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한상근 KAIST 교수

나는 귀국 후 1989년부터 연구단지에 있었는데 직장이라고는 KAIST(한국과학기술원·총장 서남표) 밖에 경험하지 못해서 이 글은 이공계의 위상 전반에 관한 개인적인 소회를 말하는 글이 됨을 독자께서는 이해해주기 바란다.

요즘의 어수선함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연구소통폐합 푸닥거리로 이해하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후다닥 만들어 놓았다가 이번 정부에서 집어치운 ICU(한국정보통신대학교·총장 직무대행 이혁재)가 그 대표적인 예다.

걸핏하면 연구소를 이렇게 뒤흔들면서 고등학생들이 이공계로 진학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다.

공무원이나 정치인의 자녀가 어떤 전공을 선택했는지 살펴보면 몇 년에 한 번씩 드러나는 이공계의 '진짜' 위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1~2년 뒤의 실용과 효율을 원하면 몇 조원을 지원해주는 BK, NURI, 지방대 육성사업을 그만두고 그 돈은 저소득층 취로사업에 사용하거나 학부생 등록금 지원에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서글픈 전통이 다음 정부에서도 이어질 것인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미 대학원에서는 석사학위 까지만 공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남들보다 몇 년 늦게 박사학위 받아봐야 취직하기도 어렵고 취직해봐야 또 언제 내몰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판단은 정확하다.

혹은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적했던 것처럼 일회용 '소모품'으로 사용하라고 이공계 인력을 값싸게 대량생산해서 대기업에 제공하는 것이 아직도 정부의 숨은 의도인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진심으로 연구가 좋아서 이공계를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각종 유인책에 속았던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이언스 키드의 생애'라는 슬픈 이야기를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다.

또 다른 전통은 유행처럼 만들어내는 대형과제들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World Class University) 육성사업이라는 것이 튀어나왔다.

진짜 세계적 수준을 원하면 연구소에 그 돈을 사용해야 한다. 수학에서 예를 들자면 고등과학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한국보다 연구수준이 떨어진 어떤 나라에서 돈을 제법 준다며 2~3년 자기네 나라에 오라고 했다 하자. 아직 교과서를 더 배워야하고 한국어로 의사소통하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싶겠는가 아니면 연구라도 해보았고 한국어도 조금 더 통하는 박사학위 소지자들과 공동연구를 하며 지내고 싶겠는가. 몇 달씩 일정이 정해진 강의에 해외 유명학자를 부르기는 더욱 힘들다. 그렇게 올 순수 외국인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업은 이삼십년 전처럼 어떻게 한국에 낙하산으로 돌아올 길이 없을까 하는 교포들에게 세금으로 고속도로를 놓아줄 뿐이다.

지금은 국내박사의 수준도 해외에서까지 경쟁력 있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국내파와 해외파를 차별대우할 것이라면 똑똑한 국내박사를 해외에 장기간 박사 후 연구원으로 보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공청회를 한다며 가끔 편지가 오기는 하지만 봉투를 뜯어보면 이미 날짜가 이삼일 후로 정해져있고 장소는 물론 서울이다. 편지 받았다고 진짜로 오지는 말라고, 서울 사람들만 참석하기 편하게 시간표를 짜서 간단하게 끝난다.

토론 참여자는 어떻게 정했는지 이미 정해 놓았고 각종 자료는 없으며 나중에 이메일이나 우편으로 보내주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혹시 시간나면 와서 박수나 좀 치고 가라는 것인데 어차피 원안대로 사업은 시작한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 부조리를 질책하지 않고 '알아서 기어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연구센터 직원이 일요일에 출근해 일하는 것을 보았다. 한데 주말에 급하게 자료를 원했던 과천의 공무원은 그토록 급하게 그 자료가 필요했을까. 내 생각에는 월요일에 과장이나 국장이 '혹시' 보자고 할지 모르니까 만들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요청하는 자료의 양식이 매번 다른 것을 보면 부랴부랴 만들어낸 양식이라는 것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다른 양식을 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인수인계도 없이 담당이 바뀌어서 그럴 것이다.

독자 여러분에게는 미국에서 있었던 이와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고 싶다. 리차드 해밍이라는 전산학, 수학에서 유명한 학자가 있다. 이 사람이 국방부의 어떤 하급관리로부터 주말에 빨리 어떤 자료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관리의 잇단 재촉에 해밍은 주말에 출근하여 자료를 보내주기는 했지만 월요일에 자신의 상사와 국방부에 연락해서, 주말에 그 관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확인하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관리는 물론 주말에 출근하지 않았고 해밍이 보냈던 자료는 관리의 책상에서 월요일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후 주말에 자료가 급하다는 따위의 헛소리는 사라졌다고 해밍이 회고했다.

대덕연구단지를 보면 이공계의 위상이 쉽게 보이는데, 과기부는 약속을 어기고 정부 3청사에 오지 않았다. 대전광역시의 한 복판 둔산에도 외청들만 왔는데 세종시에는 도대체 무엇이 올지 궁금하다. 사람들에게 들었던, 연구단지에 개업의나 약국이 없다는 이야기도 연구단지 주민들은 사실여부를 쉽게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KAIST가 생명연과의 통합 같은 소모적인 논쟁에 매달리지 않고, 의대를 만들겠다고 나서면 나도 적극 찬성하고 싶다. 5년 뒤의 푸닥거리에서 이미 겪었던 KAIST-KIST 통합 후 분리처럼 무슨 일이 다시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KAIST나 연구단지의 힘으로는 의대를 만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PBS는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래도 괜찮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사람은 동창회 명부를 잘 사용하면 PBS 덕택에 연구소 생활이 편하다는 이야기를 역시 들었다.

또한 출연연 연구원들은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에 가입하지 못하고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다. 첫 직장은 대학원을 다니느라 남보다 늦게 시작하고 연구직은 안정적이지 않고 노후대책은 국민연금인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일찌감치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더 실용적인 인생일 것이다.

이공계를 살리고 싶으면 어려운 환경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잘 대접해줘야 저절로 인재가 모이지, 한쪽 손으로는 기존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어린 학생들에게 독이 든 사탕으로 유인책을 써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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