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현 표준연 박사,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장 취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신용현 박사(우주환경기반신기술융합 사업단장)의 첫 인상은 부드럽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놀랍게도 카리스마가 숨어 있다. 최근 그녀의 이름 앞에 또 하나의 수식어가 붙은 것도 바로 이런 카리스마가 큰 역할을 했다.

2000년부터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총무를 맡으며 다양한 법안 제정 등의 실무를 맡아 온 신 박사가 얼마 전 회원들의 폭넓은 추천을 통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앞으로 2년간 여성과학계의 리더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오전 출장길에서 급히 돌아온 그녀가 바쁜 숨을 고르며 기자를 맞이한다. 물론 앞으로 더욱 많은 일정을 소화하게 되겠지만 그럴수록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좋은 과학자,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에 열정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푸념 겸 다짐이다.

그는 1984년부터 28년간 표준연에 몸담으며 이뤄온 연구 성과만으로도 이미 세계 톱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도전적 목표 설정과 새로운 아이디어로 출발한 차세대 선도기술 우주환경기반 신기술·공정개발의 과제 책임자로서는 물론이요, 여성과학기술인회장직까지 떠맡으면서 이젠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신 박사의 활동 반경을 그려본다.

◆ 아인슈타인을 꿈꾸는 과학자, '소통하라'

여성과학자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흔치 않던 시절, 그녀에겐 의외로 과학자라는 꿈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40여 년 전 당시 어머니 역시 흔치않은 고위직 중앙 공무원이었다. 어머니의 영향일까? 여성이 자기의 일을 가지는 것은 그녀에겐 그저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더구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척척 만들어내는 과학자는 ‘만능 해결사’로 가슴에 남았고, 어린 시절부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다짐을 해왔다. 학창시절 과학실험 과정에서 느낀 흥미로움과 설레임 또한 오늘날 그녀가 있게 한 원동력이다.

“대학 졸업 후 아무것도 안할 건데 왜 들어와서 미래 전망있는 남자 하나를 떨어뜨리느냐”라는 남자 동기들의 불만도 들어야했지만 그녀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가 표준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4년.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조교로 지내던 당시 우연히 표준연과 인연이 닿아 첫 번째 공채 여성연구원으로 입소하게 됐다. 이후 10년간은 성실하게 연구에만 전념했다.

늦도록 야근하고 퇴근버스를 놓치면 연구원 정문으로부터 멀리까지 걸어 내려가 마지막 시내버스를 타야했지만 마음은 늘 뿌듯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 그것이 바로 과학자의 역할이라는 굳은 생각이 늘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 고전 주역(周易)에 '사업(事業)'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은 그저 큰 장사를 하면 모두가 사업을 한다고 말하지만 원래의 뜻은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는 군자의 사회적 역할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과학자로서의 역할이야말로 진정한 사업가 아닌가라는 자부심이었다.

1999년 박사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그녀는 원내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과제 책임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여성과학기술인회 참여 등 외부활동도 그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과제 전반과 정책 등에 골고루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첨단산업에 사용되는 진공기술 특성상 과제 기획 및 정보수집 과정에서 다양한 산업체 담당자를 만나 함께 작업했다.

초반에는 기획과 사업이 순조롭지 않아 관련기관이나 정부부처의 사람들을 만나 설득해야 했지만, 그와 같은 시간을 통해 서로를 잘 알게 됐고 각종 정부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진공기술은 각 산업분야의 기반기술로 나노·우주·반도체·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장비에 활용된다. 제품을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산업의 백그라운드를 지탱해주는 것인 만큼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술이다. 그녀는 연구소 내부에 갇혀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술수요에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교류하며 전문가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당시에는 국내 또는 전 세계적으로도 통일된 기준안이 없었기에 표준연의 역할은 더욱 중요했다. 표준연은 99년부터 10여 년 간 진공기술과 산업의 발전을 위해 기반이 되는 기술데이터를 제공하기 위해 평가기술과 장비를 개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공기술’하면 표준연이라고 인식할 만큼 알려지기 시작했고 우수연구성과, 산학연 연계 최우수과제, 기반구축 비교평가 최우수 과제 등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처음에는 애써 무관심하던 이들도 이후 표준연으로 찾아와서 평가를 받아갈 정도로 표준연의 진공기술은 세계 톱으로 올라섰다.

"당시 진공기술기반구축의 실무기술을 맡으며 당시 과학기술부에 자주 드나들게 됐습니다. 기획에 대해서 잘 몰랐으나,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배울 수 있었죠. 꼭 실험실의 기계에만 붙어 있어야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험실에 일주일 매달려도 안되는 데 외부와 잘 연계하면 하루 만에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가 서로간의 네트워크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보통은 실험실서 데이터 얻는 것만 연구로 생각하는데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을 하고 남들을 설득하는 것, 필요한 장비나 재료 구입 예산을 얻어내는 일도, 실험데이터를 받는 것도, 이를 정리해서 성과로 만들고 다른 이에게 알리는 것까지도 모두가 중요한 연구 과정이라는 것이다.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는 것이 신 박사의 경험칙이다. 남들이 인정하고 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연구자 스스로 과제의 커뮤니케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특히 여성과학기술인의 경우 남성들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학연 네트워킹이 약하므로 더욱 네트워킹에 신경써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시작이 어렵긴 하지만 일로 만난 사람과 또 다른 새로운 일을 기획할 수 있고 서로 간 신뢰가 쌓여가며 더 많은 네트워킹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신 박사의 경우 실험실과 집만 오가던 생활에서 벗어나 대형과제들의 기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또다른 등반 루트를 발견한 셈이다.

여성과학기술인회 총무이사, 나노기술전문위원회, 여성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 미래융합기술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운영위원, 교과부장관 정책 자문위원 등 그녀의 대외활동은 손으로 꼽기조차 어려우며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이젠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저기서 그녀에게 손을 벌리는 이유는 뭘까. 스스로 밝히는 노하우는 그저 평범하게 들리는 '솔직함'이다. 고민과 걱정거리가 생기면 물론 스스로 충분히 고민을 해야하는 것도 맞는 이야기지만 혼자 해결하려는 것보다는 솔직히 털어놓고 의논을 하는 편이라고.

직접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으므로 상대방도 나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서로 간에 신뢰가 쌓여 일이 훨씬 수월해지다는 설명이다.

"보통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되기를 꿈꾸죠. 혼자서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구소에 와서 실질적인 교훈을 얻게 됐습니다. 큰 그림이 있다면 그 안에 세부적인 각각의 단계와 부분이 있습니다.

작은 일처럼 보여도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죠. 하나의 조직, 팀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로 깨닫게 됐습니다."

◆ "연구원들이 주인공, 그들의 든든한 '지원본부' 역할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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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안팎으로 그녀가 더욱 활약하게 될 해다. 새로이 시작된 환경기반 신소재·공정 개발은 지금까지 축적된 진공·플라즈마·무접촉 상태 시료제어 기술 등의 융합으로 지상에서 우주환경을 모사하고 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공정이나 소재를 개발하는 창의적 도전이다.

더불어 여성과학기술인회 리더로서도 그녀는 여러 가지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아직까지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못했던 공정 재료를 만들어내기 위한 도전인 만큼 성공여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으며 물론 위험부담도 큽니다.

하지만 이전의 성공적 과제 진행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가장 정밀한 컨트롤을 원하는 반도체의 경우가 그랬죠. 많은 자체 연구 인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삼성에서 같이 해결하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도 모험적인 연구였지만 이번엔 더 모험적인 연구입니다. 기초원천기술을 활용한 융합연구로 멋진 결과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유난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활동도 마찬가지다. 전임 회장들의 노력과 결실만큼 잘 이뤄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각각의 회원들의 능력이 탁월하고 자발적인만큼 잘 운영될 것이라 믿음도 가지고 있다.

"여성과학인들의 수가 많아졌고 배출되는 인력도 많아졌죠. 여성과학기술인은 단지 보조의 역할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의 주역으로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교육과 네트워킹을 통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며, 경력이 단절된 여성과학자나 가정과 업무의 양립에서 고민하는 이들의 여건 개선을 위해 제도 시설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가야 합니다.

" 연구생활 30년. 대규모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면 서로 간에 조율할 일들이 많으며 연구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안 풀리는 일들이 많았다. 스트레스로 잠을 설친 적도 있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잘 될 거라는 믿음, 오로지 문제를 해결해내고 말겠다는 집념, 연구원 실험실의 선후배 등 든든한 지원자들이 그에겐 큰 힘이 됐다. 시간에 쫓기며 밤샘 연구를 했을 때 기업들로부터 받는 감사인사, 표준연 기술로 인해 제품을 생산, 납품하기 시작했다는 기분 좋은 이야기, 외국 유수 기업들로부터 믿음을 갖고 평가를 의뢰할 때 등 모든 시간이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신 박사는 표준연 진공센터 팀원들이 든든하게 실험실을 지켜주는 주인공이고 자신은 팀원들이 열심히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본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그녀에게 돌아오는 다양한 수식어의 공로를 팀원들에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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