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마당]표준연 사보1·2월호, 글:정영춘 기술표준원 연구위원

한 치(寸), 한 뼘(指尺), 한 보(步), 한 홉(合), 한 되(升) 등은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단위이다. 이 단위는 우리 조상이 옛날부터 사용하면서 길이, 무게 등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이를 도량형이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길이, 넓이, 무게 따위의 단위를 재는 단위법과 길이를 재는 자, 부피를 가늠하는 되와 말, 무게를 다는 저울과 같은 측정기구를 통 틀어 이르는 말이다.

올 한 해 '표준 타임머신'에서는 도량형의 기원과 역사를 통하여 표준 척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왔으며 사용되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도량형의 기본 표준 척도인 '자'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 신체를 기준으로 헤아린 수량의 개념

도량형의 대부분은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성인 남자의 신체 일부를 기준으로 사물의 길이나 양을 측정했다. 가령 손가락 한 마디의 폭을 한 치, 손바닥의 폭을 한 뼘, 한 걸음을 한 보로, 한 줌을 한 홉의 양, 한 움큼을 한 되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그런 예이다.

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도량형을 만드는 기준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거기에 사회가 발달하고 각종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정확한 측정기준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국가에서는 세금을 걷기 위해서 좀 더 정확하고 객관성이 있는 도량형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지금 보아도 정밀성 뛰어난 우리 옛 측정도구

도량형 중에서 가장 기본은 '자'이다. 표준 척도가 있어야만 되·말·저울 등의 표준 용기를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표준 척도의 제정은 도량형 정비의 핵심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도령형의 기원도 척도에서 비롯되었다. 자를 뜻하는 척(尺)이란 글자 모양은 손바닥(口) 아래로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잔뜩 벌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인신척으로 10지폭이 지척(指尺)으로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주척(周尺)으로 통용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성인 남자의 손가락을 기준으로 한 지척(指尺)을 양전척으로 삼아 토지의 등급에 따라 척도의 길이를 달리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도량형기를 제작했다. 세종 때는 악기 제조와 음률을 조율하는 데 쓰는 황종척(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34cm)을 만들면서 이 황종척의 길이를 기준으로 측우기 등 천측기구, 거리, 토지 등을 재는 주척(약 20 cm), 영조척(약 30 cm) 등을 만들었다. 영조척은 성벽이나 궁궐 등을 건축하거나 되, 말 등의 양기를 만들 때 사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왕실 제기를 측정하고 제작하는 데 사용한 조례기척(약 28 ㎝), 포목과 피혁을 재단하는 데 쓴 포백척(약 46 ㎝) 등도 만들었다. 이처럼 다양한 도량형기를 만드는 데 정확한 측정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음악을 조율하는 데까지 측정도구를 사용한 점에서 삶 속에 녹아든 조상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영조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놋쇠자인 유척(鍮尺)은 정밀성 면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 길이 246㎜·폭 12㎜·높이 15㎜. 4각 기둥의 각 면에는 주척, 황종척, 영조척, 조례기척, 포백척이라는 명칭과 눈금, 용도가 음각되어 있다. 하나의 놋쇠막대에 다섯 종류의 자를 모두 새겼다.

이 자들의 눈금과 간격 250개를 측정해보면 지금의 자와 비교해도 눈금의 균일성과 정밀도에 차이가 없다. 재질과 성분 또한 요즘의 합금에 가까워 형상이나 치수, 눈금 표시 등 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적, 금속학적 요건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18세기에 이처럼 정밀도가 높은 도량형기를 만든 사실은 당시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신속하고 정밀한 컴퓨터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지만 그동안 조상들이 사용하던 전통의 도량형을 큰 불편 없이 사용해 왔다.

이것은 도량형이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한 '인신척'에서 비롯된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공감하는 경험과 일종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아직도 그 단위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자, 저울 없이도 길이와 양을 짐작할 수 있는 효율성과 편리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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