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환 선생

내 관념의 시원이었던 데미샘 길을 처음 나섰던 것은
지난해 성탄절을 할 앞둔 날이었다.
서설, 그것도 첫눈이 내려 축복이라도 해 주는 듯 온통 세상은 백색천지였다.

그 후 4개월간 나는 미친 듯 섬진강을 탐하였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황금을 캐는 일도 아닌데,
그렇다고 누가 동행해 주는 것도 아닌데...

주말이면 북쪽으로 도망치듯, 달아나듯 섬진강으로 향했다.
갈 때마다 섬진강은 다른 모습이었다.

때로는 재잘거림으로,
때로는 칭얼거림으로,
때로는 묵묵부답으로
그리고 때로는 철없는 나를 향하여 "에라이 요놈, 정신 차려라!"

나의 모습이 섬진강에 투영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콱 막혔던 나의 상상력에 샘솟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내 영혼의 메신저가 되어 준 것이다.
아니 섬진강의 낮고 진솔함에 내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상류 쪽 섬진강의 겨울은 유독 길어보였다.
찬바람, 앙상한 나뭇가지들,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참새들....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 듯 했다.
탯줄과도 같이 마르고 가느다란 강줄기에 늘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하류의 섬진강이 천방지축 놀아대는 아이들 같다면
상류의 강은 인생을 고뇌하는 청년으로 있었다.
세상에 대하여, 미래에 대하여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하여....
이상을 꿈꾸는 청년학도와 같아 보였다.
 

ⓒ조문환 선생

그동안 내가 섬진강의 호흡소리를 듣고,
섬진강의 땀 냄새를 맡으며 걸어온 길은 근 이백리 길이다.

바다로 향하는 그 길에 간혹 섬진강도 쉬어가는 길목이 있었다.

그 첫 귀착지가 내동산을 병풍처럼 안고 있는 반송마을이었다.
내 기억에는 섬진강을 닮은 최초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마령사람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질펀한 느린 말씨, 시간이 멈춰선 듯한 옛 거리들,
그리고 계남정미소,

정미소는 우리네 근대적 삶을 단면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기공명촬영장치와도 같다.

섬진강은 이곳에서도 잠시 머무를 수 있었으리!

내 언젠가 수선루에서 보름달을 보고 말리라!

수선수를 휘감아 돌아가는 섬진강은 강이 아니라 달맞이 호수 같아보였다.
저 호수에 달이라도 내려앉는다면...
아! 저 아름다움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진안의 끝자락 포동은 사람을 끌어안는 마을이었다.
섬진강도 포동에서는 안기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포동사람들의 그 순수함에 섬진강인들 그냥 갈 수 없어 보였다.

역이 있었던 관촌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넓은 광장과 공원,
멀리서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사선대,
강폭이 넓어져 겉모습은 쉬어갈 수 있을 듯 할 지 모르나,
섬진강은 그냥 스쳐만 갔다.

섬진강을 끌어안는 가슴이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신평은 아교처럼, 사람을 확 잡아끄는 가슴이 있어 보였다.
섬진강은 이곳에서도 잠시 머무를 수 있었다.
 

ⓒ조문환 선생

오늘 또 섬진강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 줄 것인가?

오늘 나의 여정은 학암리 새터에서부터다.
학이 많이 살아 학암리였을 것이고 그 자리에 새터가 아니었겠는가?
이날은 학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난 번 그 폭풍 속에서 학들은 무리를 지어 차라리 즐기고 있었는데,
바람이 잔잔하 오늘은 학은 간 데 없고
마을을 거니는 촌로들만 찬바람을 등지고 양지쪽을 찾아 돌아다닌다.

마을 가장자리에는 오래 전에 폐허가 된 건물들이 나뒹굴어져 있다.

봄기운은 강변에 완연하지만 그 폐허 건물 앞에서는 멈춰서 버린 듯,
오래 전에 말라져 버리고 숨이 멎어버려 상냥한 봄바람 앞에서도 묵묵부답이다.

선거교에 올랐다.
섬진강을 따라 걷는 동안 수많은 다리를 지났으나
선거교에서는 사뭇 다른 감흥이 느껴졌다.

충만하고 장중함, 그리고 이 편안함! 어디서 이 느낌이 몰려오는 것일까?

다리 아래 물길을 보니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멈춰서 있었다.
신평과 학암리를 거쳐 쉼 없이 달려온 강물이 차곡차곡 쌓이듯
선거교 밑에서 멈춰서 있었다.
 

ⓒ조문환 선생

그렇구나! 여기서 비로소 섬진강이 쉼을 얻게 되는구나!
그러고 보니 여기가 옥정호의 시작이 아닌가?
나의 섬진강 여정 첫 날부터 내 머리에는 늘 옥정호가 그려져 있었다.

나도 언젠가 봄이 되면 저 옥정호 푸른 물결 위를 떠다니고 있겠지!

이는 봄에 대한 나의 간절한 희구, 갈망이 아니었겠는가?

지도에서 본 옥정호는 호수가 아니라 차라리 용틀임이었다!
시원을 떠난 섬진강이 드디어 하늘을 향해 용솟음치는 모습으로 보였다.

선거교 위에 홀로 있는 나는 그 용의 꼬리 부분에 매달려 있는 형상이다.
용이 강하고 날렵한 추임새로 꼬리라도 치는 듯 해 보였고,
그 꼬리침에 물결이 일어나 금방이라도 물보라가 쳐 내 옷을 적실 것만 같았다.

용의 뒷발톱과 같은 곳에 위치한 월면마을,
이는 마을이 아니라 차라리 홀로 옥정호를 지키는 외로운 등대 같았다.
옥정호를 떠날 수 없다는 체념과 달관의 경지에 이른 월면의 모습이다.

월명으로 향하는 고개길,
수십 고개를 돌고 돌아 산 위에서 내려 보이는 옥정호는
한 점 바람 없이 잔잔한 바다 같기도, 엄마의 포근한 품 같기도 했다.

붉은 색 황토가 허리춤 사이로 보이고,
그 사이에 파릇파릇 움이 돋는 봄....
푸른 색 물결이 태양에 반사되어 마치 파란 하늘에 새털 구름 같이 춤추는 듯 하였다.

옥정호에서는 허리춤 사이로 하얀 살 내 보이며 물동이 이고 가는 엄마가 보였다.
 

ⓒ조문환 선생

섬진강을 걷는다는 것은 삶의 쉼표를 찍는 것,
내가 섬진강으로 나아감은 섬진강에 내 짐을 내려놓기 위함이다.

먼 길 떠났던 섬진강이 어머니 옥정호에 감싸 안겨 쉼을 얻었다.
섬진강, 호수에 안기다!

과연 이 땅에 진정한 안식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옥정호에 안긴 섬진강을 바라보며 내 삶의 안식을 생각해 본다.
 

ⓒ조문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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