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말을 나는 명제라고 믿는다.


고향이 그리울 땐 돌아오라 섬진강으로! ‘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말을 나는 명제라고 믿는다.

제 아무리 미사여구를 섞어 미화하거나 사람을 홀릴 말을 썼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의 글 속에는 그 사람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은 그 사람의 인생발자국이요 결국은 바로 그 사람인 셈이다.
글 속에는 그의 인생노정, 그의 됨됨, 그가 살아왔던 모든 환경,
그가 만났던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담겨져 있다고 믿는다.

내가 쓰는 글에서도 물론 나의 모든 DNA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아무리 글을 조작해서 썼을지라도, 글만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모든 것은 내어 놓는 일이고
어쩌면 나 자신을 스스로 발가벗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섬진강을 걷고 섬진강과 대화를 즐기는 것은
내 글로 인하여 내 치부가 드러날지라도
섬진강은 나를 키우고 나를 치유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어진다.

더 드러나라!
굽어지고 왜곡된 나의 자아여!
억눌러지고 짓눌러진 나의 욕구여!
입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내 속의 욕구들을 가감 없이 뿜어내어라!
그리고 섬진강에서 치유 받고 자유하라!


지금 나는 해질녘에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 어귀에 서 있다.
구담마을 앞 섬진강 건너는 순창군 어치리 이동마을이다.

두 마을은 서로 다른 행정구역이지만 실상은 같은 마을이다.
사람이 그어놓은 선은 단지 편의주의 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구담마을은 현대와 과거가 섞여 혼돈의 세월을 그대로 저장해 놓은 듯하다.
도시민들을 맞이하기 위해 현대식으로 조성된 마을회관,
그 바로 언저리에 퇴락되고 무너져가는 담장과 쓰러질 듯 비스듬하게 누운
60년대 시골집이 얽히고설켜져 있다.

도시로 떠났다가 돌아와 마을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쏟고 있는 젊은 세대들,
그나마 이런 분들이 있기에 희망을 걸어본다.

구담마을에서 바라본 섬진강은 순창 땅을 지키고 서 있는 용궐산을 휘감아 돌고
용궐산 아래 이동마을과 그 앞에 곡선으로 놓인 징검다리,
마을로 들어가는 굽이친 마을길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좀 과장해서 하는 말 이지만 이곳에서 마음이 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이 광경을 보고 그리움이 솟아나지 않는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감정지수, 인성지수라도 있다면 검사 해 봐야하지 않을까?

한번 씩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의 사건을 다시 수정하고 조작하여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다면,

내가 태어난 곳, 나의 출신성분, 나의 부모, 나의 성별, 나의 피부색과 성격....
그 모든 것을 과거로 돌아가서 바꿀 수 있다면,
과연 나는 얼마나 나를 조작하여 오늘의 나와 다른 모습이 되게 할 것인가?

어떤 이에게는 희소식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비극이 될 수 있으나
아직까지 현재의 과학으로 과거 속으로 되돌아 갈 수 없으니 다행이 아닐까?

그러나 인위적으로는 아니지만 세월을 되돌려 주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오직 한 곳, 고향이라는 곳이다.

고향에서는 팔순 노인도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되고,
아흔이 넘은 할머니도 이팔청춘 새색시가 되며,
도시에서 상처 입은 이들도 이곳에서는 승승장구한 꼬마장군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향에 돌아가 봤자 예전의 고향이 아닌 타향 같은 고향을 만나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학교와 정자나무,
작은 방앗간과 길게 뻗은 신작로,
그 신작로 한 켠에 먼지를 뽀얗게 둘러쓰고 있는 작은 주막,
그 주막은 주로 버스표를 팔고
할 일 없는 동네 사람들이 하루 종일 시간을 때우는 곳이기도 했었다.

정작 이런 것들을 연상하고 고향을 방문했다가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는 그동안 삼백리길을 섬진강과 함께 걸으면서
수십, 수백 개의 마을을 스쳐지나왔다.

그 마을이 그 마을인 듯 했지만
마을마다 다른 정서와 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일한 것은 모든 마을이 고향 같았다는 것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도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옛 친구가 날 알아보고 얼싸안아 줄 것 같았으며,
내 머리에 난 부스럼을 짜 주었던 이웃집 아주머니, 방앗간 아저씨,
동네 작은 구판장을 지키고 앉았던 아지매가 뛰어나와 반겨줄 것 만 같았다.


왜 그를까?
섬진강이라는 동질적 고향성이 마을을 지켜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구담마을에서 나는 고향을 발견했다.

대한민국 국민고향 구담마을,
퇴락한 마을이 정지되어 있고,
그 한켠에는 마을을 지키기 위한 젊은이들의 치열한 몸부림이 마을을 괴고 있었다.

시냇물과 같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와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
그 동네 뒤로 용궐산이 두 손으로 마을을 보듬고
해는 서산에 기울어 마을에는 산 그림자가 내려 안는다.

다행히도 나는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기에 더 고향이 그립다.
곁에 있어도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고향이 그리운가? 고향을 가지고 싶은가?
물리적 고향이 아닌 관념적 고향, 감성적 고향이라도 가지고 싶다면
섬진강으로 돌아오라!

고향을 사모하는 그대에게 섬진강은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리라!

고향이 그리울 땐 섬진강으로 돌아오라!

[출처] 섬진강 에세이 (73)|작성자 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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