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음은 너의 작은 몸놀림과 섬진강 어머니들이 있기에 그리고 이름 없는 너희들로 인하여 내 이름 석자 섬진강이 있는거야


네가 있음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는 것은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이요,
내 속에 타는 갈증과 아직도 채워야 할 빈 공간이 있다는 뜻이며,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때론 잠 못 이루는 밤을 사모한다.
짧은 세월, 그 잠 못 이루는 밤이 나를 세우는 기둥이 될 수 있으리!

나는 소망한다.

내가 섬진강 걷기를 다 마쳤을 때,
내 몸에서 섬진강물줄기가 흘러내리기를!

내 긴 허리를 꼭 눌려 짰을 때, 섬진강 물 한 방울 뚝뚝 떨어지고,
내 호흡은 사르륵 사르륵 속삭이는 섬진강 갈대소리로 화하며,
내 걸음걸이에서는 내가 걸려 넘어졌던 섬진강 바위소리가
잘그락잘그락 그렸으면 한다.

여기에 더 욕심을 부리고 싶다.
섬진강의 인내와 모든 것은 용서하고 이해하는 섬진강의 넓은 가슴을
선물로 받았으면 한다.

그것이 섬진강 걷기를 마친 내게 섬진강이 주는 선물이면 족하겠다.

그러나 섬진강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 홀로 위대함 때문은 아니리!

이름 없는 꽃들,
억센 파도에 밀리고 자빠져 뿌리 채 하늘을 향한 고된 나무들,
끝이 보이지 않는 밭이랑에 엎드려 꼬박 하루해를 보내야만 하는
어머니들의 구슬픈 노랫가락이 오늘의 섬진강을 만들지 않았을까?

섬진강이 쉼 없이 흐르는 것은
자그마치 284개의 크고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모여서 하나가 된 결과다.
그것은 그나마 제각기 이름을 가진 지류들만을 일컫는다.

이름 없는 시내와 취급받지 못하는 도랑까지 포함 한다면
수천 개의 물줄기가 섬진강이 있게 만든 주인공이지 않을까?

아니 그것 이전에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은 또 어떨까?
이슬 한 방울, 눈 한 송이, 우박 한 알, 바람 한 무리...

사실 섬진강의 근원은 그 관념상 데미샘이지만
섬진강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취급받지 못하는 이름 없는 샘들,

손님처럼 왔다가 도둑처럼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안개와 우박들이 이루어 낸 집합체가
나의 그 위대한 섬진강으로 귀결된 것은 아닐까?

그러면 섬진강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는 또 어떤가?
거센 물살을 가르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피라미며 은어며 버들치는?
<물우리 천담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작은 천담교,
그리고 그 천담마을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작지만 큰 <섬진슈퍼>는?

<구담마을>을 휘감아 도는 섬진강위에 내려앉은 긴 산 그림자와
그 그림자를 형성하게 만든 용궐산,
그 용궐산 넘어 산의 형상정도만 보이는 원통산,
고목이 되어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명이 다 된 소나무 한 그루,

섬진강을 마주하고 옹기종기 앉아 있는 작은 마을들,
그리고 그 섬진강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섬진강을 닮은 사람들,

그들이 건넜을 외길 징검다리와 오래되어 날개가 부서져 내린 가냘픈 시멘트 다리,
해 질 녘 섬진강물에 갈한 목을 축이는 염소 떼,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숨 한 번 크게 들여 마시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하여 강물위로 뛰어 오르는 피라미들 ......
어쩌면 섬진강은 이런 것들의 수고로 섬진강이 된 것은 아닐까?

서쪽하늘을 지키고 서 있는 회문산에 태양이 걸리면
원통산이 산 그림자가 되어 섬진강에 차곡차곡 내려와 쌓인다.

원통산은 원근법에 따라 초록색에서 연한 파란색으로, 회색으로,
첩첩이 겹쳐 섬진강위에 내려와 앉는다.

아, 섬진강 너는 너 혼자만의 강이 아니구나!

너를 믿어주고 지켜주었던 저 첩첩이 겹치고 쌓여 있는 산들과,
한 알의 우박, 하루아침의 안개와 한줄기의 소나기, 한 무리의 바람,
거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피라미,
그리고 구슬픈 어머니의 노랫가락...
이것들이 오늘의 너를 있게 만들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내 이름 석자는
기역자 허리로 굽어진 아흔 한 살의 어머니,
나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아내,
속 좁은 나를 상관으로 받들어 섬기는 나의 진솔한 동료들,

두 달에 한 번 쯤 만나 투박한 언어를 내 뿜는 나의 초등학교 친구들,
나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며 눈인사로, 따뜻한 격려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이 땅의 나의 지인들,

내가 즐겨 찾는 섬진강교 건너 광양시 다압면의 작은 오솔길,
이른 봄, 참새 혀 보다 더 작은 이파리,
초 단위로, 분 단위로 미세한 변화를 통해서 나의 감성을 키워주었던
지리산 자락의 오래된 나무들,

학창시절, 하굣길에 억수처럼 퍼 부어주었던 한줄기 폭우와
내 머리를 때릴 듯 바로 내 발 앞에 떨어졌던 천둥과 번개,

나와 함께 피라미 잡다가 시냇가 모래에 파 묻혀 두 눈과 두 발가락만 내 놓고
하루해 지는 줄 몰랐던 나의 꼬치 친구들....

네가 있음으로 오늘의 내가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네가 있음으로>

나는 너 너는 나, 너는 나의 거울,
너의 표정은 나의 얼굴,
너의 웃음은 나의 미소,
너의 찡그림은 나의 검은 그림자,
너는 나의 분신, 나의 반추
너는 너 일 뿐 아니며 나는 나 일 뿐 아니리,
나는 너 너는 나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네가 있음을...

[출처] 섬진강 에세이| 작성자 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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