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데미샘
글·사진 조문환 선생

▲날씨가 추워 질 수록 강물은 파래지고 모래가 하얗게 변하는 곳이 섬진강이다. 섬진강은 민감성. ⓒ조문환

태초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태초 이전, 땅이 생기고 별이 생기기 전의 모습은 어떤 형상이었을까?

시간은 어떻게 탄생된 것일까?
시간 이전의 시간은?
그 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불과 기초적인 몇 가지 질문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혼란스럽다.
한 번씩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나도 모르게 저 깊은 심연(深淵)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러고 난 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 현실로 돌아오면 그냥 또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눈에 보인다.

내 지식과 상상력의 한계 일 수 있다.
 

▲데미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만난 '나의 작은 소품'. 이것들이 섬진강을 만들었다. ⓒ조문환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나의 조상들, 나의 뿌리가 궁금해진다.
차가운 겨울 밤, 홀로 불 꺼진 창을 지키는 엄마, 그리고 천국에 계실 아버지,

얼굴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 키 작고 인정 많으셨던 외할머니, 두터운 손, 큰 키, 느린 말씨...내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외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오늘의 작은 나를 있게 만든 나의 뿌리다.

이렇게 자꾸 올라가고 올라가면 누가 있을까?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이는 누구일까?
과연 이런 질문은 나만의 것인가?

그래서 알렉스 헤일리는 뿌리를 찾아 나섰는가 보다.
 

▲데미샘, 그는 나에게 갈망이었다. 그래서 눈보라를 뚫고 그를 찾아 나섰다. ⓒ조문환

섬진강을 알고 난 후 그 처음을 보고 싶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섬진강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난 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섬진강이 하는 말, 내 뿜는 호흡, 그의 눈길, 그의 손짓과 발짓을 읽고 그의 온기를 느낀 후부터다.

그의 시초, 시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내 기필코 그 숨겨진, 처녀성을 보고 말리라!
시원(始原)을 향해 떠나기로 한 아침, 눈발이 날리고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하필이면 마음먹은 날이 그랬다.

남녘의 섬진강에는 얕은 살얼음과 그 위에 첫 눈, 서설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꾸미지 않은 처녀성위에 하얀 면사포가 씌어져 있는 듯하다.
 

ⓒ조문환

데미샘, 섬진강의 출발, 그의 시원이다.
그 출발선에서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시원을 이루는 그 지점에서부터
섬진강을 느껴보고 싶었다.

한 걸음도 빼 놓지 않고 내 두발로 섬진강을 따라 걸어보고 싶었다.
무슨 욕심인가? 정복욕심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차에 내려 걸어 올라가는 산길, 하얀 눈으로 쌓인 오솔길은 오로지 바람이 지나간 자욱 외에는 내가 가는 길도 시원이다.

이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순례객에 대한 선물인가? 배려인가? 축복인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잔잔히, 고요히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가 처음 강줄기를 만들어 내는 시원이다.

 

▲무엇이 섬진강을 만들었는가? 위엄도, 풍채도 없는이가?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나무다. ⓒ조문환

눈이 내린 하늘치고는 너무나 파란 하늘, 물감이 되어 하얀 눈 위에 떨어질 듯하다.

고목위의 잔가지, 어떻게 저렇게 가느다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가?
섬진강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시원도 생각 이상의 평범한 모습이다.
작은 계곡, 불과 반시간이면 도달 할 수 있는 곳, 바람만 거셌다.

여기가 시원이란 말인가?
요란한 물소리, 계곡의 울림, 저 깊은 곳에서 샘솟는 듯한 물줄기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내가 매일 바라보는 섬진강이 그랬듯이 그의 시원 또한 너무나 평범했다.

그렇다.
섬진강은 바람이 만들고 하늘이 만들고 구름과 나무가 만든 것이다.
그것이 섬진강이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강이 아니라 그 어떤 범부도 쉽게 찾아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섬진강처럼 그의 시원도 시원이라 할 수 없을 만큼 평범했다.

위대한 것은 어쩌면 이처럼 평범한 것인가?
나의 영웅 섬진강의 시원은 평범의 극치를 치달았다.

화려한 것, 크고 웅장한 것, 빛의 속도만큼 빠른 스피드, 이런 것들만 대접받고 기억되는 세상 속에서 평범한 것이 아름답고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해준다.
 

▲데미샘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작은 숨구멍을 가진 샘, 빈의자...그리고 바람뿐이었다. ⓒ조문환

그래, 너의 시원이 이처럼 내 가슴에 착 달라붙고 나와 일체감이 되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너의 모습이 내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면 내 놀라운 가슴으로 또 어떻게 널 다시 찾아올 수 있을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풍채도 없고, 위용도 없으며, 고운 맵씨도 없는 너 시원이 그 위대한 어머니 강을 만들었구나!

너처럼 곁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너의 그 수수함이 진정 내가 그리던 너의 진정한 모습이다.
 

ⓒ조문환

상기된 마음으로 올랐던 나의 시원(始原), 데미샘,
그를 찾은 이방인에게 시원의 샘은 그냥 네가 되어라!

네 곁에 시원이 있고 네가 그 시원이지 않느냐? 반문한다.
또 다시 이 시원의 샘을 볼 수 있을까?
저 멀리 산 그림자와 빛 그림자가 어울려 첫눈으로 내린 서설(瑞雪)이 겹겹이 쌓인 산등성이를 엄마의 주름치마로 덮어 놓은 듯하다.
 

▲데미샘을 지켜주는 산들은 엄마의 주름치마와 같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조문환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