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부 과기정책 이것만은 꼭!-⑦]심각한 과기계 비정규직 문제
출연연 종사자의 절반…정규직전환 방침 나왔지만 정리해고 불안

#사례1. 국내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외국에서 포닥까지 마친 뒤 A연구소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김 박사. 열심히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8년간 내 직장이라 생각하고 청춘을 바쳤지만 내년이면 과제도 종료되고 그의 나이도 마흔 중반을 넘긴다. 기업 연구원으로 가기에도 늦은 나이다. 어릴적 꿈이었던 과학자가 되기 위해 의대가 아닌 공대를 선택한 자신의 발등을 100번이라도 찍고 싶은 심정이다. 부모님은 유학까지 다녀온 박사아들이라고 자랑하시는데 이번 설에 어떻게 인사드릴지 참담하다.

#사례2. B연구소 H과제 책임자인 이 박사. 3년간 손발을 맞춰온 비정규직 송 연구원이 기업연구소에 취업이 돼 송별회를 열었다. 4년 일반계약직으로 입사했던 송 연구원이 틈틈이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빠른 퇴사 결정에 당장 실험스케줄에 차질이 생겼다. 바로 신규인력을 뽑는다 해도 과제를 이해하고 손발을 맞추려면 몇 달의 공백이 불가피하다.

#사례3. C연구소 계약직으로 일하는 박 연구원은 최근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비정규직 문제가 개선될 줄 알았는데 연구소 예산상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할 수 없기 때문에 제도가 시행되기 전 비정규직을 감원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더욱이 C연구소는 비정규직 비율이 높기로 소문난 곳이기에 분위기가 더욱 흉흉하다. 급여차별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을 구제한다던 정책이 비정규직을 죽이는 칼날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과학강국의 꿈을 실현하는 R&D 첨병인 출연연의 비정규직 문제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10년 넘게 이렇다할 해결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단 출연연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전반의 병폐다. 하지만 고도의 정책과제를 수행하고 세계 일류 기술개발을 선도하는 출연연 직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며 R&D의 영속성과 정체성, 효율성이 저해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박근혜 당선인은 상시·지속적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공공부문부터 정규직 채용을 의무화해 2015년까지 정규직 전환을 완료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기획재정부도 지난 10일 간부회의를 열고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이행 방안 등이 포함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보고 내용에 대해 논의했다.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위한 칼을 빼들었지만 출연연 비정규직 연구인력들은 정규직 전환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재계약 불발에 대한 우려가 더 큰 모습이다.

2012년 10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이상민 의원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7개 출연연에서 종사하는 비정규직 인원은 지난해 7월 기준 총 1만189명으로 전체 인력(2만891명)의 48.8%에 달한다. 소관 부처별로는 지경부 산하 산업기술연구회 소속 14개 기관의 비정규직 비율은 43.3%, 교과부 산하 기초기술연구회 소속 13개 출연연의 비정규직 비율은 무려 53.9%로 전체 종사자의 절반을 넘었다.

특히 실험업무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생명연이 73%(900명)로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았고, 기초연 65%(387명)과 한의학연 64%(226명)도 높은 비율을 보였다. 더 큰 문제는 비정규직 연구원 수가 해마다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MB정부 첫해인 2008년에는 기초기술연구회 산하 출연연 비정규직이 3477명이었지만 2012년에는 4806명으로 집계됐다. 5년 평균 증가율이 38%다. 특히 연구인력은 2482명에서 3496명으로 증가폭이 41%나 됐다.

◆ 비정규직 문제 뿌리는 PBS, 연구소 별 문제인식 온도차 해법도 달라

출연연 연구인력의 비정규직화 이면에는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가 버티고 있다. PBS는 연구 효율을 높이기 위해 1996년에 도입된 제도다. 이전까지는 정부로부터 인건비와 연구비를 출연받았지만, PBS 도입 후 연구자들이 직접 연구과제를 따와야 인건비 충당이 가능하다. 과제는 6개월 단기 과제부터 길게는 5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출연연마다 정규직원인 연구책임자가 과제를 따오면 과제별로 필요한 연구인력을 그때그때 비정규직 인력으로 채용하는 관행은 이제 보편적이다. 때문에 연구과제가 늘어날수록 비정규직은 더욱 늘어난다. 과제기간에 맞춰 채용된 비정규직은 급여가 낮고 신분이 불안하다. 또 과제 종료와 함께 계약이 만료되기 때문에 과제 진행 중에도 보다 나은 일자리가 나오면 이직을 한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전일제 비정규직을 기준으로 평균 근속연수를 분석한 결과 1.6년에 불과했다. 또 비정규직은 급여의 차별도 받는다. 전일제(full time) 비정규직을 기준으로 정규직 대비 급여 수준을 분석한 결과 평균 82%다. ETRI나 항우연, 원자력연처럼 비정규직 연구원의 경우 동일 프로젝트에서 동일 연구업무를 진행할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급여가 같지만, 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 연구원의 급여가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곳도 있다. 더욱이 연말 인센티브 등 각종 성과급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비정규직 연구원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이다. 직장인은 업무를 통해 개인의 실력도 향상시켜야 하는데 비정규직의 경우 중요 업무가 아닌 부수적인 업무나 보조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다보니 성장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또 제도적으로 비정규직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5년 이상 한 기관에 근무해도 이방인이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더욱이 비정규직 연구인력의 정규직 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고용노동부가 2012년 9월 발표한 '고용형태별 근로자 패널조사' 결과 2008년부터 2012년 9월까지 10개 출연연이 정규직으로 전환한 비율은 0~0.4%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단 한 명도 정규직이 되지 못했고 2009년에는 12명, 2008년에는 4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상민 의원은 지난해 국감에서 "출연연의 비정규직 비율이 한국 사회 전체의 비정규직 비율 49.7%와 엇비슷한 수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과학기술 연구기관의 비정규직 비율조차 그렇게 높다는 건 과학입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 비정규직 문제는 기술인력 해체로 이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로 야기된 또 다른 문제는 기능인력의 해체다. 출연연이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과학자와 엔지니어, 테크니션이 적정 비율로 업무를 분담하고 이론과 실험이 균형을 맞추며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 하지만 테크니션 인력은 대부분 계약직인 비정규직 연구인력으로 대체되며 기술의 숙련도도 현저히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출연연에 비정규직이 도입되기 전 테크니션들은 기능직, 기술직으로 직군이 구별되긴 했지만 그들도 고용이 보장되는 정규직원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기술장인으로 성장하며 연구성과에 한몫을 해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학사, 석사급 인재들이 경력을 쌓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제대로 된 기술인력을 양성하지 못하는 실태다.

올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D연구소의 책임기술원 C씨도 마음이 편치 않다. 30년 동안 실험실을 지키며 자신의 손끝으로 익힌 노하우를 전수할 후임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지난 연말 입사한 기술원은 2년 일반계약직연구원으로 이 직원마저도 실험 노하우를 익히기도 전에 또 물러나야할 처지다.

◆ 비정규직 해법, 정부 인건비 규제와 정원 규제가 함께 개선돼야!

출연연 관계자들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의 인건비 규제와 정원(TO) 규제가 함께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까지 정부는 출연연의 인건비와 인력수(TO)를 함께 규제했다, 정규직 1명이 퇴사해야 새로운 정규직을 채용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해부터 출연연의 인건비 예산의 총액만을 관리하고, 각 기관이 정해진 인건비 한도에서 인력의 규모와 종류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자율성이 상당히 강화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건비 예산은 증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규직 전환과 같은 정책의 도입을 강조하기 때문에 예산한도 내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현재 있는 비정규직 인력을 감축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또 이 제도는 출연연 정년연장제와도 맞물려 있다. 연구원의 정년을 연장하려면 신규인력 채용을 줄이거나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집중할 수 없다. 2011년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고용개선 대책'을 마련하고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출연연들도 오는 2015년까지 비정규직의 30% 이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도록 권고 받고 있다. 하지만 각 출연연마다 예산과 과제, 인력 현황이 다른 만큼 정부 시책을 적극적으로 따르기엔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무기계약직 전환 대상 선정에도 어려움이 있다. 현재 계약직원과 정규직원은 다른 채용 절차와 기준으로 입사했다. 정규직보다 완화된 기준으로 채용했던 계약직원들을 무기계약 내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공채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역차별이 될 수도 있다"며 "일방적인 정규직 전환이 아닌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도록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출연연이 정규직 채용시엔 공인된 영어성적서 제출, 연구성과 발표를 비롯해 연구원장 인터뷰 등 심화된 채용절차를 거치지만, 계약직 연구원 채용시엔 관련분야 교수나 타 연구기관의 추천을 받거나 채용 절차를 간소화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만성 고용불안 해결해야 이공계 살린다

만성적인 출연연의 고용불안은 이공계 기피 현상을 심화시킨다. 이공계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의 시간을 더 투자하며 석사, 박사, 포닥까지 마치더라도 출연연 정규직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 시간에 일반 기업에 취업했다면 과장, 의대를 졸업하면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도 남는 시간이다.

지난해 9월 대덕넷과 중앙일보가 과기인을 대상으로 공동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국내 과학자의 70%가 '선진국에서 일할 기회가 있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응답했다. 과기인들은 우리나라 과기계의 문제로 '이공계 차별'을 가장 큰 문제로 뽑았으며, 핵심인력 부족을 어려움으로 토로했다. 취재를 진행하며 만난 많은 출연연 관계자들은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 추진하는 정책들이 거꾸로 비정규직을 내모는 악법이 되지 않도록 현실과 괴리되지 않은 정책 실현을 기대했다.

일례로 지난 2007년 비정규직 연구원이 2년이 되면 정규직으로 자동 전환되도록 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이 도입되자 많은 출연연은 기존 연구원을 2년이 되기 전에 해고했다. 이후 연구직은 연구의 연속성을 위해 연구가 끝날 때까지 고용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이 생겼지만, 계약직 행정직원은 여전히 2년을 넘기지 못한다. 더욱이 파견직 행정보조원들처럼 정부에서 논의하는 비정규직 구제논의에 포함조차 되지 못하는 인력들도 많다.

한 출연연의 인사담당자는 "정부의 추가적 예산 지원 없이는 부족한 예산만큼의 비정규직을 감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며 "연구비 책정 시 인건비 비율을 높이는 방안 등을 통해 현재의 비정규직 규모를 유지하며 점차 정규직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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