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화 반세기 과학화 100년-인물편①]초창기 과학리더들의 선견지명
선박 김훈철·화학 성좌경·표준 김재관·지질 이정환·ETRI 최순달 등

1950~60년대 1세대 과학자들이 공업화 정책을 입안하고 씨앗을 뿌렸다면 1970년대엔 광복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연구현장에 투입되며, 우리나라 공업화를 본 궤도에 안착시켰다. 대덕연구도시가 기획되기 시작한 1971년도에 우리 경제는 연평균 10%라는 놀라운 고도성장을 시작했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방안은 본격적인 과학기술 발전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KIST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은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선박의 김훈철, 화학의 성좌경 등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던 과학자들은 전문연구소 설립에 있어 20년 30년 뒤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갖춘 탁월한 전략으로, 과학입국의 기반을 닦았다.

1979년 10월, 대전에서 북서쪽으로 8km 떨어진 대덕군 탄동면 일대 약 2777만m²의 광활한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대덕연구학원도시의 1차 기반조성사업이 마무리됐다. 1973년 1월,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기본계획이 수립된 지 5년만의 일이다.

◆ 김훈철 선박연 초대소장 "심수형(深水型)대형수조 주장"
 

▲김훈철 선박연구소 초대 소장 ⓒ2012 HelloDD.com
선박연구소의 기본시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심수대형수조였다. 선박연구소의 계획과 건설을 담당했던 김훈철 KIST 박사. 그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국제적 규모의 수조 건조를 제안했다.

길이가 200m가 넘고 건조비용도 200만 달러나 돼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과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김 박사의 끈질긴 설득에 정부가 결국 손을 들었다.

선박연은 대덕에 약 44만3000m² 부지를 선정하고 1974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은 기술로'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고도의 정밀공업을 필요로하는 대형 수조 건설은 당시 공사기법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압과 토압의 비례를 맞추지 못해 건축물이 붕괴하며 공사 인부들의 희생도 잇따랐다.

수조에 물을 채우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날씨만 추워지면 물이 얼어 사고가 나지 않을까 밤새도록 걱정했다 한다. 완공 후 수조에 물을 채우기 시작한 것은 1978년 겨울이다.

70년대 선박연구소 행정원으로 입사한 황승구 기계연 전문위원은 "그 당시에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했던 수조였는데 이제는 작은 편"이라며 "김 박사의 결단이 80~90년대 조선산업에서 필요로하는 규모있는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선박연구소가 진행한 다양한 실험은 우리나라 조선산업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됐다. 김 소장은 1968년 해외유치과학자로 귀국, KIST에 조선해양기술연구실을 설치를 시작으로 우리나라가 선진조선국으로 도약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3차경제 개발계획의 조선공업부분 담당자로 우리도 "25만 톤 화물선을 만들 수 있다"며 대형조선소 건설을 주창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는 2700톤급 화물선을 수리하는 곳밖에 없던 때라 대형 조선소를 만들자는 그의 제안에 터무니없다는 반응도 많았지만, 그의 주장대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이 설립되고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신화도 시작됐다.

◆ 성좌경 화학연 소장, "연구자들이 자리욕심 내지 않게 하라"
 

▲성좌경 화학연 초대 소장 ⓒ2012 HelloDD.com
1976년 9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화학연구소가 첫발을 내딛는 현장에서 '과학입국'이란 네 글자를 선물했다.

1974년 제정된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근거해 국내 화학공업분야의 대표 기업 136곳이 출연한 예산으로 건립된 한국화학연구소.

화학연 본관에는 지금도 당시 기금을 출연한 기업의 명단이 전시돼 있다. 1974년 서울 종로구 동숭동 당시의 한국공업시험원 안에서 연구소 업무를 시작한 화학연은 설계 단계부터 장기적이고 종합적으로 계획을 수립했다.

대덕 중앙에 화학연을 배치하고 좌우 날개로 럭키, 쌍용, 한양석유 등 6개의 화학분야 민간연구소를 함께 배치해 시너지 효과를 노렸다.

성좌경 소장은 우리나라 화학계의 대부로 1972년 인하대 초대총장을 지낸 뒤 원자력연구소장, 원자력청장을 거쳐 1976년 화학연 소장으로 발탁됐다. 성 소장은 기업의 출연금으로 설립된 연구소의 본분을 잊지 않고 20여명의 연구진과 300만 달러 규모의 연구기기를 갖추고 산업체에서 필요로하는 화공업분야의 최신기술을 연구했다.

초기 연구소 운영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 인재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경험 많은 과학자가 드물었던 당시, 많은 인재들은 성 소장의 열정을 보고 대덕으로 연구기반을 옮겼다. 박노학 박사(당시 경희대 교수), 오세화 박사 등도 합류했으며, 외국에서 농약을 연구하던 이재현 박사와 박창식 박사도 이때 합류했다.

이정민 대전TP 나노소재센터장을 전남대 교수에서 화학연으로 이끈 주인공도 바로 성좌경 소장이었다. 이 센터장은 "성 박사님이 제게 '젊은 사람이 대학에 있는 것 보다 국내 화학산업을 위해 좋은 일 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며 "평소 존경하던 어르신의 한 말씀에 대학을 떠나 화학연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연구자 25명에게 집과 자동차가 제공됐지만 당시 탄동면 허허벌판에는 연구소와 집만 지어진 상태로 학교나 병원 등이 없어 정주여건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애국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했다. 이정민 센터장은 "성 소장은 연구실에 이름을 부여하면 연구자들이 자신의 전공과 연구범위를 고수하고 자리에 연연하며 변화를 거부할 수 있기에 각 연구실은 별도의 이름 없이 산업에서 필요로하는 분야별로 번호를 부여하는 방법을 썼다"고 회고했다.

당시 화학연의 가장 큰 연구목표는 '석유화학 부산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화학연의 제 1번 연구보고서도 '부산물재활용연구사업'에 관한 내용이다. 이 밖에도 이시기 농약, 의약, 고분자 등 우리나라 화학산업의 기틀이 마련됐다.

이 센터장은 "1985년 채영복 소장이 오면서 우리의 지적소유권이 되는 신물질을 해야 우리가 부강할 수 있다며 의약 등을 중점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 기본연구사업비를 모두 신물질 파트에 편성해 나머지 반은 산업체에서 연구를 따와야 하는 생활이 계속됐다"며 "당시에도 지금 못지 않게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그에 따른 어려움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 김재관 초대 표준연 소장 "국가표준제도 헌법에 명시"
 

▲김재관 표준연 초대 소장 ⓒ2012 HelloDD.com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 헌법 제127조 2항의 내용이다. 이 조항을 근거로 1999년 국가표준기본법이 제정됐다. 국가표준기본법 제정에는'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라는 조항을 1980년 개정된 헌법에 명문화하는 일을 추진했던 김재관 박사의 공로가 지대했다.

한국표준연구소를 설립을 맡은 뒤 초대 소장까지 역임한 김재관 박사는 국가표준제도에 관한 국제적 전문가였다. 위 헌법 조항에서 선언한 내용을 실행할 수 있는 법적 뒷받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국가표준기본법의 제정을 1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주창했다.

"전쟁 후 자본도, 지금처럼 기업도 없던 시절 우리는 참 어려웠다. 전쟁으로 없어진 것들을 복구하는게 전부였고 이를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됐다. 그러면서 전문연구소가 생겨났고 독일에서 일하고 있던 나도 그 소식을 들었다.

독일 봉급보다 적었지만 국가재건을 위해 귀국했다." 김재관 소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KIST가 설립된다는 이야기를 동료에게 전해 듣고 독일 데마크 제철회사 연구원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KIST 초창기 멤버로 영입된 독일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동료들과 함께 포항종합제철 계획을 짜고 기틀을 마련한다.

이후 상공부 중공업차관보를 역임, 박정희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1975년 12월 24일부터 1980년 7월 22일까지 초대 표준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연구부지 선정을 시작으로 연구요원과 첨단 연구기자재 확충 등 운영계획을 수립했다.

표준연구소가 설립될 당시 우리나라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때 필요했던 것이 '표준'이었다. 연구를 하고, 기계를 만들고, 수출·수입하는데 자료와 데이터 등 표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품의 크기가 크면 크다, 작으면 작다를 실증할 수 있는 교정기관이 필요했다.

1m가 얼마만한 크기인지 알 수 있는 원기(原器)를 만들어놓고 항상 비교·검증하도록 했다" 그는 연구소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덕연구단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대전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기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남은 자리가 많지 않았다.

김 소장은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이 이미 시작돼 연구소들이 다 자리를 잡아놓은 상태였다"면서 "현재 표준연 부지는 당시 지세가 고르지 않고 변두리여서 연구소가 들어설 계획이 없었지만 산이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어 이 자리로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표준연을 건축하는데 있어 그는 파이사 미국 NBS(현 NIST)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파이사 박사는 연구동은 앞으로 늘릴 수 있지만 본관 건물은 향후 증축이 힘들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 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표준연구를 할 전문가를 모으기 위해 각 국을 수소문해 온도, 길이, 전파 등 다양한 분야의 측정 전문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 박사는 "우리는 초반에 기계와 선박을 측정하는 일을 많이 했지만 새로운 표준 분야를 다루는 사람도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일을 하러 외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적응을 하지 못해 도중에 관두는 사람들도 있어 인원 확충에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연구원들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줬다"고 말했다.

부지선정에서부터 연구원·기자재 확보까지 다양한 일을 했지만 그는 초석을 다진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대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제미터제도가 필요한데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입을 추진한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라며 "특히 이 대통령은 한국 단독이 아닌 북한도 포함한 3000만명으로 미터협약에 가입했다.

이는 동독과 서독이 따로 미터협약에 가입한 후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결정한 사항"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박사는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나 준 선물이 미터원기와 표준분동세트 등 국가측정표준을 바로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 들이었다"며 "이를 기반으로 원자력발전소와 표준연 등 다양한 연구소가 세워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들이 기반을 다져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감사해야한다"고 덧붙였다.

◆ 이정환 지질연 6대 소장 "연료정책의 일대 혁신을 가져오다"
 

▲이정환 소장 ⓒ2012 HelloDD.com
국립지질조사소 시절부터 75년 경까지 소장을 역임한 6대 소장 이정환 박사는 국내 연료정책의 일대 전환을 가져온 인물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온 산이 붉게 황폐해 있었다.

이런 척박한 모습은 우리나라의 낙후된 경제상황과 맞물려 당시 새 정권에게 상징적으로 다가왔고, 변화시켜야할 모습으로 인식됐다.

유럽순방을 다녀온 박태준 전 명예회장은 너무나도 헐벗은 산하를 보고 산림녹화를 위한 방안은 없을까 고민했고, 당시 국립지질광물연구소 신임소장이던 이 소장을 만나 그 문제를 의논했다. 이 소장은 박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평소 갖고 있던 산림녹화 방안을 말했다.

이 소장은 "산림을 녹화하려면 국내 자원을 개발해야 한다. 무연탄을 쓰면 자원도 되고 산림녹화도 된다"고 제안하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동안 지질조사 사업의 중심목표를 무연탄 조사로 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 소장은 연간 3천 톤에 불과했던 무연탄 발견량을 15억톤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려면 연구소 인원을 기존 25명에서 200명 수준으로 10배 늘리고 연간 3억 원씩 5년간 모두 15억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건의했다. 공짜로 받은 미국 잉여농산물 판매로 예산을 충당하던 시절, 이 정도의 예산을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박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은 이 소장의 모든 건의를 흔쾌히 수락했고, 국토녹화사업은 곧바로 국책사업이 됐다. 5년 뒤 우리나라 무연탄 발견량은 16억톤으로 늘었다. 예상보다 1억톤을 초과 달성한 것이다.

무연탄 개발로 우리나라 석탄 산업은 날로 발전을 거듭했고, 석탄산업 발전은 산림녹화뿐 아니라 근대 공업화의 견인차 역할도 했다. 무연탄으로 만든 십구공탄과 연탄으로 인해 때로는 가스중독 사고 등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그런 고통을 딛고 우리 산하는 해를 거듭할수록 녹음이 우거질 수 있었다.

◆ 최순달 ETRI 2대 소장 "TDX 개발 위해 각서 썼다"
 

▲최순달 ETRI 2대 소장 ⓒ2012 HelloDD.com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통합작업을 매듭짓고 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을 맡았던 최순달 전 소장은 재미과학자로 미국에서 생활하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한 몫을 다하기 위해 귀국했다.

부족한 것 없이 잘 살았던 20년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귀국한 직후 우리나라의 방위산업 자립을 위해 최 소장은 금성사 중앙연구소와 금성정밀 중앙연구소의 소장을 겸했다.

이후 81년 출연연 통폐합이 한창이던 시절, 그는 각각 다른 지역, 자른 연구를 진행하던 연구원들의 마음 하나로 만드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바로 TDX(전전자식교환기)개발 프로젝트다.

최 전 소장은 "서울에 있던 한국통신기술연구소와 창원에 있던 한국전기시험연구소가 먼저 통합됐고, 구미에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조금 나중에 통합됐다"며 "통합 과정에서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TDX(전전자식교환기)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당시 사용되던 반전자식 교환기는 외국 기술 받아다 기술료 물어가면서 썼는데, TDX를 개발하자고 하니 다들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외국서 사다 쓰지 왜 만드냐는 사람도 있고, 상공부도 체신부도 반대했다"며 체신부 장관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최 소장은 "체신부 장관이 나한테 와서 진짜 교환기 개발이 가능하냐고 물었고, 안 돼면 처벌이라도 받겠다는 각서를 썼다.

나중에 알아보니 차관도 각서를 썼고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각서를 썼더라. 당시의 일을 두고 '전전자식교환기의 혈서'사건이라고들 했다"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최 전 소장은 82년 체신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TDX프로젝트는 직접 챙겼다며 말을 이어갔다.

"한달에 한번씩 대전 내려와서 TDX개발을 일일이 챙기고 격려해줬다. 기술 개발에 5년 걸렸다"며 "정부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모든 개발이 완료되자 수출도 되고 엄청나게 돈을 벌게 되니 고개 끄덕이더라.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된 데에 일조할 수 있었다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회고하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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