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온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리고 올해는 아내와의 결혼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 순간에 일 년이 가버렸을까? 또 어느새 30년이 훌쩍 흘러간 것일까?

여름이 막바지에 달했던 작년 8월 중순에 독일에 도착했다. 그늘에 들어서면 시원한 이곳 날씨는 한국의 무더위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탁 트인 지평선 위에 펼쳐진 넓고 파란 하늘은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이곳에서 만날 새로운 사람들과 새 일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렇지만 외국생활에서 오는 불편함도 많았다. 낯선 도로와 이정표 때문에 동네 산책을 나갈 때도 지도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볼펜으로 지나가는 길을 표시해가면서 동네를 돌았다. 지도가 너덜너덜해질 무렵에서야 동네 지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 자브리켄 도로는 일방통행로가 많고, 중앙선이 흰색으로 칠해져있다. 또 곡선 도로가 많고 복잡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처음 운전하다가 중앙선 침범이나 역주행 하기 십상이다. 한번은 회전구간에서 역주행 차로로 진입하는 바람에 혼이 났었다. 또 밤중에 도로 옆으로 지나가는 기차 철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빠져나오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곳의 교통시스템과 도로망을 알아가면서 운전에 대한 긴장감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이 도시에서 처음 느꼈던 호기심과 신선함도 사라져 갔다.

독일 잘란트 주의 주도인 자브리켄 시(사진 왼쪽), 자브리켄의 석양
독일 잘란트 주의 주도인 자브리켄 시(사진 왼쪽), 자브리켄의 석양

이곳 KIST유럽연구소에는 한국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잠시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생활하니 얼마나 좋냐' 라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천국은 여행자들의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치열한 삶의 현장일 뿐이다. 좋은 환경은 익숙해지면서 좋은 줄 모르게 된다. 그래서 익숙해진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연구소에 근무한지 석 달이 지나자 그동안 좋게만 보이던 것에서 고쳐야 할 것들이 눈에 띠기 시작했다.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서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높아지는 목소리만큼 직원들과의 갈등도 커졌다. 이런 저런 방법을 사용하여 변화를 시도했지만 나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왔다. 내 방식에 맞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독일인은 분명히 한국인과 다르다. 또한 이곳에서 근무하는 한국 사람도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과는 다르다. 그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직원들과의 갈등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직원들도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 때가 독일 온 지 9개월쯤 지났을 때이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면서 시작된다. 직원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독일이라는 환경에서, 또 KIST유럽연구소가 처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방안을 택했던 것이다.

KIST유럽연구소는 두 개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독일에서 발행한 것으로 '공익유한책임회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산의 대부분을 한국정부에서 받는, 해외에 있는 '한국연구소'라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주민등록증은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반되는 두 개의 정체성으로 인해 어려운 점도 많다.

독일에 등록되어 있는 법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연구과제를 직접 수주하기 어렵다. 또 독일에서는 '한국연구소'로 인식되어 연구비를 주려하지 않는다.

그 뿐이 아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영향을 이곳에서도 그대로 받는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지배구조나 경제상황의 변화는 이곳에도 바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연구소의 임무가 다양한 만큼 관련된 기관들도 많다. 그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이곳 연구소는 예산과 존폐 문제로 위협을 받는다.

독일에 있기 때문에 독일 연구소처럼 안정적일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대처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상대방을 확실하게 파악할 때까지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연구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연구와 무관한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고 있다. 어떻게 하면 연구를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불어오는 이런 종류의 바람을 차단하는 튼튼한 바람막이가 필요하다. 독일 연구계에서 통용되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나의 신혼생활은 단칸방에서 시작되었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고스란히 느끼는 곳이었지만 아내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혀 부러울 게 없었다.

아내는 집안 청소와 정리정돈을 참 잘 했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은 항상 반짝반짝 빛났고,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혹시 내가 만지기라도 한 것은 귀신 같이 알아냈다. 그렇지만 나는 주변이 어질러져 있어야 편안함을 느꼈다. 두 사람의 이런 차이가 상대방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겠지만 결혼생활 초기에는 불편함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딸 둘을 낳아 키우는 동안에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질 못했다. 아내는 딸들과의 옛날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이 많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같이 보낸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다. 휴일은 부족한 잠을 자는데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갈등은 갑자기 찾아온 내 인생의 큰 시련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아내와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한 지 15년쯤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아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 닮아가는 것이다. 이제는 나도 집안이 어질러져 있으면 불편함을 느낀다. 아내는 집안청소를 이전같이 그렇게 깐깐하게 하지 않는다. 다리의 양쪽 끝에 서있던 두 사람이 가운데쯤에서 만난 것이다.

결혼 30년에 우리는 두 손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좀 이른 나이에 이런 지위를 갖게 해준 두 딸이 고맙다. 그런 딸들을 낳고 키워서 시집보낸 아내가 고맙다. 이 세 여자들 (아니 이제는 다섯 여자들) 덕분에 내가 지금 이곳 자브리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KIST유럽연구소 소장 임기가 끝나기 전에 이곳의 직원들과도 서로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로 발전해가기를 소망한다.

대한민국 4.0시대를 여는 시기로 성숙된 의식과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 소장은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이호성 소장은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 17년 동안 시간·주파수 표준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2003년 이후에는 표준연의 주요보직을 맡아서 후배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서 나노·융합단장으로 2년간 근무한 바 있습니다. 2012년 9월 KIST유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한국과 유럽연합을 잇는 가교역할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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