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연 기업연 등 주변 자원과의 연계로 '생태계' 만들어야
교수 등 구성원들의 참여로 자치능력 입증도 긴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KAIST(한국과학기술원·총장 서남표) 학생들이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위치한 학교 주변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연구소와 기업들을 방문해 견문을 넓히는 한편,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탐색해본다. KAIST 교수들은 뛰어난 연구 능력을 세계적 실력을 갖춘 출연연 및 기업연의 연구자들과 협동하며 시너지 효과를 낸다. 연구도시로서의 새로운 생태계 출현이다. KAIST가 한국 과학기술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대덕특구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세계 유수의 대학으로 도약함과 함께 대덕특구는 아시아의 과학 중심지로 거듭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는 이유는 KAIST가 서남표 총장의 사의 표명으로 학교 운영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기 때문이다. KAIST에 있어 공도 많고 과도 많으며 학교 내홍의 발화점이었던 서 총장이 최근 자신의 거취를 표명함에 따라 카이스트는 이제 판을 새롭게 짜는 가운데 학교 운영에 대한 발상의 전환도 요구되고 있다.

KAIST 교수들은 그동안 총장과 관련해 뭔가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개교 이래 자신들이 원했던 총장을 한 번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개 교수 협의회에서 투표를 통해 뽑으면 1등 보다는 2등이 정부의 낙점을 받았으며 그에따라 구성원들은 늘 실망감을 안은채 학교 생활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더우기 지난 러플린 총장과 현 서 총장은 아예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총장으로 부임해왔다. 그 과정에서 교수들은 개혁의 주체가 되기 보다는 대상이 됐다. 자연히 일부 교수들은 학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점차 식어갔음을 고백한다.

다소 무기력하기도 하던 KAIST의 학내 분위기는 어쨌든 일단 변화의 단초를 갖게 됐다. 그동안 거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서 총장이 사퇴를 표명하고, 평의회를 구성키로 한 만큼 KAIST는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을 맞게된 것이다. 총장 부재의 일종의 권력 공백기는 KAIST 구성원들에게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구성원들이 자치능력을 발휘해 학교를 발전시킴으로써 그동안의 외부 개입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학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회복으로 더 많은 자원을 가질 수도 있고, 자율성에 기반해 연구능력도 제고되며 학교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반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사공이 많아 방향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채 혼란만 가중되거나, 나는 상관없다는 무관심으로 학교가 표류하는 것이다. 이 경우, 역시 자치 능력이 없다며 더욱 강한 외부 개입을 불러 오거나, 내부 동력이 꺼지면서 학교의 존폐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KAIST가 도약이냐, 추락이냐의 중대한 기로에 놓여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서 총장과 러플린 총장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총장은 학교 운영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임기가 끝나거나, 중도 사퇴로 떠나가면 그만인 존재로, 제한적 책임을 진다. 그에 비해 교직원과 학생 등은 학교에 남아 지속적 영향을 받는 만큼, 학교 운영의 또다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발전을 위해서는 두 주체간의 팀 플레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외부의 영향력 있는 인사의 리더십을 수용해 발전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내부 구성원들의 역량이 중요하다. 서 총장 경우처럼 절대적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들어와서 근본적 개혁을 한다고 해도 내부 구성원들의 동의와 그를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 등이 갖춰지지 않으면 개혁은 뒤틀릴 가능성도 큰 것이다.

◆ KAIST는 '갈라파고스' 섬'?

KAIST를 10년 넘게 지켜보았다. 윤덕용, 최덕인, 홍창선, 러플린, 서남표 등 5명의 총장을 만났다. 학교 발전을 위해서는 총장도 중요하지만 KAIST란 존재에 대한 발상의 전환도 긴요하지 않나 여겨진다. KAIST는 입지에서 어느 세계적 대학도 갖지 못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 학교 주변에 세계적 연구기관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하버드나 MIT는 물론 옥스포드, 도쿄대, 베이징대 등등 세계 유수 대학도 이런 환경을 못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KAIST는 세계 최고 이공계 대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 놓여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KAIST는 '섬'같은 존재이다. KAIST는 대덕에 자리잡은 이래로 지역과는 애써 거리를 두며 MY WAY를 주창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마치 지방에 있으면 이류고, 서울에 있으면 일류인 듯한 생각을 접하는 듯하다. 몸은 대덕이란 지역(로컬)에 있으면서, 마음은 로컬이 아니라 내셔널 혹은 글로벌이라며 따로 움직였다. 때문에 주변에 널려 있는 최적의 자원을 활용하지 못해왔다. 마치 왕조시대에 귀양을 가서도 궁궐이 있는 서울만 생각하고, 그 중에서도 궁궐에 있는 왕만 바라보는 신하와 같은 모습이 연상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은 하나같이 지역과의 연대에 성공했다. 대학 주변의 환경을 우군으로 만들고 그를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세계적 연구 성과물을 내놓았다. 한마디로 학교를 중심으로 생태계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KAIST는 생태계를 만들기는 커녕 단세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 연구환경을 자랑하는 연구단지와는 교류가 거의 없다.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거나, 아메바처럼 다른 기관을 흡수합병하려는 노력은 했어도, 생태계 차원에서 윈-윈 게임을 하려는 가시적 움직임은 드물었다.

교수들도 대기업들과의 프로젝트와 정부 과제에는 관심이 있지만 학생들의 안목을 넓혀주기 위해 주변 연구소와의 공동 연구나 방문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연히 학생들은 학교 내부에서만 생활할 뿐 주변의 연구소를 둘러보는 일은 가뭄에 콩나듯 한다.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을 재학하는 가운데 학내에서만 지내며 반경 10km내에 있는 연구소들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는 경우도 적잖다.

외부와의 교류가 없어 진화가 멈춰버린 갈라파고스같은 존재가 KAIST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세계적 석학이 와도 성과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무리수를 두고, 개인의 브랜드를 기반으로 개혁인듯한 것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반짝 쇼'에 그칠뿐 지속가능한 공연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 KAIST는 과학계의 중추, 국가의 동량이란 자긍심 키워야

KAIST가 앞으로 해야할 일은 명확하다. 학내의 자치능력을 제고시키는 것이고, 주변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자치능력 강화는 참여에 의해 이뤄진다. 이공계 특유의 내 것만 괜찮으면 된다는 협량한 자기 영토 의식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위기가 구성원들의 존재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내며 해결방안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대덕특구 내의 정부출연연구소, 기업연구소, 벤처기업, 이웃 대학 등과의 교류도 필요하다. 정부출연연구소에는 KAIST가 못 갖고 있는 세계 최고의 연구장비가 즐비하고, 연구에 있어서도 뛰어난 성과를 내는 과학자들도 많이 있다. 기업연구소는 LG 화학의 경우에도 보듯이 리튬 배터리와 3D TV 등 세계 최고의 성공적 사례가 나오고 있다. 벤처기업들도 KAIST 출신이 세운 회사도 많고, 대개 기술력 기반이라 KAIST와 궁합도 맞는다.

KAIST가 섬을 벗어나 주변의 자원을 연계하고 생태계로 발전시켜 나갈 때 KAIST의 장래는 밝다.이런 기반이 다져져야만 누가 총장으로 오더라도 제대로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서 총장 이후 새로운 총장이 올때까지의 과도기를 어떻게 구성원들의 역량으로 성공적으로 보내느냐가 주어진 숙제이다.

KAIST 주변의 정부출연연구소와 기업연구소, 벤처기업 등등의 대덕특구 구성원들은 KAIST를 한 식구로 생각하며, 학교 발전에 적극 협력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 KAIST의 발전이 과학계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KAIST가 내부 구성원들의 분발로 지금까지의 갈등을 발전적으로 치유하며, 성숙된 자세로 차원 높은 역할을 해주기를 주변에서는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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