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명장은 국가의 보물④]인간유전체연구 장인 유향숙 생명연 박사
꿈꾸던 음악 접고 과학자의 길에 들어선 이야기는?

"국가 발전을 위해 과학을 해야합니다." 심포니 작곡 등 음악을 평생 동반자로 삼고 싶어하던 어린 학생의 마음에 벼락같이 다가온 한 마디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 초빙된 강사의 한 마디 말에 유향숙 한국생명공학연구원 FHCRC(프레드헛친슨 암연구소-생명연) 공동연구협력센터장은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과학자의 길을 결심하게 된 당시를 그리운듯 돌아보는 유 박사에게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올해 벌써 정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 박사의 꿈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1999년에 시작된 21세기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단의 인간유전체연구단장을 맡았던 유 박사는 여전히 한국인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신약 개발의 밑바탕을 제공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물론 과학자로서의 길을 걸는 과정에 이미 많은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왔다. 국제공동연구로 아시아인의 기원과 유전적 다양성을 밝혀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10개국 90여 명의 과학자가 동남아시아 73개 인종에 대한 유전적 변이분석을 통해 아시아인들의 이동 경로와 유전적 특성 등에 대한 추적 결과를 사이언스지에 발표했는데, 유 박사는 이 연구단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비교 추적해 분석한 결과 사용하는 언어와 지역에 따라 각 인종을 유전적으로 분류해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동북아시아인 보다는 동남아시아인 쪽이 유전적 다양성을 지니는 것으로 밝혀냈다. 이는 주로 동남아시아인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인구의 이동이 남쪽과 북쪽 양쪽으로 이뤄졌고 동남아시아인은 남쪽으로 흘러들어간 일파일 것이라는 기존의 주류 가설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분석 결과를 놓고 보면 인도인을 제외한 아시아인의 조상은 처음으로 인도에 도착했고 이중 일부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했으며 그 중 일부는 아주 남쪽인 동인도네시아, 태평양섬(Pacific Island)까지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유 박사는 "아시아인들의 기원과 유전적 다양성을 밝혔던 이 연구는 체계적으로 정립돼 있지 않은 아시아인들의 유전체 연구를 진일보 시키는 데 기여했다"며 "아시아인들이 유전적으로나 약물유전체학적 또는 질병발생경로 등으로 분류하는 데 활용될 예정으로, 아시아 지역 스스로 협력연구를 통해 수행했다는 데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지난해 5월에는 세계 최초 효모 라이브러리 구축과 약물작용 연구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효모에서 유전자가 하나씩만 제거된 돌연변이 5000여 종을 확보했고, 이를 탐색할 수 있는 일종의 도서관(라이브러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유 박사가 그렇게 원하던 신규 유전자 발굴과 초고속 대용량 신약 타겟의 구축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유 박사는 "효모 라이브러리는 암 관련 신규 유전자에 항암제가 작용할 수 있는 기전을 규명할 수 있다"며 "특정 유전자가 제거된 균주는 특정 약물에 민감하기 때문에 신약 개발에 있어 초고속 대용량 약물작용점 탐색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년전 생명연에서 처음 시작한 이들 연구는 지난 20년간의 국제공동연구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을 극복하면서 성과를 이끌어 냈다. 유 박사에게도 다가오는 바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다.

그는 "한국의 신약개발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더욱 앞당겨 질 것"이라며 "한국 생명공학 제품의 국제적 위상 제고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연구를 함께 해온 후배들이 자랑스럽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 "프론티어 사업단통해 간암·위암 치료제 개발 신호탄 쐈다"

어린 시절 유 박사는 생물학을 특히 좋아했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숙제를 할 때는 용어 하나 하나를 백과사전에서 일일이 확인해서 사용할 만큼 푹 빠져 있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약학을 전공한 유 박사는 암과 관련된 약을 만들고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만 알 수 있었던 당시의 실험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좀 더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던 유 박사의 열정 때문이었다. 미국 유학도 쉽진 않았다. 현지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다.

유학을 위해 미친 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이유다. 새벽에 영어 공부를 하러 갔다와서 학교에 갔을 정도다. 다행히 기회가 찾아왔고, 모든 것을 준비해 두고 있던 유 박사는 절호의 찬스를 잡게됐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이었다.

공부를 마친 유 박사는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1986년, 우리나라 과학계에서도 유전 공학에 막 눈을 돌릴 때였다. 생명연과의 인연은 그때 맺었다. 그후 지금껏 25년간 한 번도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유 박사는 "한국의 과학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오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곳은 이곳 뿐이라고 생각했다"며 "많은 기업들과 학교에서도 러브콜이 있었지만 연구소를 포기할 순 없었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그때는 연구만 할 수 있는 환경이 시급했다"고 말했다.

유 박사가 손대는 모든 것은 우리나라 유전공학 발전의 최초의 시도이자 출발점이었다. 첫 작업은 유전공학의 기반을 닦는 것. 암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선 무엇보다 암 세포가 어떻게 생성되고 파괴되는지를 알아야 했다. 원리를 알기 위해선 세포 주기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 연구를 하기 위한 좋은 모델이 바로 효모였다.

유 박사는 20년 전 분열 효모를 가지고 세포 주기와 관련된 유전자를 찾는 일을 첫 연구 과제로 선택했다. 유전자를 찾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그의 생각은 확고해졌다. 우리나라도 게놈 프로젝트(인체의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놈[genome]을 해독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유전자 배열을 분석하는 연구 작업)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게놈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상태였다. 관련 기관마다 찾아가 게놈 프로젝트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을 피력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유 박사가 1999년부터 10년 장기 프로젝트로 시작된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단의 인간유전체연구단을 이끌게 된 직접적 계기였다.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은 지난해 말 모두 종료됐다.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단의 단장을 맡으면서 1년에 100억원씩 10년 동안 연구비를 자신의 계획에 따라 재량껏 사용할 수 있었다. 유 박사는 "당시 유전체에 대한 기반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며 "그래서 사업 예산으로 유전체 연구에 필요한 장비 구입 등 기반을 닦는 데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업단에서는 한국인의 위암·간암 세포로부터 3만 여종의 유전자를 선택해 이들 중 상세한 기능연구를 수행하여 위암 간암과 관련된 유전자들을 밝혀냈다. 이들 중에는 위암 간암 치료제 개발을 위한 좋은 유전자 타겟들이 있어 새로운 간암 위암 치료제 개발에 밝은 희망을 주고 있다.

◆ "한국인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신약의 밑바탕을 제공하고 싶다"

유 박사가 연구 대상으로 선정한 난치병은 위암과 간암이었다. 당시 외국은 대장암이나 유방암의 발생 비율이 많았지만, 한국은 위암과 간암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관심있는 분야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게 마련. 외국 역시 간암과 위암 치료에 대한 연구는 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외국의 기술에 의존하기 보다 한국인의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게 당시 유 박사가 가진 소신이었다. 그 소신은 지금도 변치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중국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 지역이 경제 파워를 형성하리라고 예상하지만, 그들에게 적합한 신약 시장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게 유 박사의 설명이다.

그는 "아시아 지역에 필요한 약을 개발하려면 신약 시장을 구축하고, 기초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물론 중국의 발빠른 행보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유전자 서열만 가지고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지는 시대가 다가오는 마당에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발걸음이 너무나 늦다.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에 맞춰 중국은 유전자 시퀀싱(DNA의 염기가 어떤 순서로 늘어서 있는지 분석해 제공하는 서비스)을 할 수 있는 장비를 한 기관에서만 180대나 도입하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몇 대도 안되는 상황이다.

유 박사는 "트렌드에 맞춰 연구들을 지원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시스템이 안 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유 박사가 일반인들과 정책 담당 공무원들의 과학 수준 향상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있다.

과학 수준이 높아져야 연규개발에 대한 지원도 비례해 늘기 때문이다. 유 박사는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공무원들이 전문적이어야 판단이 바를 수 있다. 바르지 않으면 과학자들이 괴로워진다. 전문적이지는 않더라도 트렌드를 읽을 줄 알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정부의 과학 정책 당국에도 문제가 많다. "담당자들의 순환제 때문이기도 하다. 너무 짧다. 6개월 동안 가르쳐주면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다. 정말 괴로운 일이다. 행정체계 역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 박사는 퇴임 이후의 생활에 대해 어떤 설계도를 갖고 있을까. 벌서부터 꿈이 많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 중이란다.

과학자의 꿈 때문에 잠시 접어 놓았던 음악을 할까, 아니면 과학 꿈나무들을 위해 과학대중화강연에 뛰어들까, 그것도 아니면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리킬까 등등 여러 생각들이 유 박사의 머리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을 정도다.

"내가 과학을 시작한 것도 강연이 계기가 됐었다. 소득이 100달러도 안됐을 때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만 듣고 나라를 위해서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 꿈을 가지고 내 인생을 설계해 왔던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선 과학대중화교육을 통해 마인드를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생각을 실천하기까지 8개월 정도 남았다. 신약개발의 꿈도 놓치고 싶진 않다. 진정한 한국의 신약개발을 위해 향후 10년간 또 한번의 도전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일 열심히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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