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를 인류최초로 사용하였던 히타이트 족이 말을 타고 이란고원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셈족에게 고삐가 잡힌 당나귀와 처음 조우하게 되었다. 이들의 만남은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노새라고 하는 잡종을 생산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노새는 말보다는 작지만 당나귀보다 크고 힘이 세며 거친 먹이와 환경에 더 잘 적응하므로 운송수단으로서는 말과 당나귀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이 새로운 잡종은 히타이트족과 셈족에 의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것을 버새라고 하는데 버새는 말과 당나귀의 약한 형질들이 함께 나타내므로 운송수단으로 적합하지 않으며 식용육으로의 이점도 없어서 의도적으로 생산할 필요가 없다. 

노새는 잡종강세의 좋은 예가 되고 버새는 잡종약세를 대표한다. 또한 말과 당나귀는 마과(馬科)에 속하지만 서로 다른 종이므로 상호 교배에 의해 생긴 잡종은 새끼를 낳을 수없는 불임이다. 따라서 실제로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은 노새가 아니라 암말과 수탕나귀와의 조합이라는 정보였다.

말, 당나귀, 노새, 버새는 융합과학과 기술의 구현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적절한 소재가 된다. 말과 당나귀는 서로 다른 영역의 과학과 기술에 비유되고 노새는 다른 영역의 과학과 기술을 융합하여 얻을 수 있는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융합이 항상 유익한 새로운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버새와 같이 별도의 용도를 발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융합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융합을 통해 다양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 후 그 중에서 기존의 것에 비해 더 유리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는 널리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들여 상대부(上大夫: 현재의 차관급)의 봉록을 주어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수백 명에 달하는 학자들이 모였으니 가히 국가적 사업이었다. 구체적인 업무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이들 사이에 대토론회가 연일 벌어진 셈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은 바로 이때의 상황을 이름이다.  당시의 자연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음양오행설이 직하(稷下) 학자촌에서 추연에 의해 주창되었으며, 맹자도 이곳에서 유가(儒家)를 펼쳤다.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아이디어가 이곳에서 나왔으며, 법가(法家)의 부국강병책이 산출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백가쟁명이 제시한 새로운 정책을 정작 제나라보다는 오히려 이웃 진나라가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진시황을 통해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유럽판 백가쟁명이라 할 수 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축적된 부를 통하여 장인(丈人)들을 불러 모아 자유롭게 토론케 함으로써 당시의 융합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통해 르네상스시대를 꽃피웠다.   

두말할 것도 없이 실리콘밸리는 미국판 백가쟁명이다. 실리콘밸리가 노쇠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를 불사조와 같이 새롭게 재창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덕연구단지는 한국판 백가쟁명이 될 수 있다. 출연기관 30개를 포함하는 1400여개의 기관과 박사학위 소지 연구자만 1만 명이 넘는 세계 굴지의 연구단지이다.

다만 이곳에 결여되어있는 것은 융합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일 것이다. 이미 뜻있는 많은 분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곳은 연구소간 벽이 높아 백가(百家)는 모였으나 쟁명(爭鳴)을 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연구단지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연구단지의 개선책으로 기초과학연구원을 세웠으나 현재까지 진행된 바로는 이로 인한 연구단지의 네트워크 향상 효과는 미미해 보인다. 

연구단지를 쟁명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최근 논의되고 있는 10개의 정부출연연구소를 관장하는 기초기술연구회와 14개를 감독하는 산업기술연구회의 통합에서 한발 더 나아가 KAIST 이사회와의 통합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연구소간의 벽을 헐고 상호 네트워크를 증진시키려면 허브가 필요한데 KAIST가 이를 담당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첫 단계에서는 KAIST 내에 가칭 융합대학원을 신설한 후 각 연구소의 대표주자 연구원 10명 내외에 대해 본격적인 의미의 겸임교수직을 주고(총 200여명) 이들과 KAIST 교수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강화함으로써 쟁명(爭鳴)을 시작해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이여, 여러분들의 말이나 당나귀를 이끌고 이란고원에서 만나자. 그리고 그곳에서 말과 당나귀가 어울리게 하여 노새와 버새를 생산하자. 노새에게 새로운 임무를 맡기고 버새에게서 몇 천 년 동안 몰랐던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보자. KAIST에게 주어진 이란고원의 시대적 소명을 하루 속히 깨닫기를 기대한다.

융합과학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지만 현장에서 접목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유장렬 박사는 서로 별개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분야가 모여 합목적인 새로운 성과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장렬, 융합과학의 첫걸음'을 통해 연구자들의 고민을 파헤쳐보고 실현가능한 방법을 함께 모색해 볼 예정입니다.

유장렬 박사는 서울대 식물학 학사, 캘리포니아주립대 생물학 석사을 거쳐 미시간주립대에서 농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85년부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근무중이며 한국식물생명공학회 회장, 한국생물정보시스템생물학회장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SCI 등 주요학술지에 128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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