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고규홍 나무 전문 칼럼리스트

우리가 붉은 색을 좋아했던가요? 붉은 색에는 적잖은 딜레마가 담긴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빨간 색은 '레드 콤플렉스'를 연상시키는 금기의 색깔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붉은 악마'라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떠올릴 때에는 한없이 즐겁기만 한 색깔이 빨간 색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말 우리 젊은이들이 붉은 옷 대신 하얀 옷을 입고 뛰었다는 걸 아쉽게 생각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붉은' 악마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빨간 색은 정열의 상징입니다. 계절로 치면, 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이겠지요. 그런데 나무들이 피워내는 꽃은 좀 다릅니다. 녹음 짙은 여름에 피어나는 꽃들 가운데에는 붉은 색보다 흰 색의 꽃이 훨씬 많습니다. 그건 벌이나 나비와 같은 수분 생물들이 짙은 녹음 사이에서 붉은 빛깔의 꽃을 찾아내는 게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거진 녹음 사이에서는 흰 색이 가장 눈에 잘 뜨이는 빛깔입니다.
 

▲꽃아그배나무는 꽃이 아름다워 키우는 원예용 나무로 중국이 고향이다. ⓒ2010 HelloDD.com

우리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흰 옷을 입고 경기에 나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홈팀으로 배정된 상대 팀이 푸른 옷을 선택하자, 우리는 붉은 옷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들이 푸른 색과 붉은 색을 구별하는 게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지요. 결국 '붉은 악마'라는 이름에 걸맞는 투혼을 불태웠어야 할 일전에 흰 옷을 입고 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붉은 진달래보다 흰 진달래를 더 귀하게 여겨온 우리 민족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흰 옷 입은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여름에 붉은 꽃을 피우는 나무가 없는 건 아닙니다. 여름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배롱나무(Lagerstroemia indic)가 그 대표적인 여름 나무이지요. 아직 배롱나무의 꽃은 피어나지 않았지만, 조금 지나면 배롱나무도 정열의 붉은 꽃을 피울 겁니다. 여름 내내 백일 동안 그 붉은 꽃을 피우면서 정열의 계절 여름을 상징할 겁니다. 제아무리 흰 꽃이 여름 녹음에 제격이라 해도 배롱나무 꽃의 붉은 정열 앞에서는 무너앉고 말 수밖에요.

▲5월 수목원에 붉은 꽃을 피운 꽃아그배나무.  ⓒ2010 HelloDD.com

오늘 편지에서 소개하는 꽃은 여름 꽃이 아니라, 지난 봄의 꽃들입니다. 하얀 옷을 입은 붉은 악마들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꽃들입니다. 위부터 다섯 장의 사진은 꽃아그배나무(Malus floribunda) 종류의 나무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사진만 보아도 대단한 나무, 대단한 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5월 중순 쯤에 피어나는 꽃아그배나무의 꽃은 화려합니다. 식물도감에는 4월부터 피어난다고 돼 있지만, 우리 수목원에서는 5월 중순 쯤 되어야 피어나지요. 오늘 편지의 사진도 지난 5월 중순에 찍은 사진입니다.

시간은 좀 지났지만, '솔숲의 나무 편지'에서 꼭 보여드리려고 따로 갈무리해두었던 사진입니다. 꽃아그배나무와 비슷한 나무를 놀라움과 함께 만난 적이 있습니다. 충북 괴산의 각연사라는 고즈넉한 고찰(古刹)에서였지요. 10년 쯤 전의 4월 말, 흐린 봄 날이었을 겁니다. 절집을 찾아 들어서는데, 법당 앞 마당 가장자리에 아담한 크기로 자라난 한 그루의 나무에 온통 붉은 빛의 꽃이 피어있었어요. 그때에는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몰랐습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어두었다가 나중에 물어물어 알게 된 그 나무는 꽃사과나무(Malus prunifolia)였습니다.
 

▲나무가지에 온통 붉은 꽃을 피워내는 꽃아그배나무. ⓒ2010 HelloDD.com

꽃사과나무는 대체로 일본의 절집에서 조경용으로 많이 심는다는 게 제게 나무 정보를 가르쳐준 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마 그 꽃을 처음 본 그 봄날의 날씨는 오늘 아침처럼 조금은 탁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흐린 봄 날 아침, 산사의 정원에서 피어난 꽃사과나무의 꽃도 그 날의 날씨를 닮아 탁한 느낌이었습니다. 날씨와 어울린 때문이었을까요? 탁한 빛이 오히려 더 깊고 그윽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보게 되는 꽃아그배나무의 꽃이 제가 괴산 각연사에서 놀라움과 함께 보았다는 꽃사과나무의 꽃과 비슷합니다. 둘 다 나뭇가지 전체에 온통 붉은 꽃을 피워내는 화려한 나무입니다. 게다가 붉은 빛이 영롱하다거나 투명한 맑은 빛이 아니라, 붉은 빌로드 천의 깊은 느낌을 가진 것까지 똑같아 보입니다. 다섯 장의 붉은 꽃잎이나 화려한 꽃술도 닮았고, 삐죽이 돋아난 꽃자루까지 그러했습니다.

▲얇다란 꽃잎을 가지고 있지만 꽃 가지에서 3~7개까지 모여 피기 때문에 화려하다. ⓒ2010 HelloDD.com

중국이 고향인 꽃아그배나무(Malus floribunda)는 꽃이 아름다워 키우는 원예용 나무입니다. 사진에서 보듯 무엇보다 꽃이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이 깊은 빛을 가진 꽃은 가지에서 3개에서 7개까지 모여서 피어나는데, 전반적으로 매우 화려한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그배나무(Malus sieboldii)와 친척 관계인 나무이지요. 장미과의 아그배나무에서는 조그마한 열매가 맺히는데, 이 열매를 많이 먹다 보면, '아이구 배야!' 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합니다.

꽃아그배나무의 꽃잎은 얄따랗지만, 그 빛깔은 그윽한 깊이를 가졌습니다. 맑으면 맑은 대로, 탁하면 탁한 대로 꽃은 그렇게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것이지요. 꽃을 바라보다가 처음에는 수첩에 자홍색이라고 쓰려 했지만, 조금 더 바라다보고 있으니 짙은 분홍빛이라고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 더 바라보니, 다홍빛이라고도 쓰고 싶어지네요. 나무 앞에 머물렀던 시간이 짧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나무 곁에 서 있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햇살을 살금살금 들여보내는 햇님이 조금씩 자리를 바꾸면서 지어내는 빛의 요술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지난 5월 중순 수목원에 꽃을 피운 팥꽃나무. ⓒ2010 HelloDD.com

꽃아그배나무의 꽃이 깊은 느낌을 가졌다고 했지만, 정말 보랏빛 빌로드 천의 느낌을 가진 꽃이 있습니다. 역시 꽃아그배나무와 함께 지난 5월 중순 무렵 우리 수목원에서 활짝 꽃을 피운 나무입니다. 팥꽃나무(Daphne genkwa)입니다. 이팝나무 조팝나무가 그렇듯이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의 이름을 붙여서 기억하게 되는 나무이지요. 위의 사진은 겨울정원(Winter Garden)에 서있는 팥꽃나무의 5월 말 모습입니다.

팥꽃나무라는 이름은 이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의 색깔이 팥의 색을 닮았다 해서 붙었습니다.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재배작물인 팥(Phaseolus angularis)의 꽃을 닮은 게 아니라, 그 씨앗인 팥의 색깔을 닮았다는 겁니다. 팥 꽃은 노란 색이거든요. 팥의 열매인 꼬투리 안에 맺히는 씨앗, 즉 죽을 쑤어 먹기도 하는 팥의 색이 바로 이 꽃의 색깔을 닮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서해안의 바닷가, 특히 해안의 산 기슭이나 숲 가장자리의 햇볕 바른 곳에서 자라는 팥꽃나무. ⓒ2010 HelloDD.com

팥꽃나무에는 특별한 별명이 있습니다. '조기나무'이지요. 조기는 바닷가에서 잡히는 생선인 '조기'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참 특별하지요. 나무와 조기가 무슨 관계를 갖고 있어서 많고 많은 별명 가운데 '조기나무'라 붙였을까요. 팥꽃나무는 대개 서해안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꽃이 예뻐서 어촌 마을에서 애지중지 키워온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에서 꽃이 피어날 즈음이 바로 서해안에 조기 떼가 몰려오는 시기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건 이 나무에 처음 '조기나무'라는 별명이 붙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요즘이야 팥꽃이 피어나도 조기 떼는 잘 몰려오지 않는 듯하니 말입니다. 팥꽃나무 꽃의 색깔이 팥의 색과 비슷하다고 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팥꽃나무 꽃의 색깔은 팥에 비해 상당히 엷은 빛깔입니다. 다만 팥과 같은 보랏빛 계열이라는 점에만 동의할 수 있을 뿐일 겁니다. 먹을 거리가 그리 넉넉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이처럼 나무를 보면서도 귀한 먹을 거리를 떠올렸고, 조금이라도 연상되는 것이 있다면 이름을 붙였던 모양입니다.
 

▲팥꽃나무가 피어날 시기에 서해안 바닷가에 조기가 몰려들기 때문에 조기나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010 HelloDD.com

참 화사한 꽃입니다. 꽃 한 송이가 기껏해야 1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작은 크기이지만,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이 앙증맞게 예쁜 꽃이 가지 전체에 피어나서 유난스레 화려해 보입니다. 은은히 배어나오는 향기도 좋습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꽤 작은 편이어서, 가까이에서 한참 들여다보아야 이 꽃이 조근조근 나눠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눈동자를 맞추고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꽃 송이 위로 보솜하게 난 털이 눈에 들어옵니다. 작고 가는 솜털 덕에 깊이가 느껴지는 빌로드 천의 보랏빛이 더 포근해 보입니다.

팥꽃나무는 우리나라의 평안남도에서 전라남도까지 주로 서해안을 따라서 이어지는 해안가, 특히 해안의 산 기슭이나 숲 가장자리의 햇볕 바른 곳에서 자랍니다. 팥꽃나무과(Thymelaeaceae)에 속하는 식물은 전 세계에 900종 가까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팥꽃나무과 식물로는 서향(Daphne odora), 백서향(Daphne kiusiana), 삼지닥나무(Edgeworthia papyrifera) 등이 있습니다.

▲꽃 한 송이가 기껏해야 1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크기다. 하지만 가지 전체에 피어나 화려해 보인다. ⓒ2010 HelloDD.com

팥꽃나무의 학명, Daphne genkwa 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서 Daphn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무요정의 이름이지요. 다프네는 아폴론의 구애를 피해 도망치던 끝에 나무로 변한 요정이지요. 그때 다프네가 변한 나무는 팥꽃나무가 아니라 월계수였습니다. 그런데 학명으로는 월계수가 아닌 팥꽃나무에 다프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팥꽃나무과 식물의 이파리와 열매가 월계수를 닮았다 해서 붙은 것인데, 그러다 보니, 원래 그 이름의 주인이었던 월계수는 자신의 이름을 팥꽃나무에 넘겨주고 자신은 Laurus nobilis 라는 난데없는 학명을 가지게 됐습니다.

꽃의 빛깔이 독특한데다 키도 아담하게 크는 나무여서, 정원에 키우기에는 안성맞춤인 나무라는 까닭에 팥꽃나무는 요즘 조경 시장에서 주목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네 정서에 잘 어울리는 꽃이기도 해서 더 그렇겠지요. 게다가 꽃이 피어있는 기간도 긴 나무여서, 화단에 심어 키우기로는 더없이 좋은 나무입니다.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잘 키울 수 있는 나무이지만, 햇살이 잘 드는 곳에서 키워야 합니다. 그리 까탈을 부리는 나무는 아닌데, 볕을 좋아하면서도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게 조금 아리송한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아마 팥꽃나무의 보랏빛에 취해있던 날이었을 겁니다. 수목원의 겨울정원을 돌아나오는데, 겨울에 새빨간 열매를 맺는 호랑가시나무가 피워낸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열매 아니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아우성치는 듯한 호랑가시나무의 자잘한 꽃에게도 한번은 깊은 눈인사를 나눌 만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무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는 방법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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