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RI·에너지연·원자력연 등 연구성과 품질보증 움직임 앞장
황영하 ETRI 팀장, "모니터링 절차때문에 업무 부가될 수 밖에 없다"

"이거 품질보증서 붙어 있나요? 없으면 좀 구입하기 그렇지 않나요?" 체면불구하고 정확히 따져봐야 손해보지 않는 시대다. 그런 탓일까. 요즘에는 품질보증서 없이는 물건 하나도 제대로 팔기 힘들다. 정육점의 한우(韓牛)는 생산이력서까지 따라다닌다.

고가의 명품일수록 소비자들은 정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품질보증서를 꼼꼼히 따져보게 마련이다. 품질보증서란 구입 후 문제가 생겼을 때 철저한 애프터서비스를 약속 받을 수 있는 일종의 증명서류다. 과학기술계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분야에서도 '연구성과 품질보증' 바람이 불고 있다. 국책연구원일수록 이러한 바람은 더 거세다. 국민 혈세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곳이라 R&D 성과에 대한 품질 보증은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일 수 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국책연구원의 기술을 이전받은 업체에게 보다 나은 연구성과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연구성과 품질보증 측면에서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연구원은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김흥남)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원장 황주호)이다.

◆ ETRI 연구성과 품질올리기 위해 악역 자처…"그래도 평가는 좋아졌어요"
 

▲자체인증 Q마크는 연구원들에게도 한 번에 통과하고 싶은 관문이다. ⓒ2011 HelloDD.com

ETRI가 연구성과에 대한 품질보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2002년이었다. ISO(국제표준화기구) 품질경영시스템의 인증을 획득한 때다. 이후로 9년이 지났지만 3년 마다 한 번씩 갱신 중이다.

올해 3차 갱신을 앞두고 있다는 ETRI 품질혁신팀은 ISO 품질경영시스템은 물론 자체 품질 인증 기준인 Q마크, 프로젝트매니지먼트(CCPM) 등의 수행과 관리를 맡고 있다. ETRI 품질보증의 기본 베이스는 물론 ISO의 품질경영시스템이다.

황영하 품질혁신팀장은 "품질경영시스템이라는 것은 어느 조직이나 규모, 특성에 상관없이 다 적용할 수 있다. 문제는 조직에 맞는 프로세스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라며 "ETRI R&D 특성에 맞도록 정의한 게 있다. 정보 표준기관을 반영한 프로세스가 하나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세스대로 연구를 진행한 후, 양질의 품질과 완성도를 갖춘 연구 결과물을 고객에게 전달하면 임무를 끝난다. 그러나 프로세스만을 잘 따른다고 해서 결과물이 잘 나오는 것은 아니다.

확률적으로 프로세스가 좋으면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예상이 가능하지만, 반드시 100% 적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연구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ETRI 자체적으로 품질을 보증하는 시스템이 바로 Q마크다.

황 팀장은 "품질 완성도를 체크하는 것이다. 어느 일정 수준을 정해놓고 그 수준 이상이 되면 외부로 나갈 수 있다. 통과하지 못하면 나가지 못한다.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제조업체의 경우 최종 검사를 제품이 가지고 있는 스펙 대비 검사를 해서 출하를 하게 된다. 우리는 제품에 대한 스펙이 사업이나 연구 과제 특성상 다 다르다. 고객이 원하는 요구사항에 맞는 결과물이 나오는지 최종적으로 검사를 하는 절차가 Q마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Q마크는 ETRI 고유의 자체 품질보증 시스템이기 때문에 국가 공인 인증과 같은 효력은 없다. Q마크는 지난 2003년부터 시스템 개발에 들어가 2008년부터 실행되기 시작했다. 검증 절차는 크게 프로세스에 대한 평가와 결과물 평가로 나뉜다.

프로세스 평가의 경우, 연구가 표준 프로세스대로 수행이 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며, 마지막 최종 평가는 연구 결과물이 최초에 정의된 고객 요구사항대로 따르고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 된다. 최종 평가에서 통과하지 못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문제점을 개선하고, 보완이 돼야 진행될 수 있다.

상용화 추진 일정 자체가 틀어질 수도 있는 문제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게 황 팀장의 입장이다. 물론 자체적으로야 번잡하고 귀찮은 과정이겠지만 이러한 ETRI의 자체 평가 시스템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건 ETRI에서 기술이전을 받은 업체들이다.

그는 "고객들이 너무 좋아한다. 기술이전 업체들의 경우 내부적으로 인증을 해서 깔끔하게 보내주니까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며 "예전에는 주먹구구식이었다면 지금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정부에서도 이런 활동에 대해 만족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반응을 전했다. 실제로 ETRI 내에서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고객만족도 조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다.

품질 완성도가 갑작스럽게 올라갈 순 없지만 향상되는 것이 눈에 띠게 보인다는 게 황 팀장의 설명이다. 이런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황 팀장은 "내부적으로 R&D 조직에서 이런 것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이 많았다. 업체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저항이었다. 또한 기존에 해오지 않았던 일들이 추가되는 것이라 업무도 전보다 많이 부과될 수 밖에 없었다"며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야 ETRI 역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창의성을 옥죄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연구란 모름지기 창의성에 기초해 준비를 하고 진행해야 하는데, 맞춰진 절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게 되면 자칫 그 의도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품질혁신팀의 모니터링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물에 대한 평가를 검증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연구원들에게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다.

황 팀장은 "연구원 내의 악역을 자처하고 있다. 추가되는 업무가 많아서 재촉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팀에는 젊은 직원들이 오지를 못한다. 연구원 내부를 훤히 알고 있어야 업무가 가능하다"며 "그래도 처음과 달리 ETRI 내부 직원들이 이해를 많이 해주고 있다. Q마크 실시한 이후로 고객 만족도가 올라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업무가 연구성과 품질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보람된다는 황 팀장은 "물론 우리 업무만으로 고객 만족도가 상승됐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결국엔 품질이 중요하다. 연구성과를 향상시키는 노력을 연구기관들이 해야 한다. 연구 특성에 맞는 프로세스를 갖추고 끊임없이 개선하도록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 "일단은 프로세스 정립이 우선과제, 기술에 대한 가치 극대화한다"
 

▲연구품질혁신팀의 현판식. 오른쪽에서 4번째가 황주호 원장, 맨 오른쪽이 최상진
실장이다.
ⓒ2011 HelloDD.com

에너지연의 연구품질보증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그래서 최상진 연구품질보증실장은 늘 공부 중이다. 연구원 내부에서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가야하는 어려움과 부담감이 가슴을 짓누르지만, 그만큼 새롭게 변화될 연구 환경에 대한 기대도 크다.

에너지연의 연구품질 제고 방침은 간단하다. 연구윤리 준수와 연구업무 프로세스 효율화 및 연구개발 품질 향상을 통해 고객요구 만족 증진에 기여하고, 이를 통해 연구개발 경쟁력 제고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연구품질 시스템을 적용하고 안정화를 기하는 게 첫 번째 단계다.

최근 정립한 품질보증절차서에 따라 제대로 연구를 했는지 모니터링하는 게 주 업무다. 최 실장은 "연구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하는 게 우선 목표다. 연구개발을 했으면 그에 따라 결과를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 기획단계부터 진행되는 연구 과정에 따라 객관적으로 입증된 절차에 따라 수행을 했는지를 모니터링한다"며 "연구노트를 충실하게 작성하던지, 구매를 할 때 어디서 어떻게 구매를 했는지 등의 정보들이 모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한 마디로 지식 축적 차원에서의 의미가 크다. 그는 "30여년 동안 연구를 하다가 정년이 돼서 연구원을 떠나면 지식이 남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이야기지만 남는 것은 보고서밖에 없다"며 "현재 4개 시범 과제를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는 상태다. 결과가 잘 나온다면 다른 과제들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겠다고 할 것 같다.

아직까지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에너지연의 품질보증 바람은 황주호 원장이 발동을 걸었다. 품질보증이 당연한 절차로 굳어진 원자력계에 몸담았던 황 원장은 에너지연 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연구품질에 대한 부분을 강화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 차근 진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팀을 신설하고, 품질보증에 대한 세미나도 개최해 인식의 공감대를 넓혀나갔다. 물론 에너지연에서도 저항은 존재했다. 현장에 나가 주요한 물품의 구입이나 활용 면에서 연구품질절차가 지켜지지 않으면 체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예민한 과학자들에게는 눈에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연구품질보증을 적용하는 데 어떤 제한은 없다. 잘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올해부터 연구노트의 경우 정부에서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못 박은 상태이기 때문에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며 "이제부터는 욕을 많이 먹을 것 같다. 그러나 국가에서 예산을 받아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만큼, 연구 성과에 대한 지식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은 연구원들도 고민하는 부분이다"고 말했다.

연구노트에 대한 평가 부분 역시 다른 곳에서 말이 나오지 않게끔 전문가 그룹을 형성해 평가하려고 시도 중이다. 정년을 앞둔 시니어들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 실장은 "연구노트가 정착될 경우, 연구원들이 성실하게 연구를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평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성공과 실패로만 나뉘어져 있던 연구성과 평가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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