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울에서 아침을 맞다.

(화개장터~평사리)

화개장터부터 섬진강은 그 하얀 속살을 드러내 놓기 시작한다.
섬진강이 섬진강다운 것은 그 속에 곱디고운 은모래가
섬진강의 속살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섬진강에서 모래톱을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곳은
남원 대강면 향가마을 향가유원지였다.
어린아이 궁둥이 정도 될까 할 정도로 작은 이 모래톱은
섬진강이 그 가녀다란 허리를 살짝 돌아설 때 여름 햇빛에 빛났었다.

그 뒤로 섬진강은 좀처럼 그의 속살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이제 화개장터에서 옥화의 헤푼 웃음과 팔도인생을 만난 후
가식 없는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세상에 보여주기 시작했다.

남도대교 아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은어천국이다.
회귀어인 은어는 이곳 남도대교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낸다.

보리이삭이 만삭되어 배가 불룩해 올 즈음에
은어는 보리향기를 맡으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남도대교에서 그 천진난만한 세월을 보낸다.

 

구례 간전면과 광양 다압면, 하동 화개면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면
구례와는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다.  

그 질펀한 들판, 노고단의 그 너른 가슴, 길지중의 길지 사성암,
사람 사는 냄새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운조루,
내가 희생해야 타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석주관성의 칠의사....
모두들 나에게는 스승이었다.  

지금까지 천 번 만 번을 지났었지만
피상적으로 지나다닐 때에는 깨달을 수 없었던 구례의 정신을
섬진강을 걷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
섬진강이 내게 스승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남도대교 바로 아랫동네 영당마을을 지나 중기, 신기 그리고 검두마을에 접어든다.
강 건너 전라도는 구례 하천마을을 지나 광양 금천, 죽천으로 이어진다. 

한번 씩 강을 건너 광양 다압면에서 하동을 바라보면
일찍이 내가 본 하동이 아닌 듯 생소 해 보인다.
광양사람이 하동에 와서 보는 광양의 모습 또한 같으리라.
강 건너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이 진짜 나의 본 얼굴인 것이다. 

이처럼 광양과 하동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없고
오로지 너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네가 본 나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다."
"떠나 있어야 나를 알 수 있다"

강 건너 금천마을에 잔치가 생기면 바로 검두마을은 괜히 마음이 들뜬다.

검두마을에 초상이 나면 금천마을은 내일처럼 슬퍼한다.
마을이장들이 아침마다 마을 앰프를 통해서 알리는 소리들을
강 건너 검두와 금천은 내 동네처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쪽과 저쪽은 사돈이 많다.

형제봉과 백운산이 강을 사이에 두고 형제처럼 서 있다.
화개 쪽 산자락은 녹차군락지다.
사시사철 푸른 녹차 잎을 통해서 차향을 느낄 수 있다. 

강 건너 광양 다압은 우리나라 최고의 매실산지다.
봄의 전령사 매화가 필 때면 꽃 반 사람반이다.
4월의 섬진강은 꽃동네 새 동네를 연출하고 5월은 다향 가득 산자락이 향기롭다.

 

이제 섬진강은 남해바다로 귀향을 위한 마무리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팔십 리 길 하동포구만 통과하면 종착점인 노량이다. 

이제 그의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할 시점이다.
상처 난 몸도 치유를 받아야 한다.
온갖 잡음으로부터 씻음도 받아야 한다. 

귀향을 앞두고 그의 몸과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 선택한 곳은
화개면과 악양면의 경계인 검두마을 제방 앞 <마지막 여울>이다.

아직 새벽미명, 구제봉으로 해가 솟아오르려면 반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공기는 겨울처럼 싸늘하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섬진강에는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검두마을 앞에서 섬진강은 크게 또 한 번 휘감아 돌고
강 한가운데는 거대한 모래섬이 형성되어 있다. 

그 주변에는 강물이 모래와 자갈로 얕아져 여울을 만들었다.
여울위에서 가느다란 수증기가 올라온다.
강물이 밤새도록 모래와 자갈에 몸을 비볐기 때문에 생겨난 열기가 아닐까?
이별을 앞두고 서로 밤새 뜨거운 사랑의 밀어라도 나누었으리라!

<마지막 여울>에서 나는 소리는 마치 옥소리 같다.

 

▲ 조문환

이윽고 구제봉위로 태양이 떠오를 전조다.
하늘이 붉어지더니 이내 태양이 올라와 형제봉에 쏘아 붙이고
반사된 그 빛이 사선으로 섬진강에 내려꽂힌다.
마치 무대연극을 위해 강력한 조명이 내리 쪼이는 것처럼 ... 

섬진강물도 따라서 붉어진다.
평사리에서 시작된 홍조가 외둔삼거리를 거쳐 곧장 검두 제방아래
마지막 여울목으로 도미노처럼 점령해 온다.  

이 순간의 시간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의 느린 동영상처럼
세밀하고 명확하다.
태양에 비치는 여울은 그 잔물결이 마치 비늘처럼, 새털처럼 가벼워
하늘로 날아 갈 것 같다.  

마지막 여울에서 한껏 몸을 낮춘 섬진강,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오로지 어머니 품과 같은 바다로의 귀향을 꿈꾼다.
이런 다짐을 하면서....

인생 여정 마치는 날 까지
정결한 몸으로,
나를 낮추며,
타인의 목소에 귀 기울이리

비록 차가운 밤을 지날 지라도 물위에 수증기 피워 올리듯이
내게 주어진 삶을 뜨겁게 태우리.....

[출처] 섬진강 에세이 (94)|작성자 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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