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神 김성근 감독 대전서 성공 리더십·프로의식 강연
"살기위해 일하면 변명 많아져…일하기 위해 살아야"

"절벽 끝에 서 보셨어요. 그 끝에 서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죠. 실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생각이 못하게 하는 거죠. 자신이 한계를 정하고 주저 앉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 김성근 감독은 1964년 야구를 하기 위해 한국에 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절벽 끝에 섰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며 자신의 성공 비결을 공개했다. 짧은 머리에 검은색 양복, 회색넥타이 차림으로 강단에 선 김성근 감독은 72세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부진 모습이었다.

야신(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이 8일 오후 대전롯데백화점문화센터에서 대전의 팬들을 위해 '역경과 고난, 프로의식'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사전 신청에 의해 참석한 150명의 청중은 김 감독이 강연장에 들어서자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을 연발, 그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평소 불굴의 명장, 장인 리더십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김 감독은 자신이 야구를 하기 위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고 실천해 왔는지 경험을 사례로 들며 강연을 진행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여전히 우리말이 어눌한 부분도 있었지만 참석자들은 한마디도 놓지지 않으려는 듯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녹음하고 영상을 촬영하며 강연에 집중했다.

그는 강연에 앞서 청중들의 호기심을 짐작했는지 최근 어그러진 한화구단과의 관계에 대해 신뢰가 깨지며 생긴 문제라고 짧게 언급했다. 그리고 감독과 선수도 신뢰가 있어야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면서 어느 관계에서도 신뢰가 기본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강연의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 감독은 대전과 인연이 깊다.

그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할 당시 대전팀인 OB베어스의 투수코치로 활동하다 감독으로 취임해 4년여를 이끈 적이 있다. 그 역시 대전은 자신을 성장시킨 지역이라고 기억했다. 그런 애정때문인지 1시간으로 예정돼 있던 강연에서 김 감독은 30분을 훌쩍 넘겨서까지 이야기 꽃을 피웠다.

강연 후 부산으로 가는 열차 티켓을 예매한 상태에서도 참석자들의 사인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기부터 야구를 했다. 남들처럼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연습으로 야구선수로 뛸 수 있게 됐다. 당시에는 정규 수업을 다 마치고 야구를 할 수 있었기에 시간이 많지 않았단다.

그는 새벽까지 연습벌레처럼 연습에 몰두했다. 또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이른 새벽부터 우유배달, 신문배달, 막노동 안해본게 없을 정도다. 야구를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로 그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면 힘든 일도 즐겁게 된다"며 모든 일은 자신의 생각에 달려있다고 조언했다.

고교 졸업 후 은행에 들어간 그는 직장인 야구단에서 지속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리고 야구에만 전념하기 위해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심한다.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안된 상태였기에 가족들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 자칫 영영 이별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1964년 일본의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비행기에 오르자 비로소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한없이 났어요. 거기서 다짐했죠.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에서 적응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김성근 감독 ⓒ2012 HelloDD.com
한국에 도착한 그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이었다.

누구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고 도움을 주는 이도 없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연습벌레 기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야구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굳은 각오로 그는 하루에 5000~6000개의 야구공과 씨름을 했다.

나중에는 근육이 파열되고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황까지 됐다. "오직 혼자 뿐이었기에 실력으로 살아 남아야 했어요. 그런 절박함이 극한의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99%가 안되는 이유고 1%만 되는 이유라면 자신의 역할과 노력에 의해 그 1%의 가능성을 100%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의 말 한마다,

한마디에는 확신이 넘쳤다. 경험을 통한 그의 말에 젊은 청중들도 나이를 초월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김 감독은 지독한 연습으로 몸에 무리가 오자 현역으로 뛰면서 1루 코치를 맡았고 그때부터 트레이닝 방법 등을 공부하며 지도자의 길을 구체화 했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선수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현재 감독을 맡고 있는 고양 원더스팀을 언급하며 책임감과 감독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감독의 역할에 대해 먼저 스스로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감독을 앞세우면 선수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감독은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경기에 진 이유에 대해 서로 네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리더로서 자질이 없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감독은 선수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적재적소에 기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선수층이 3이고 상대방이 7이라고 해도 그 3을 이용해 7을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감독입니다. 3이라 안된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선수도 감독도 다 무너지고 지게 돼죠." 그는 또 "안되는 것을 되도록 하는것은 생각의 차이다.

절실한 마음으로 덤비면 못할 게 없다"고 덧붙였다. 고양 원더스는 국내 최초의 독립야구팀이다. 프로구단에서 방출되거나 지명받지 못한 선수들을 모아 꾸린 야구단으로 그들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김 감독이 수장을 맡으면서 혹독한 훈련을 견딘 선수들의 기량은 몰라보게 향상됐고 최근 5명의 선수가 프로팀의 러브콜을 받았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김 감독도 고양 원더스팀을 맡은지 2주만에 포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자신마저 그들을 포기하면 누가 책임져줄까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그들과 함께하게 했다고 고백했다. "그때부터 지옥훈련이 시작됐죠. 우선 몸을 만들고 정신력을 강화해야 했어요. 아침에는 밥, 점심에는 우동 한그릇만 먹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혹독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덩치 큰 선수들이 쓰러질까 걱정했지만 한명도 낙오되지 않고 버티더군요. 그렇게 한 결과 짧은 시간에 18~45kg까지 체중감량이 됐습니다.

그때부터 선수로서 거듭나게 되고 기적이 일어난 거죠." 김 감독은 "그들을 보면서 사람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혹독한 훈련을 할 당시 그들에게 위로나 격려는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이 구눈가를 의지하게 돼 약해질것을 염려했다"면서 "선수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지 않는 감독의 마음은 더 힘들다"며 감독으로서의 애로도 털어놨다.

선수들을 강하게 훈련 시키기 위해 그 역시 연습장에서 선수들에게 공을 던져주며 훈련에 참여한다. 김 감독은 "최근 선수가 친 공이 다리에 맞아 근육이 파열됐다. 하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그가 미안해하면 훈련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그런 사례들이 무수히 많았다고 소개해 좌중이 숙연해 지기도 했다.

끝으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절대 자신을 비롯해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아야 고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단 한번도 타협을 하지 않은 탓에 처음에는 적이 많이 생긴것도 사실이라고 토로하면서도 타협하는 순간 목표는 흔들리게 된다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어떤 일이든지 안된다고 생각하면 성공할 수 없어요. 스스로 자신과 타협하고 한계를 정하면 그 이상의 한계에 도전하지 않으려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말고 된다는 생각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되는 길로 가면 안될 게 없습니다." 이어 그는 젊은 청중들을 향해 "살기 위해 일하면 변명이 많아지고 사명감 없게 된다.

어떤 일이든 일하기 위해 살면 사명감이 생긴다. 그런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질 것을 요청,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강연 참석자들은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그의 강연을 녹음하거나 촬영하며 관심을 표했다.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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