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섭 장관 시절, 우리는 연구에만 몰입했다"

[공업화 반세기 과학화 100년 ②]연구의 자율 보장, 출연연 박사 최고 우대
現 출연연, 최형섭 박사 정신 잊혀져
김은영 박사·윤여경 회장·히라사와 이사장 등 현장 증언

"KIST 초창기 봉급이 대학교수의 3배 정도였죠. 지금과는 반대로 대학교수들이 KIST에 오고 싶어했어요. 또 최형섭 박사가 장관시절에는 KIST연구원이 장관실에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있도록 늘 오픈해 놓으셨습니다. 과학자들이 최고의 우대를 받았던 시절이죠." (김은영 KIST 전 원장)

"연구실장이 직원채용도 하고 연구 장비도 다 살 수 있었죠. 연구에 아주 자유로웠어요. 대신 2년 후에는 연구성과를 가지고 와야했기에 일거리를 따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어요. 지금의 PBS랑은 다릅니다. 자유를 주면서도 은근히 컨트롤을 하는 것. 그것이 최 장관님의 철학이었죠."(윤여경 피앤아이 회장)

최형섭 박사가 KIST 소장과 과기처 장관을 역임했던 시절, 과학자들은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최고의 우대를 받으며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 성과를 증명해 줄 두꺼운 보고서도 필요 없었고 중간 중간 연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과학기술 행정조직이 보고서를 계속 요구하면 연구개발 지원이라는 목표보다 관리, 감독에 치우쳐 형식적인 연구밖에 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해 연구 이외의 행정적 문제는 최소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현재 우리나라 출연연 연구자들은 과제기획서(RFP), 과제별 수행계획서(시장조사, 연구내용, 참여인력, 예산 등 포함), 마일스톤 점검을 위한 각종 자료, 관련 기술 및 특허동향의 조사 분석 등 각종 서류에 묻혀 본연의 업무인 연구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과제가 종료되면 연차실적보고서, 연구보고서, 자체평가서 등을 작성해야 하며 대내외적으로 수시로 요구되는 문서들도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러한 서류들은 과제가 많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여러 과제를 맡고 있는 연구원이라면 연구보다 행정처리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연구를 하기 위한 인재들인가,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한 사람들인가.

출연연에 최형섭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초고속 성장을 했지만 지금 잘 산다고 다가 아니다. 세계는 과학기술 개발에 각축을 벌이고 있고 과학기술은 과거와 달리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자원도 없고 땅덩어리도 작은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개발에 더 집중해야한다.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어떻게 과학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고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인지 그 중심에서 진두지휘한 박정희 대통령과 최형섭 장관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직접 들어봤다.

◆ 대학교수 연봉의 3배 받던 연구원들…"대학, 불만 갖지 말고 수준 올려라"

KIST가 처음 설립되고 해외에서 활약하던 18명의 한국과학자가 불모지였던 한국 땅을 밟았다. 그 당시 초창기 멤버로 영입된 사람 중 한 사람이 윤여경 피앤아이 회장이다. 그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경영 전문가로서 연구 결과가 기업에 활용될 수 있도록 경제성과 타당성을 분석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는 당시 과학자들이 엄청난 우대를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사실 KIST에 첫 발을 디딘 연구자들은 해외 연구소에서 일 해오던 사람들로 해외에서 받던 봉급보다 적어졌지만 우리나라 정책 중에서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대통령 보다 봉급을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 수준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윤 회장에 따르면 당시 50세된 대학 정교수 월급은 6만원으로 KIST과학자들은 13만원을 받았으며, 국내로 들어와 살 수 있도록 집도 지원해줬다. 그러자 대학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떤 총장은 '당신들이 뭔데 봉급을 많이 받냐'고 직접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 박사는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은 국가 지원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윤 회장은 "대학에서 말이 많자 최 박사는 '우리들 봉급을 깎지 말고 당신들 봉급을 KIST 수준으로 맞추면 되지 않느냐. 우리 핑계대고 당신들이 더 열심히 뛰어라'라고 말했다" 며 "그 말을 들은 총장도 깊이 공감했고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형섭 박사는 연구자의 덕목을 늘 가슴 깊숙히 세기고 있었다.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돼야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한다.'

이 중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연구원들은 돈을 밝히지 말고 연구를 할 것과 늘 성실한 연구자세를 강조했지만 그것은 절대 '가난하게 살아라'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감히 대학교수보다 더 연봉을 높게 책정하게 해달라고 할 수도,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저렇게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알아서 보상할테니 너무 돈에 연연하지 말고 연구에 집중을 해주길 바랬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최 박사, 연구에 자유 주면서 은근히 컨트롤 하는 법을 알았다" 

▲김은영 전 KIST 원장. ⓒ2012 HelloDD.com
당시 KIST는 연구센터가 아닌 연구실로 구분돼 운영됐었다. 연구실장은 그야말로 최고의 권한을 갖고 있었는데 필요한 인력은 스스로 채용할 수 있었고 연구장비도 필요하면 구입할 수가 있었다. 연구진들이 마음껏 실험할 수 있도록 독려한 것이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2년 후 연구결과가 돈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엄중히 처벌했다. 때문에 연구진들은 기업에 가서 필요한 연구가 뭐가 있냐고 물어보고 직접 개발해주거나 단기간에 실용화가 가능한 기술개발을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윤 회장은 "자유를 주면서도 은근히 컨트롤을 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신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최 박사의 철학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KIST 소장직에서 물러나 과기처 장관을 할 때도 KIST 연구자들이 늘 항상 와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장관실을 오픈해놨다.

KIST 초창기 멤버로 KIST 원장직을 역임한 김은영 박사는 "당시에는 과기처 관리들이 책임연구원을 깍듯이 대했다"며 "지금은 반대로 관리들이 직접 연구 소장에게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만 당시만해도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만큼 지금 과학기술인의 위상이 낮아졌다"면서 연구비를 쥐고 있는 관료들에게 쥐어살고 있는 과학자를 생각하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 2~3달에 1번 KIST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

KIST가 설립되는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이해와 전격 지원이 없었다면 절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던 박 대통령은 일본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배웠고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 중 하나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 발전에 있어 과학기술을 강조했던 최 박사와 박 대통령의 궁합이 잘 맞았던걸지도 모른다. 김은영 박사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KIST에 애정이 있었고 방문도 많이 한 사람이다.

특히 공사현장에는 2~3개월에 한번 씩 시찰 올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김은영 박사는 "대통령이 방문하면 초창기 멤버들과 둘러앉아 커피도 마시고 담소도 나눴다"며 "연말이 되면 연구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봉투를 주기도 했다. 전혀 어려운 자리는 아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긴장되는 자리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오는 날이면 연구소 직원들도 행복했다.

그가 연구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것으로 누구보다도 긍지를 느끼며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 “계급은 상관없다…대통령 앞에서도 담당자가 발표할 것”

박 대통령이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기술보고나 사업 보고를 받을 때도 될 수 있으면 책임자가 하도록 시켰다. 기술 내용이 이해가 안가면 갈 때까지 질문해서 왠만한 과학기술 지식은 머릿속에 넣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최 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업을 담당하는 사람이 직접 발표하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윤여경 회장이 KIST 실장이던 시절, 박 대통령이 '구로 수출공단과 부평 수출공단의 80%가 휴무고, 운영 해봤자 가발 정도 만들고 있다면서 과학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며 어떻게 된건지 현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으라고 KIST에 명령했다.

"6개월에걸쳐 직접 공단을 둘러보고 보고서를 작성했어요. 작성이 끝나고 최형섭 박사에게 보고서를 발표했고 최 박사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할 수 있도록 자료도 건냈죠." 그러자 최형섭 박사는 '대통령이 그리 한가한줄 아는가? 제일 잘 아는 당신이 가서 이야기해야하는거야'라고 호통을 쳤다.

윤 회장은 '소장'직책을 달고 일국 대통령앞에서 발표해야 한다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정책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설명을 해야 대통령이 모르는 부분에 제일 설명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윤 회장은 "놀라긴 했지만 마음을 다가듬고 발표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발표를 하려고 하니 슬라이드도 많이 줄고 간결해지더라"라며 "KIST 부소장이 배석한 가운데 대통령에게 발표를 무사히 마쳤고 대통령 비서에게 금일봉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KIST 직원들은 KIST외 봉급은 전부 KIST에 기부하는 시스템이었다. 어자피 내 돈은 아니지만 대통령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 좋았던 윤 회장과 부소장은 술 한잔 기울이러 가게에 들어갔다.

한창 신나게 마시고 있는데 최 박사에게 결과를 보고하지 않은 것이 급하게 떠올라 중간에 급하게 KIST로 다시 들어갔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KIST 소장실에 최 박사가 앉아있었다. 윤 회장은 금일봉을 최 박사에게 건냈다. 그러자 최 박사는 "그냥 딸에게 피아노나 하나 사주게. 수고했네"라면서 "마시던 술이나 마져 마시게"라며 웃으며 이야기 했다.

보통 간부였다면 화를 낼 법도 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최 박사는 과학자들이 술을 마시면 얼마나 마실 것이며, 업무의 스트레스도 확실히 풀어줘야한다는 주의를 갖고 있던 사람으로 아량도 넓었다.

그가 가진 그릇의 크기가 작았다면 KIST는 제대로 운영 됐을까.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못하는 스트레스에 연구자들이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 日, 최 박사 애국심에 감동하다…히라사와 이사장 최 박사 기일에 韓 찾아

2004년 5월 29일 최형섭 박사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황급히 한국으로 출국한 사람이 있다. 바로 히라사와 료 일본공학연구소 이사장이다. 조국을 위해 일하는 최 박사 모습에 감명받은 그는 매년 최형섭 박사 기일마다 한국을 찾기로 스스로 약속, 매년 방한한다.

히라사와 이사장은 최 박사를 보면 메이지유신 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는 "최 박사에게 그런 마음이 느껴졌었다. 자신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어떻게 일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모습에서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히라사와 이사장이 최 박사를 존경하게 된 계기는 80년말 첫 만남에서 시작된다. 80년 말 한국은 포항에 연구시설을 만들기 위해 일본에 자문을 구했는데 당시 과학기술 정책을 연구하던 히라사와 이사장의 이름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추천받아 한국을 찾게된다.

"한국 포항에서 처음 최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뭐든지 나라를 위해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감명받았습니다. 그리고 5년 후 제 스승과 최 박사님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더욱 가깝게 지내게됐죠."

그 때부터 히라사와 이사장은 스승과 최 박사의 심부름을 하면서 더욱 친분을 쌓아간다. 이후 그는 한국 과학기술정책을 어떻게 수립하는 것이 좋을지 스승과 함께 조사하고 최 박사와 논의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일환으로 한국의 산업기술개발을 위한 기술교류회를 제주도에서 개최, 이 교류회의 한국 대표로 최형섭 박사가, 일본 대표로는 히라사와 이사장이 나선다. 한국의 정부의 지원 하에 개최된 교류회였지만 장소만 제공할 뿐 비행기 값은 알아서 해결을 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학연 관계자 5명, 일본의 산학연 관계자 5명은 꾸준히 만남을 이어 10년 동안 세미나를 유지했다. 그는 "일본에서 기업이 같이 일한다는 것은 윈-윈을 위해 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한국은 윈-윈 보다는 기술과 자금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최 박사를 만난 일본인들은 그의 열정에 하나 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었다"고 설명했다.

히라사와 이사장은 올해도 최형섭 박사를 만나러 한국에 갈 예정이다. 그는 "높은 위치에서 권력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자신은 버리고 오로지 한국을 위해 일했던 그를 다시 한번 존경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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