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암을 스쳐지나온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구례장을 지나면서 그의 마지막 변곡점에 도달한다.

섬진강, 노고단에 잠들다!

(사성암~노고단)

사성암을 스쳐지나온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구례장을 지나면서 그의 마지막 변곡점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남해바다까지는 화살이 날아가듯 북에서 남으로 내달릴 것이다.

그동안 강은 무던히도 휘감아 돌았다.
인생의 굽이처럼 그 또한 그의 숱한 고비들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강을 보면 사람의 일생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모른다.
엄마의 자궁과 같은 작은 웅덩이에서 태어나 계곡물이 되어 흐르다가
그와 꼭 빼 닮은 친구들을 합하고, 시내를 이루어 급격한 성장을 이룬다.

산을 만나고, 들을 만나고, 마을을 만나면서
강은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또 동에서 서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휘감아 돌았다. 

때로는 낭떠러지에 몸을 맡겨야 했고 칼처럼 생긴 바위틈을 헤쳐 지나야 했으며
호수에 잠겨 쉼을 얻는 듯하다가 이름 모를 곳으로 볼모로 잡혀가기도 했었고
더러는 인간의 이기성에 의해 좁디좁은 회랑을 지나
나락과 같은 강바닥으로 떨어져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렸었다.  

그 과정에서 성장통과도 같은 세월을 지나 강은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이제 저 멀리 그의 인생종착점을 바라보게 되었다.
노고단은 그의 인생 종착지를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 조문환

섬진강은 노령산맥의 중심부인 진안고원 유역에서 발원한다.
팔공산에서 탄생한 섬진강은 아마도 인근의 운장산, 마이산, 내장산
그리고 대둔산과 같은 주봉들의 응원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소백산맥에 인계된 섬진강은 형제봉, 덕유산, 천왕봉과 노고단
그리고 소백산맥의 끝점인 백운산의 정기를 이어 받아 장성한 강이 되었을 것이다.  

노고단은 바로 소백산맥의 화룡정점이 아닐까?
여기서 북쪽과 서쪽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겹겹이 쌓인 능선뿐이고
이들은 마치 잔잔한 파도가 되어 끝없이 밀려오기를 반복한다. 

노고단은 산이 아니다. 언덕배기고 능선이다.
오르다 보면 작은 뒷동산에 오르는 듯 가볍다.
구례장에서 노고단을 바라보면 꼭 쥘부채를 펴 놓은 듯 편안하다.
광한루에서 화개장터까지 시원한 바람을 부쳐주는 듯하다. 

성삼재에서 올라가는 길은 유람을 하는 듯 즐겁다.
두 살배기 아이로부터 팔순에 이르는 어르신들까지
웃음 한 바가지 얼굴에 가득 담고 내려오는 모습이 너무나 정겹고
스쳐지나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꼭 참새들의 지저귐 같이 흥겹다. 

이처럼 노고단은 쉬운 산이다.
어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한 숨에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굳이 산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런 뜻에서 노고단이라고 이름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노고단 봉우리는 일종의 평지다.
홀로 솟은 곳이 없으며 꺾인 곳도 없다.
그냥 드러누우면 나를 착 받아줄 것 같은 편안함이 몰려온다. 

빨래를 하고 막 풀 먹여 바스락 소리가 나는 새 이불을 깔아 놓은 듯
그 위에 나를 던지고 싶어진다.
그래서 노고단은 오른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안긴다는 말을 더 쓰고 싶다. 

노고단에서는 산을 정복했음에 외치는 환호성이 없는 곳이다.
그 흔하디흔한 야호! 한번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만 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첩첩히 쌓아놓은 능선을 바라볼 뿐이다.
그 속에서 틈사이로 흐르는 강의 흐름을 관조할 뿐이다.
팔을 뻗으면 바로 내 손안에 들어올 것 같은 천왕봉을 응시할 뿐이다. 

태양에 반사되어 눈부신 강물을 즐길 뿐이다.
피아골을 지나 화개장터, 평사리 백사장의 눈부신 모래결을 만질 뿐이고
두 손으로 남해바다 물이라도 퍼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함에 잠길 뿐이다.

 

이윽고 태양이 서쪽하늘 구름 속에 갇혀버렸다.
아마도 무등산에 걸린 구름이리라. 

무등산이 태양을 붙잡았는지 아니면 구름위에 걸터앉았는지
이날 태양은 쉽사리 넘어가지 못했다.
덕분에 섬진강도 쉽게 어둠에 잠기지 않았다.
더 오랫동안 태양이 내려앉는 섬진강을 볼 수 있었다. 

노고단, 네가 있음에 여기까지 왔었다.
너는 나의 바램이다.
나의 응원이다.
나의 가슴이다.
네가 있음으로 나의 가슴은 뛰었다. 

천 겹 만 겹 첩첩히 겹쳐져 누군가의 의지가 되었던 능선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의지가 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가슴을 뛰게 한 너처럼,
나 또한 흐르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가슴이 뛰게 해 주어야 한다.

저 바다에 이를 때 까지...

 

노고단 일몰은 또 하나의 천지창조다.
구름의 이글거림,
천 겹 만 겹 겹쳐 놓은 듯 산들이 겹겹이 서 있고
봉우리들과 능선들이 춤추듯 넘실거린다. 

쏘아놓은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과녁에 꽂히듯,
무등산을 넘어가는 마지막 햇빛이 천왕봉에 꽂히자
태양은 바다가 아닌 섬진강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제 노을을 요로 삼고 노고단 바람을 이불삼아 그 편안한 쉼을 얻을 차례다. 
구례장에서 잘록한 허리를 드러낸 섬진강은 어두워질수록 더 선명해 졌다.
세상은 먹물처럼 짙어지지만 강은 더 빛났다. 

한 편의 오페라처럼 모든 조명이 주인공인 섬진강에 초점을 맞춘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엑스트라다.
오로지 섬진강만이 프리마돈나가 된다.
이 순간만큼은 새들도, 바람도, 구례구역을 달리는 기차소리도 멈춘다. 

구례장을 돌아서는 그 모퉁이에서 태양이 강으로 내려앉으면
이제 섬진강은 주름치마 펴 놓은 노고단으로 안길차례다.

섬진강이여! 노고단에서 편히 쉬어라!

 

[출처] 섬진강 에세이 (90)|작성자 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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