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한국형 원전 기술 독립' 스토리
원자력 산업의 대부 '한필순 박사'…"그가 있었기에"

<사진=대덕넷 제공>
<사진=대덕넷 제공>
우리 시간으로 지난 27일 오후 6시40분께 아랍에미리트(UAE)에서 400억달러 규모의 원전 사업을 수주했다는 낭보가 한국에 전해질 수 있었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 명의 과학기술자의 삶으로 귀결된다.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원자력 발전기술 독립을 선언한 한 과학기술자가 없었더라면 한국형 원전 수출 시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는 증언들이 원자력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주인공은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

그는 1984년 이후 7년 동안 원자력연구소장을 지내면서 한국형 원자로 설계기술과 중수·경수 핵연료 기술을 완전 자립화시키는 등 한국 과학기술계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원자력계에서는 한반도 원자력 역사를 통틀어 이번 원전 수출의 진정한 주역을 꼽으라면 단연 '한필순 박사'를 으뜸으로 꼽는다.

한 박사는 '원자력 발전기술의 자립화'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 가장 먼저 핵연료 기술 자립을 외치며 첫 원자력 발전기술 자립의 모태가 됐다. 동시에 원자로 설계기술 독립을 여러 가지 악조건에서 성공적으로 추진한 원자력 산업의 대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캐나다, 프랑스 등으로부터 원자력 관련 기술을 거의 대부분 도입해야 하는 기술 종속국이었다. 한 박사는 당시 상황을 기술 노예국이었다고 표현하곤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던 당시 한 박사가 과학기술계 대표로 총대를 메고 원자력 설계 기술 자립을 주창했던 것이다.

◆ 전두환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시작된 '원자력 기술 자립화'

"우리 과학자들이 경수로 핵연료를 왜 못만들지? 힘들어도 우리 과학자들이 개발해야 우리 기술이 되지." 1983년 한 박사가 대덕공학센터장(전신 한국핵연료개발공단) 재임 시절 전두환 前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해 던진 말이다.

全 대통령은 한 박사의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사실을 브리핑 받고 경수로 핵연료를 왜 우리나라 기술진이 개발하지 못하는지 캐묻는 등 원자력 기술 자립에 매우 강한 집착을 가졌다. 현장에서 대통령은 한 박사에게 경수로 핵연료도 우리 기술로 개발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全 대통령과의 만남 3개월 후 한 박사는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원자력 기술 자립을 적극 추진하라는 대통령 무언의 지시였다.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를 위해 필요했던 인력만 150명. 그러나 당시 설계 인력이 3~4명 뿐이었다. 한 박사는 일단 사람을 끌어 모았다.

미국 원자력회사에서 경수로 핵연료 설계를 담당했던 김시환 박사와 박종균 박사를 스카웃해 팀을 꾸렸다. 미국에서 원자력 분야로 박사학위를 갓 받은 20여명의 젊은 두뇌들을 유치했다. 한 박사는 이들 모두 핵연료 국산화사업을 위해 좋은 여건을 마다하고 귀국한 '숨은 애국자들'이라고 말한다.

한 박사는 독일과 공동설계 기술개발 전략을 택하고 30여명의 소수 정예팀을 독일로 파견했다. 특유의 추진력으로 돌파해 가며 경수로 핵연료 기술 자립을 추진했다. 결국 89년 말 최초로 국산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한 데 이어 이듬해 원자로에 첫 장전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경수로 핵연료 기술 자립이 원자력 발전기술 독립국의 시발점이 됐다.

◆ 50명 과학자들 '설계자립' 만세삼창하고 눈물의 미국행

"우리는 한마디로 원자력 설계 능력이 없어 우리 입맛에 맞는 발전소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과학자들은 매우 우수합니다. 제대로 훈련만 시킨다면 얼마든지 설계능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하루 빨리 설계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원자력 기술자립은 요원합니다."

 UAE 원전 수출 쾌거의 근간이 된 한 박사의 어록이다. 한국형 원전 설계 기술 확보를 전적으로 과학기술자들의 손으로 해내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내뱉던 발언이다.

한 박사가 스스로 일생 일대의 야심작으로 꼽는 프로젝트는 원자력연구소장 재임 시절의 한국형 경수로 설계기술 확보다. 1984년 당시만 해도 한국형 경수로 설계 기술 확보는 요원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경수로 핵연료 기술개발 인력 문제로 허덕이던 연구소는 새로운 기술 자립 프로젝트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부와 한국전력 측에서 한국형 원자로 개발 분위기가 돌자 한 박사는 연구소가 어떤 형태로든 대형 원전사업에 참여해 원자력 기술자립을 이룩하는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국형 원전 설계기술 확보도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을 배우면서 이전받는 전략을 택했다. 설계기술개발 인력은 최소 200여명이 필요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문가는 1명 뿐이었다. 기술 이전을 위해 미국에 이병령 박사를 주축으로 50명을 파견했다. 파견 당시 모두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 박사는 우리 과학자들의 우수성 믿었다. 모든 과학자들이 비장한 각오를 했다.

▲1986년 12월 12일 원전 설계기술 자립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한국원자력연구소 직원들. ⓒ2009 HelloDD.com
한 박사가 원자로 계통설계 사업책임자인 김병구 박사(전 IAEA 국장)를 일으켜 세운 뒤 떠나는 과학자들에게 전한 말은 지금까지도 과학자들 마음에 울려퍼지고 있다. '必 설계기술 자립'이라는 액자를 들고 만세삼창을 내질렀다. 그리고 "실패하면 돌아오지 말고 태평양에 빠져 죽으라"고 했던 한 박사는 당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시울을 붉힌다.

미국에 갔는데 정작 미국 연구소에서 약속한 핵심기술을 알려주지 않고 허드렛일만 시켜 이병령 박사가 "이렇게 기술 이전에 성의 없으면 철수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당시 한국 과학자들은 미국에서 일주일 80시간씩 일했다 이렇게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3년 만에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 확보 프로젝트를 완성됐다.

한국형 경수로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소장은 "한필순 소장의 용단과 강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원자력 기술 노예국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한국형 원전 개발을 위해 85년 유치과학자로 한국행을 택한 김동수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박사는 한 박사에 대해 "국내 원자력 산업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자 원자력 기술자립의 대부"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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