들이 하나 둘 지워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가을은 꽃과 나무들의 씨앗과 겨울눈 속에 응축되어 겨울이 지나면 봄의 모습으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그때 다시 그 곳을 찾아가 이 가을의 화려한 부활을 사진에 담고 싶다.

 

▲ 그곳에서는 가을 빛 물줄기를 따라 낙엽과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2013 HelloDD.com

꽃씨 - 문병란

가을날
빈 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 마을 입구 물가에 서 있는 오래된 물푸레나무는 나무가 겪어온 세월만큼이나 넉넉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제 가을이 떠나가고 있다. 하지만 가을은 꽃과 나무들의 씨앗과 겨울눈 속에 응축되어 겨울이 지나면 봄의 모습으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나는 그때 다시 그 곳을 찾아가 이 가을의 화려한 부활을 사진에 담고 싶다. ⓒ2013 HelloDD.com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