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연구소 최철웅(42)씨, 장애 딛고 다승왕 및 최우수선수상 '수상'

12일 오전 11시 30분 LG화학/기술연구원 운동장. '2005 사이언스 리그(대덕연구단지 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이 시작됐다. 이날 결승전은 예선전에서 15전 전승으로 올라온 한화석유화학중앙연구소와 리그 3연패에 도전하는 LG화학/기술연구원이 맞붙었다. 두 팀에서 발산되는 우승에 대한 열의와 긴장감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특히 같은 석유화학 계통에서 라이벌로 통하는 양 팀 선수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경기가 시작되자 사이언스 리그 20년의 산증인인 한화석유화학중앙연구소 최철웅(42) 투수가 먼저 마운드에 올랐다. 커브와 직구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그는 상대 선수를 제압했다. 한화연구소는 예선전에서 LG화학/기술연구원을 4대3으로 승리한 전적이 있지만, LG팀에는 전직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동했던 이정주 선수가 포진하고 있어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0년 동안 갈고 닦은 노련미와 강한 어깨는 최 씨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2회까지 1실점으로 상대 타선을 저지하자 곧바로 한화팀에게 기회가 왔다. 2회 초 한화의 공격이 시작되자 타선이 불붙기 시작했다. 주자 만루인 상황에서 3번 타자 조용수 선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루 홈런을 터뜨렸고 그 때부터 한화의 불방망이가 폭발했다. 이는 경기전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뜨리며 파란을 예고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어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4번 타자 오태훈 선수가 홈런을 이어가자 LG팀의 충격은 상당했다. LG팀은 강력한 한화팀의 타선을 저지하기 위해 감독과 코치진이 작전을 짜기 위해 고심했고, 직구를 자랑하는 투수와 커브를 구사하는 선수까지 여러 선수를 기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7회 말 경기가 끝나자 16대 4라는 큰 점수차로 한화팀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올해 우승으로 한화팀은 리그 3번째 우승을 기록하며 사이언스 리그의 강자로 부활을 알렸다.
 

▲사이언스 결승전에 참가한 LG화학/기술연구원과 한화석유화학중앙연구소 선수단. ⓒ2005 HelloDD.com

한화연구소 야구단의 산증인 '최철웅'..."아픔을 딛고 영광의 순간 맞아"

이번 대회에서 겁이 없고 저돌적으로 밀어부친다 해서 '탱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최 씨는 동료의 환호를 받으며 '2005 사이언스 리그'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그에게 2005년 사이언스 리그 결승전은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기억됐다. 그는 지난 85년에 입사해서 사이언스 리그가 태동하고 위기를 겪고 제자리를 찾기까지 20년을 함께 했다. 프로야구 같으면 벌써 은퇴를 하고 마운드를 떠나야 했지만, 지금도 후배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같은 유니폼을 입고 언제나 사이언스 리그를 지켰다.

▲다승왕과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최철웅(42)씨 ⓒ2005 HelloDD.com

올해 최 씨는 사이언스 리그와 함께 한 그의 삶을 기념하듯 다승왕과 최우수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최 씨가 사이언스 리그에 인연을 맺은 해는 85년. 한양화학(한화석유화학중앙연구소의 옛 명칭)에 입사할 때부터다. 당시 한양화학의 신현주 소장은 대덕연구단지 종합체육대회 폐막식에서 사이언스 리그를 정식 리그로 출범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신 소장이 연구단지 야구를 정식 리그를 제안은 했지만 한양화학팀의 실력은 인근 연구단지에서 하위 수준이었다.

팀내 선수들은 모두 야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보니 제대로 공을 던지거나 피칭을 할 수 있는 실력자가 없었다. 이를 본 신 소장은 팀내 분위기를 쇄신하고 리그에서 우승을 목표로 스타급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닫고 적당한 인물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 때 어려운 가정 살림 때문에 단국대학교에서 중퇴한 최 씨가 발탁됐다. 최 씨는 단국대 야구팀에서 포수와 3루수를 맡으며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았던 유망주였다. 최 씨가 사이언스 리그에 뛰게 된 일은 연구단지에서 큰 파장을 불러왔다.

그에게 '연구단지 내 야구선수 1호'라는 타이틀이 붙으며 다른 연구소에도 영향을 끼쳤다. 최 씨가 한양화학에 입사한 뒤 팀내 분위기와 실력은 180도 바뀌었다. 그를 중심으로 팀원들이 뭉치게 됐고 체계적인 훈련 방식이 도입되고 한 여름에도 땀을 흘린 결과 87년에는 큰 결실을 얻었다. 만년 하위팀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던 한화는 3년만에 리그 우승이라는 기적을 이뤘다.

리그 우승은 최 씨가 입사한 지 3년만이다. 이렇듯 한화에 입사해서 사이언스 리그가 20년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최 씨는 이 모든 변화상을 그라운드에서 꼬박 지켜봤다. 그 굴곡의 역사에서 최 씨는 90년에 큰 좌절을 겪기도 했다. 당시 작업장에서 손을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야구선수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그에게 육체적인 상처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한 동안 방황의 시절을 보낸 그가 마침내 제 위치를 찾는 데는 가족의 역할이 컸다. 첫 아들 민열이가 막 태어난 시점에서 가장이 흔들리면 가족 전체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 잡았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아내에게 무능한 남편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기 싫었다"고 최 씨는 회상했다.

그가 일터로 복귀하면서 사이언스 리그에 복귀 했을 때 같은 유니폼을 입은 동료들이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비록 왼손은 '의수'에 의지했지만 남은 한 손이 있기에 당당했다. 또 그의 곁에는 가족뿐 아니라 다이아몬드 구장을 함께 누빈 동료들이 있었다. 사고로 잠시 운동을 포기했던 그는 팀에 복귀하면서 포지션을 바꾸었다. 한 손이 불편해도 경기를 뛸 수 있는 투수로 위치를 정했다. 다른 선수처럼 왼손에 글러브를 끼지 않았기에 오른손이 할 일이 많아졌다. 포수가 던지는 야구공을 잡는 동시에 곧바로 던지는 모습이 이제는 한화를 상징이 됐다.

상처에 대한 기억이 벌써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만난 최 씨는 상처에 대한 불편보다는 승부에 대한 욕심이 넘처났다. 2회 말 볼 넷으로 마운드를 내려와야 할 때도 아쉬움을 토로하며 경기에 대한 욕심을 냈던 그는 경기장 밖에서도 경기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염원했다. 현재 최 씨는 현재 두 아들의 아버지다. 그는 두 아들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두 아들 중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태극마크를 달고 마운드에 서는 것. 그는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야구를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나를 대신해서 아들이 그 꿈을 이뤄졌으면 좋겠다"며 "직장과 가정에서 운동으로 모범을 보이고 아들의 운동을 도와주면서 그 목표를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우승기를 들고 있는 한화연구소팀. ⓒ2005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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